대학생 시절 엄마에게 소노 아야코의 <나는 이렇게 나이 들고 싶다>를 선물한 적이 있다. 그때 엄마는 바빴고, 책은 첫 페이지조차 읽히지 않은 상태 그대로 남았다. 결국은 내가 그 책의 첫 독자가 되었다.
계로록을 읽을만한 나이와는 한참 떨어져있었을 때였지만 무심히 넘기는 페이지마다 그녀의 글은 내게 큰 인상을 남겼다. 그리고 시간이 흐른 후 나는 그녀의 또 다른 책을 만나게 되었다.
<착한 사람은 왜 주위 사람을 불행하게 하는가>. 왜 인지는 모르지만 제목만으로도 마음 한구석이 덜컥, 했던 기억이 난다. 아마 당시의 내 상태가 그랬던 것인지도 모른다(십 여년 전까지만 해도 착한 사람 콤플렉스가 한창 충만해있던 때였으니).
소노 아야코의 글은 늘 담백하고 솔직하다. 누군가에게는 다소 염세적으로 느껴질지 모르지만 나에게는 현실적이면서도 진정성 있는 통찰이 느껴진다.
2008년 일본에서 출간된, 지금은 중고 서적이 아닌 이상 찾아 읽기 힘들게 된 그녀의 이 책에서 나는 일종의 '따뜻한 시니컬함'을 느꼈다. 이는 단순한 냉소가 아니라 허울을 벗긴 진짜 진실을 마주하는 용기다.
삶의 단면을 고요하게 들여다보는 그녀의 시선은, 평온한 호수처럼 잔잔하면서도 그 안에 깊은 성찰이 존재한다. 읽으면 읽을수록 그녀의 이야기는 단지 개인사적인 경험담이 아닌 보편적인 사실처럼 다가온다.
책을 보면서 깨달은 것이 있다. (당연하게도) 착한 사람이라고 해서 모두 행복하지 않다는 것이다. ‘착함의 기준이 왜곡될 때, 오히려 불행을 만들어낸다’는 지적은 날카롭다. ‘착함’이라는 미명 아래 얼마나 많은 사람들이 자신의 의도와는 다르게 남을 불편하게 만들고 있었는지 생각해보게 한다.(물론 지금은 이런 식의 관점이 익숙하다. 책을 처음 읽은 후 강산이 한번 바뀔 동안 세간의 가치관도 많이 변했음을 체감하는 부분이다. 그래서 절판됐나?)
나 역시도, ‘착한 사람’이라는 지독한 덫에 빠져 살아온 적이 있었다. 청소년에서 삼십대 중반까지 그 긴 세월을 줄곧 거절하지 않는 것이 미덕이라고 배웠고, 그 미덕을 충실히 이행하는 소모적 삶을 살았던 것 같다.
스물다섯의 나는 착한 사람이 되어야 한다는 강박의 절정을 보내고 있었고, 내가 잘못된 ‘신념’에 빠져 있다는 사실을 처음으로 지적받았다. 그 순간은 정말 충격적이었다. 생각해보면 나에게 솔직하게 자기 생각을 말해준(나를 ‘가르치려 들지 않은’) 몇몇 사람들이 곁에 있었다. 그 덕분에 내가 정신적으로 더 성숙해지고 단단해졌는지는 정확히 알 수 없지만 오해의 여지없이 진심을 터놓기 힘들어진 요즘 세상에(코로나 이후 부터인가? 세상의 ‘렌즈’가 너무 많이 바뀐 기분이다. 지금 당장은 더 ‘효율적’이 되었다는 판단이 크긴 하지만) 당시 나를 아껴주었던 그들의 신중한 마음이 지금도 기억에 남는다.
반면, 부드러운 말만 해주었던 사람들의 경우 좀처럼 기억에 남지 않는다. 가까운 친구는 그런 식의 좋은 말만 하는 표면적인 위로에 대해 ‘인본주의적 쓰레기’라고까지 부르며, 실제로 중요한 문제를 보지 못하게 만든다고 이야기한 적이 있다.
여하튼 이런 생각의 노선 변화는 내 입장에서는 결코 가벼운 것이 아니었다. 이 책의 핵심은 뭔가 거대한 철학적 사유가 아니라, 아주 일상적인 경험들 속에서 천천히 고여 있다. 사람들은 아직도, ‘사회적’, ‘정상적’이라는 이름으로 불편한 진실들을 덮어두려고 한다. 그러나 진정한 평화는 불완전함을 인정하는 데서 오는 것이다. 때로는 냉정하게 상대를 의심하고, 세상을 삐딱하게 바라볼 필요도 있다.
이제는 이런 제목보다는 선 넘는 사람에게 어떻게 하면 경계선을 설정할 수 있는지, 어떻게 하면 나를 이용하려 하거나 가스라이팅 하는 사람들에 의해 휘둘리지 않을 수 있는지에 대한 심리학 책이 쏟아져 나오는 시대가 되었다.
소노 아야코의 이 책은 실제 심리학적 연구나 이론적인 설명을 전혀 하는 것이 아님에도 이미 오래전에 삶에서 가장 집중해야 할 것은 타인의 이목이 아닌 진짜 나 자신을 찾는 일이라는 것을 발견하고 그 구체적인 단상들을 기록했다.
사람들의 통념과는 다르게, 무엇이 옳다 그르다 무엇이 착하다 그렇지 않다고 하는 기준 자체를 믿지 않는 것, 그리고 이득이나 평판 때문에 그런 것에 쉽게 매이고 마는 인간의 속성과 자기 스스로 또한 믿지 않는 회의적인 자세가 오히려 삶을 다채롭고 풍요하게 만들어주는 건지도 모른다.
소노 아야코의 이야기는 삶의 불완전함을 인정하고, 그 안에서 진정한 평화를 찾으라고 말하고 있다. 그녀는 단순히 ‘착한 사람’이 되는 것이 아니라, 불완전한 인간으로서의 진정한 자유를 추구하라고 조언한다.
삶은 복잡하게 보이지만, 본질은 생각보다 매우 단순하다. 중요한 것은 그 단순함 속에 깃든 ‘진실’을 용기 있게 마주하는 일이다. 그때에야 우리는 세상에 휘둘리지 않고 나 자신으로 살아가면서도 진정한 평온을 얻을 수 있기 때문이다.
착한 사람은 자기 멋대로 행복해하면서 주변 사람을 불행하게 만드는 경우가 있다. 그 사람은 자신의 행동에 확신이 있기 때문에 오히려 난감하다. 다른 사람의 마음을 알지도 못하면서 스스로 착한 사람이라고 믿어 의심치 않기 때문이다.
-스스로를 착한 사람이라 믿는 것-
슈바이처 박사에 대한 사람들의 인식은 ‘원시림의 성자’라는 이미지를 갖고 있거나 그것을 배신당해 크게 실망을 품거나 둘 중의 하나인데 에드거 버먼이라는 외과의사는 이렇게 묘사했다.
“박사는 인정이 많으면서도 박정하고 용서가 없었고, 단순하면서도 복잡하고, 고집불통이면서 타협적이며, 대담하면서도 세심하고, 구두쇠이면서도 인심이 후했고, 잔소리가 심하면서도 너그럽고, 정이 두터우면서도 냉담하고, 짜증을 내놓고도 평온하고, 섬세하면서도 뻔뻔스러운, 그리고 무엇보다 많은 부분 불완전한 완벽주의자 였다.”
우리 현대인은 대부분 이와 정반대다. 인도적인 말만 하면서도 실제로 행동으로 보이는 것은 아무것도 없고, 소심해서 세상의 흐름을 타고 부화뇌동하며 반대하는 것이 시민의 권리라고 생각하고, 뿌리부터 구두쇠이기 때문에 공금을 아무렇지도 않게 쓰고, 참견을 잘하기 때문에 잘 알지도 못하는 타인의 행동을 비판하고, 냉담 이상으로 무관심하며, 삶에 대한 취향이라고는 눈곱만큼도 없이 체제에 아첨하고, 자신의 의지를 표현할 용기는 전혀 없고, 그리고 무엇보다 전혀 결점이 없는 것 가지만 사실은 무엇 하나 적극적으로 좋은 일은 하지 않는 인물뿐인 것 같다는 생각이 든다.
-불완전한 완벽주의자-
나는 항상 사람을 대할 때 나쁜 사람은 아닐까 하며 조심해 왔기 때문에 결과적으로 좋은 사람을 많이 만날 수 있었다고 느낀다. 악의 덕분에 오히려 실망하지 않고 넘어간 것이다. 반대로 세상에는 좋은 사람만 있다고 생각하고 있다가 속거나 배신당하기도 하고, 심지어 납치되거나 살해당하는 일도 생길 수 있다. 나처럼 상대를 믿지 않는 것이 얄궂게도 오히려 삶을 찬미하는 결과를 낳았다. 역시 때로 인간을 믿지 말라고 가르칠 필요가 있다. "
-불완전함을 전제로 바라보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