독서란 자기 스스로 생각하지 않고 남이 대신 생각해 주는 것이다. 다시 말해 우리는 그 사람의 마음에서 일어나는 과정을 따라가는 것에 불과하다. 학생이 글쓰기를 배울 때 선생이 연필로 그어 놓은 선을 따라 펜을 움직이는 것과 같다. 그것에 따라 책을 읽으면 우리는 생각을 거의 하지 않는다. 독자적 사고를 하다가 독서를 하면 마음이 한결 홀가분해지는 것은 바로 그 때문이다. 우리의 머리는 책을 읽는 동안에는 타인의 생각이 뛰어노는 놀이터에 불과하다.
음식이란 먹는다고 우리 몸에 양분이 되는 것이 아니라 소화를 해야 되는 것처럼, 되새겨야만 읽은 것이 자기 것으로 된다. 반면에 끊임없이 책만 일고 나중에 그것을 계속 생각하지 않으면 읽은 것이 뿌리를 내리지 못하고 대부분 사라지고 마는 것이다(뜨끔). 정신의 양식도 육체의 양식과 마찬가지로, 섭취한 양의 50분의 1 정도만 흡수되고 그 나머지는 증발이나 호흡, 또는 그 밖의 일로 없어진다.
문학의 세계도 인생과 다르지 않다. 어디로 눈을 돌리든 교정 불능의 천민 무리를 만날 수 있다. 이들은 어디서든 무리 지어 살면서 여름의 파리 떼처럼 온갖 것을 가득 채우고 온갖 것을 더럽힌다. 그 때문에 무수히 많은 악서惡書, 문학에 무성한 이 잡초는 밀의 양분을 빼앗아 질식시킨다. 다시 말해 이러한 악서는 단순히 돈이나 지위를 얻으려는 의도에서 쓰인 것인데도 당연히 양서와 그것의 고상한 목적에 쓰여야 할 독자의 시간과 돈, 주의력을 빼앗아 간다. 그러므로 악서는 무익할 뿐 아니라 절대적으로 해롭다. 현재 우리나라의 저작물 중 10분의 9는 독자의 호주머니에서 돈을 빼내려는 목적밖에 없다. 이런 목적을 위해 저자와 출판인, 비평가는 똘똘 뭉쳐있다.
현대의 문필가, 매문업자賣文業者,다작가들이 시대의 좋은 취향과 참된 교양을 외면하고, 전체 상류 세계를 고삐로 끌어내 즉각 자신들의 글을 읽도록 길들이는 데 성공한 것은 교활하고 고약한 짓이긴 하지만 눈부신 일이라고 할 수 있다. 다시 말해 그들은 사교 모임에서 대화의 재료로 삼기 위해 모두 언제나 같은 책, 즉 최신 저작을 읽지 않을 수 없는 것이다. 이런 통속 소설을 읽는 독자들의 운명만큼 비참한 것이 어디 있겠는가! 이런 독자들은 단순히 돈 때문에 글을 쓰고 그 때문에 늘 떼로 존재하는 극히 평범한 작가의 최신 졸작을 읽는 것을 언제나 의무로 생각한다. 그 대신 동서고금에 걸쳐 희귀하고 훌륭한 작가가 쓴 작품은 이름만 들어 알고 있을 뿐이다! 특히 미학적 감각이 있는 독자는 참된 예술 작품을 읽어서 자신의 교양을 높이는 데 사용해야 한다.
사람들은 모든 시대를 통틀어 최고의 작품 대신 항상 최신 작품만 읽기 때문에 저술가는 유통되는 이념의 좁은 범위에 갇혀 있고, 시대는 언제나 그 자신의 오물 속에 점점 깊이 파묻힌다.
그 때문에 우리의 독서법에서 보면 읽지 않는 기술이 극히 중요하다. 그 기술이란 늘 곧장 좀 더 많은 독자의 관심을 끄는 작품을 그 때문에라도 손에 쥐지 않는 데 있다.(이유는 좀 다르지만-사람들이 많이 부추기거나 소비하는 것일수록 흥미가 떨어지는 희한한 습성 때문에-영화와 책 패션을 포함 모두 늘 '최신에 뒤처지는' 비트랜드성이 좀 다행스럽긴 하다) 항시 얼마 안 되더라도 일정 시간을 독서에 할애해 모든 시대와 민족을 막론하고 나머지 인류보다 위대하고 탁월한 정신의 소유자이라서 그 자체로 명성이 자자한 작가가 쓴 작품만 읽도록 하라. 이런 작품만이 정말로 우리에게 교양과 가르침을 준다.
양서를 읽기 위한 조건은 악서를 읽지 않는 것이다. 인생은 짧고 시간과 힘은 한정되어 있기 때문이다. 나는 이미 젊은 시절 슐레겔의 멋진 경구를 접하고, 그때부터 그것을 나의 좌우명으로 삼은 운명에 감사한다.
고전을 읽어라! 참으로 가장 오래된 고전을!
현대인이 칭찬하는 글은 그다지 중요하지 않으니.
<고대 연구>
오, 어떤 평범한 인간은 다른 평범한 인간을 어쩌면 그다지도 닮았단 말인가! 그들은 어쩌면 모두가 하나의 틀에서 만들어진단 말인가! 누구나 같은 기회에 다른 생각은 하나도 떠오르지 않고 같은 생각만 떠오른단 말인가! 더욱이 그들은 저급한 개인적 의도를 지니고 있다(내가 흔히 아무런 자발적 가치 판단 없이 맹목적인 타인 이목과 육체 본능을 따르는 '바퀴벌레류 인간들'에 대해 구토감 비슷한 혐오를 느끼는 것처럼 많은 경우(생각이 없어보이지만 결국 저급에서 하나로 모이는)천박한 이들의 정신에 대한 배척심은 종종 그의 고귀함(스스로 갖고 있는 자들만이 오해하지 않고 받아들일 수 있는 자기 내면의 단어)에 대한 본능적이고도 강력한 지향성 반증한다)
모든 시대와 모든 나라에서 배출된 온갖 종류의 더없이 고귀하고 극히 드문 정신의 소유자가 쓴 작품을 읽지 않고 방치하는 독자의 어리석음과 불합리함은 도저히 믿을 수 없을 정도다.
어느 시대에나 상당히 낯설게 서로 나란히 존립하는 두 가지 형태의 저작물이 있다. 하나는 참된 저작물이고, 다른 하나는 겉보기만 그럴듯한 저작물이다. 참된 저작물은 영원한 저작물이 된다. 학문이나 문학을 위해 살아가는 사람들에 의해 쓰인 참된 저작물은 진지하고 조용하나 매우 더딘 걸음을 한다. 그래서 이런 작품은 한 세기 동안 유럽에서 거의 한 다스도 나오지 않으나 영원히 존속한다. 학문이나 문학으로 밥벌이하고 살아가는 사람들에 의해 쓰인 겉보기만 그럴듯한 저작물은 당사자들이 큰 소리로 야단법석을 떠는 가운데 빠른 속도로 내달린다. 그런 작품은 매년 수천 개씩 시장에 쏟아져 나온다. (책의 판본 『Parerga und Paralipomena』(Kleine philosophische Schriften Ⅰ,Ⅱ)는 1851년에 출판되었는데 당시에도 책시장이 트랜드 위주였다는 사실은 뭔가 새삼 놀랍다)
얼마 지나지 않아 사람들은 그것들이 어디로 갔느냐고, 그렇게 일찍부터 떠들석하던 그 명성은 어디로 갔느냐고 물을 것이다. 그 때문에 이런 저작물은 일시적인 저작물이라고, 참된 저작물은 영원한 저작물이라고 부를 수 있다.
어떤 사람이 자기가 지금까지 읽은 것을 모두 간직하기를 바라는 것은 지금까지 자기가 먹은 것을 모두 체내에 담고 있기를 바라는 것과 같다. 그가 먹은 것에 의해 육체적으로 살고, 읽은 것에 의해 정신적으로 살아서 현재의 자신이 되었다. 하지만 육체는 자신과 동질적인 것을 동화시키듯이, 누구나 자신이 흥미를 느끼는 것, 다시 말해 자신의 사고 체계나 그것의 목적에 맞는 것만 간직할 것이다. 물론 누구에게나 목적은 있지만, 사고 체계와 비슷한 것을 지닌 사람은 극소수다. 이 때문에 그들은 어떤 것에도 객관적인 흥미를 느끼지 않는다. 이런 점 때문에 독서를 해도 그들에게 아무것도 남지 않는다. 다시 말해 그들은 읽은 것을 아무것도 간직하지 않는다.
"반복은 연구의 어머니다." 중요한 책은 무엇이든 즉시 두 번 읽는 게 좋다. 그래야 사물의 맥락을 좀 더 잘 파악할 수 있고, 끝을 알고 있으면 처음 부분을 비로소 제대로 이해할 수 있기 때문이다. 또한 두번째 읽을 때는 어떤 대목도 처음과 다른 분위기와 기분을 느끼므로, 다른 인상을 받는다(책도 그렇지만 영화도 그렇다 바로 이어 두 번째 볼 때조차 다른 것들이 보인다).
작품은 정신을 능가하고 앞지른다. 심지어 평범한 인간이 쓴 저서도 유익하고읽을 가치가 있으며 재미있을 수 있다. 그것이 그의 정신의 진수이며, 그의 모든 사고와 연구의 결과이자 결실이기 때문이다. 반면 그의 인간관계는 우리를 만족시킬 수 없다(극공감..해당인의 환경과 사주(팔자)와 더 연관된 문제). 그러므로 그 사람의 인간관계에는 만족하지 않더라도 그 사람의 저서는 읽을 수 있다. 따라서 정신적 교양이 높아지면 더 이상 사람이 아닌 거의 책에서만 점차 즐거움을 발견할 것이다.
그렇지만 정신을 위한 청량제로는 옛 고전을 읽는 것보다 나은 것이 없다. 고작 반 시간이라도 고전 작가의 작품을 읽으면 곧 생기가 나고 홀가분해지고 정화되고 고양되고 힘이 생기는 기분을 느낄 수 있다. 이것은 마치 바위틈에서 솟아나는 신선한 물(약수)을 마시고 기분이 상쾌해지는 것과 같다. 이것은 고전어와 그것의 완벽함 때문일까? 또는 몇천 년이 지나도 작품이 훼손되지 않고 약화되지 않는 정신의 위대성 때문일까?(몇천 년이나 지난 고전은...큰일이다 몇 개 집에 있는 것만도 너무나 재미가 없어서) 이 두가지가 함께 작용했을지도 모른다. 하지만 나는 언젠가 이 고전어 학습을 그만둘까 봐 벌써부터 우려된다. 그렇게 되면 일찍이 없었던 야만적이고 천박하며 보잘것없는 졸작으로 이루어진 새로운 저작물이 나올 것이다. 특히 고전어의 완벽성을 일부 지닌 독일어가 오늘날 '당대'의 보잘것없는 엉터리 작가에 의해 체계적으로 심하게 훼손되고 망가지고 점차 빈곤해지고 형편없어져 상스러운 은어로 변질되기 때문이다(생애 총 9가지 언어를 구사할 줄 알았던 쇼펜하우어가 보기에 지금은 어떨까? 언어적상놈들이 판치는 세상일까).
두 가지 역사, 즉 정치의 역사와 문학과 예술의 역사가 있다. 전자는 의지의 역사이고, 후자는 지성의 역사다. 정치사는 말할 수 없는 불안과 곤궁, 사기, 끔찍한 살인으로 가득 차 있다. 이에 반해 문예사는 잘못된 길을 헤매는 경우조차 고독한 지성처럼 어느 부분이나 즐겁고 명랑하다. 문예사의 주요 분야는 철학의 역사다. 사실 철학사는 다른 역사에까지 울려 퍼져, 거기서도 밑바탕에서 견해를 이끌어 가는 기본 저음이다. 다시 말해 철학사가 세계를 지배하는 것이다. 그 때문에 철학은 잘 이해하면 가장 강력한 현세적인 권력이기도 하지만 그 영향은 매우 서서히 나타난다.
학문, 문학, 예술의 시대정신이 대략 30년마다 파산 선고를 받는 것도 이러한 과정과 관계있다. 다시 말해 그 기간에 그 때마다의 오류가 차츰 늘어나 그 불합리의 무게를 견디지 못하고 무너지고 마는 것이다. 이와 동시에 이러한 오류에 반대하는 세력의 힘이 커진다. 그러므로 형세가 일변한다. 때로는 반대 방향에서 오류가 일어나기도 한다. 이러한 주기적인 회귀 고정을 보여 주면 문학사의 적절한 실용적 재료가 될지도 모른다(소재의 차용과 반복우려먹기..영화나 드라마에선 이미 자주 볼 수 있는 일이다). 하지만 문학사는 이것을 그다지 중요하게 생각하지 않는다. 게다가 그러한 주기가 비교적 짧기에 시대가 멀어질수록 그 같은 재료를 모으기가 쉽지 않을 때도 가끔 있다. 그 때문에 자신이 살아가는 시대에 그런 현상이 나타나는 것을 가장 쉽게 관찰할 수 있다.
문학사란 앞에서 묘사한 인류 진보의 과정에 부합하게 대부분 실패작들의 진열장에 든 목록이다. 이것들을 가장 오랫동안 보존하게 해 주는 에틸알코올 역할을 하는 것은 돼지가죽이다. 반면에 소수의 잘된 우량품은 거기서 찾을 필요가 없다. 다시 말해 그것은 살아 있는 것이다. 우리는 불사신처럼 영원히 싱싱한 청춘의 모습으로 유유히 활보하는 그런 우량품을 세계 어디서나 만날 수 있다. 그것들이 내가 앞 절節에서 든 참된 문학을 이룬다.
나의 소망은 언젠간 누군가가 비극의 문학사를 써 줬으면 하는 것이다. 그 속에 들어가야 할 내용은 자신의 나라가 배출한 모든 위대한 작가나 예술가를 대단히 자랑스럽게 여기는 여러 국민이 그들이 살아 있을 때 그들을 어떻게 대우했는가 하는 점이다. 다시 말해 모든 시대와 모든 나라의 좋은 것과 참된 것이 그 시대를 지배하는 불합리며 열악한 것과 맞서 견뎌 내야 했던 저 끝없는 싸움을 우리 눈앞에 제시해 달라는 것이다. 인류에게 참된 빛을 던져 준 거의 모든 사람과 각종 예술 분야의 거의 모든 위대한 거장이 겪었을 순교자의 고난을 묘사해야 한다. 그들은 소수를 제외하고는 세상의 인정과 관심을 받지 못하고 제자도 없이 가난과 비참함 속에서 고통스럽게 살아간 반면, 자신의 전문 분야에서 형편없는 자들은 명성과 명예, 부를 얻은 경위를 우리에게 보여 줘야 한다. 그러므로 에서의 이야기가 바로 그런 경우다. 에서가 어느 날 아버지를 위해 사냥을 나가 짐승을 잡는 사이 그의 옷을 입고 변장한 야곱이 집에서 아버지의 축복을 가로챈 것이다.
그렇지만 인류의 위대한 교육자들이 비록 비참하게 살았다 해도, 일에 대한 사랑으로 자신을 지탱해서, 마침내 그와 같은 고투苦鬪가 끝났을 때 불멸의 월계관이 그에게 손짓하고, 최후의 순간에 다음과 같은 노랫소리도 울렸으면 한다.
무거운 갑옷은 날개옷으로 바뀌고,
고통은 짧고, 즐거움은 영원하노라.
(실러, 『오를레앙의 처녀』제5막 14장)
덧:
이 포스팅은 <쇼펜하우어의 행복론과 인생론>中 '12장 독서와 책에 대하여'에 대한 부분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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