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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OOK] 풍부의 추월차선

카프카<변신> 이십년 벼르기만 하다 드디어.

by 돌냥 2023. 12. 1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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요 며칠간 책상 앞에 너무 오래 앉아 있었는지 경직성 척추 근육통이 온 상태에서 <변신>을 읽었다

내 육신이 멀쩡하지 않은 상태에서 해충이 되어 마음대로 되지 않는 주인공 '잠자'의 몸뚱아리를 상상하는 것은 평소보다 과도한 몰입을 하게 만들었다

특히 배를 위로 하여 뒤집어진 상태에서 여섯다리를 버둥거려도 옴쭉달싹하기 힘든 몸, 넓고 납작해서 방향전환이 힘든 몸을 상상할 때마다 나의 경직된 등은 어쩐지 더 큰 통증에 의해 짓눌리는 느낌이었다

 

이토록 서점과 도서관 여기저기 흔해빠질만큼 유명한 작품을 ‘누구나 흔히 그렇듯이’ 제목만을 아는 채로 실제 읽어본 적이 없었다

그리고 읽기로 한시점으로부터 근 이십여년이 지난 후 처음으로 읽었다

 

다른 버전을 읽고 나서야 알게 됐지만 '민음사' 번역은 굉장히 직관적이어서 내 핍절한 이해력과 상상력을 끌어올리기 위해서는 한 문장 속에서도 중간 중간 많은 분절점이 필요했다 반면 '현대문학'의 번역은 언어적으로 또 상상적으로 읽는 동안 멈출 곳 없이 매끄럽게 읽혀졌다(어쩌면 두 번째로 읽어서인지도)

굳이 비교하면 현대문학은 친절하고 읽히기도 쉽지만 개성이나 작품 전체에 젖어들어있는 기묘함은 왠지 좀 떨어진다

어쩌면 거칠고 불친절하지만 잠자의 의식의 흐름을 날 것 그대로 느끼게 해주는 민음사 번역이 카프카가 당초 썼던 어조나 의도에 가까운 것일지도 모르겠다

 

일단 번역과 상관 없이 '어느 날 아침 자고 일어나니 내 몸이 벌레가 되었다'는,  21세기 현재에서는 아무리 참신하게 만들어도 식상할 여지가 있는 소설 속 설정은, 1912년(탈고 연도 기준)당시 시대의 사회와 문화를 텍스트 사이로 추측해가며 읽으니 오히려 유례없이 신선하고 창의적인  이야기로 다가왔다

외적으로 보이는 분량은 짧지만 상상에 드는 노고(?)와 몰입 에너지를 생각하면 <변신>은 결코 짧지만은 않은 단편이다

저녁으로 배를 터질듯 먹어치운 온溫메밀이 소설 한 편을 읽는 동안 다 꺼진 걸 보면  읽는 동안 ‘잠자’의 벌레가 된 몸과 그의 변해버린 모든 세계에 일체화 되느라 나름 적잖은 신경이 소모된 게 분명하다

 

소설의 장면을 상상하면 상상할수록, 결말이 암시하는 바를 생각하면 생각할 수록, 백 여년이 지난 지금도 국적과 시대와 상관없이 조금도 변함이 없는 인간의 속성에 대해 정리하는 것으로 귀착된다

실제로 컨디션이 안좋았을 때 읽긴 했지만 육체적으로나 정신적으로나 읽을수록 내 어딘가도 ‘아파지는' 작품이었다(카프카가 실제 낮에 일하고 밤에는 글을 쓰는 고된 일상을 오랜 세월 살아냈고, 결핵과 신경쇠약 등 여러 병세 중에도 집필을 했던 '완전연소'적 삶을 살았던 것을 염두에 두어서인지 더욱)

 

망상적 설정이라고 하기엔 매우 구체적이고 현실적이기 때문에 작가가 이 설정에 대해 스스로 매우 진지하고 심도있게 생각해왔을 거란 예상을 할 수 있다

나만 느낀 것은 아니겠지만 이런 공상 판타지적 설정은 이후 여러 다른 장르의 영화들에 익숙하게 오마주되었음을 알아차릴 수 있었는데, 다만 그런 것을 모르는 상태로 소설을 읽기 전만 해도 매우 진지한 표정을 한 카프카의 초상이라거나 그냥 카프카-변신으로 묶인 이 한 덩어리 자체가 알 수 없는 위엄을 느끼게 했기 때문에(수박겉핥기도 안해본 사람들 특징)막상 뚜껑을 열자 여기 저기에서 뜻밖에 기습해온 희화적 장면과 입꼬리가 올라가게 만드는 블랙코미디 같은 연출에 이게 그 (말로만 듣던)<변신>맞는 거야? 읽으면서도 읽는 작품이 맞는건가 싶은 생각이 들기도 했다(오랫동안 제목만 알다가 내용을 알게 된 소설, 영화가 대개 다 그렇다.. 닝겐은 편견의 동물)

 

이야기의 대부분은 오로지 집과 방 안에서 이루어진다  벌레가 되어버린 잠자에겐 충분히 광대한 범위이지만 이 한정된 장소는 (잠자의 가족을 포함하여)인간 삶의 축소판으로서의 요소를 모두 갖추고 있다 

소설은 가상의 상황에 대하여 그럴 수도 있겠구나,보다는 이미 실제로 벌어진, 심지어 우리도 언젠가 겪은 바가 있는 경험에 대하여 쓴것처럼 매우 현실적이고 회고적이다 멀쩡했던 인간이, 하루 아침에 흉측한 여섯 다리 달린 벌레가 되었음에도, 뜬구름 따위는 전혀 느껴지지 않는다 벌레가 된 몸으로서의 세계관이 작위적이긴 커녕 예상 밖에 몹시 리얼리티한 것이다 (벌레에 대한 생습적 묘사 부분을 떠나서) 잠자가 처해버린 이 갑작스러운 변화는 어쩌면 작가가 처한 어떤 상황 또는 간접적인 경험으로부터의 경험적 승화가 아닐까 하는 생각도 하게 된다

 

‘나에게 무슨 일이 일어났단 말인가?’ 사람에게 큰 일이 벌어지면, 일단 부인(또는 회피)을 먼저 하게 된다 잠자는 얼토당토 않은 이 일을 다시 잠을 자서 잊어보려고 한다 오른쪽으로 누워 자는 습관 때문에 오른쪽으로 돌아눕기위해 ‘백번쯤은’ 시도해봤지만 벌렁 나둥그러질 뿐이다

 

재밌는 것은 그 과정에서 잠자가 백 번을 다시 뒤집어졌음에도 눈 앞의 상황을 직시하기 보다는 일반적이지 않은 반응을 먼저 보인다는 것이다 (보통은 정신이 붕괴되어 기절하거나 충격에 못이겨 베란다 밖으로 떨어질 수도 있다)

잠자는 자신이 왜 이렇게 고된 직업(외판원)을 택해서 날마다 출장을 다니는 고역스러움, 기차시간으로 인한 긴장, 불규칙적인 식사, 항상 바뀌어 지속되지도 진실되지도 않는 인간관계 등을 겪어야하는지 한탄하며, 악마라도 찾아와 이 모든 걸 쓸어가주길 푸념한다

잠자는 그 와중에 배가 가려워져 긁으려고 시도했으나 벌레가 된 다리가 배에 닿자 소름이 쭉 끼쳐 얼른 움츠리고 만다 그리고는 여전히 사태를 파악하기 보다는 ‘업무 스트레스’에 이어 ‘수면 부족과 탐욕스런 사장’ 에 대한 원망들을 늘어놓는다

잠자가 벌레가 된 후에 하는 생각이나 반응은 가만보면 벌레가 되기 이전과 조금도 달라지지 않았음을 볼 수 있다 심지어 그는 제3자 이상으로 멀리 떨어진 타인의 눈으로 자신에게 날벼락처럼 닥친 비극에 대해 아무런 감정이 없는 묘사를 한다

게다가 해충이 되어버린 잠자에게 지금 출근 따위가 문제가 아니라는 것은 누구나 알 수 있지만 그는 지금까지 해왔고 해야만 하는 것에 꽂혀 새벽 다섯시 기차를 타려면 서둘러 일어나 나가야 한다며 속절없는 안간힘을 쓴다..(평소 얼마나 기계적 삶에 시달렸으면 하면서도, 이런 관성의 법칙같은 평상심이 오히려 잠자가 당한 충격의 크기를 반증하는 것인지도 모른다 죽음에 대한 부인처럼 말이다)

 

 

어찌보면 벌레가 된 몸에 '아랑곳하지 않는' 잠자의 몸부림은, 어떻게 보면 우습지도 슬프지도 않은, 그냥 있는 그대로의 우리 모습이다

하루 아침에 달라진 것은 잠자의 몸뚱이 뿐 출근에 대한 변명을 시도하려는 잠자의 태도나, 방에서 나오지 않는 잠자를 걱정하긴 커녕 출근을 독촉하는 삭막한 가족들, 직원의 근태에 평소 쥐잡듯하는 탐욕적인 사장이 파견한 지배인 등 잠자의 주변 세계 또한 달라진 것이 전혀 없는그대로다

산업화 초기의 사회에서는 더 심각했을 생명 말살적 행태나 극단적 물질주의는 지금에도 여전히 유효하고도 익숙한 가치관과 현상들이다 당사자의 현실 상황이나 인격에 대해서 완전히 무신경한 채 한가지(돈)만을 요구하거나 결과 만능의 틀에 갇혀있는 것이다

나는 어렸을 때부터 그런 이들을 볼 때마다 인간으로서 '종합적으로 사고할 수 있는 뇌가 없는(뇌가 있지만 있다고 느껴지지 않는)', 마치 '바퀴벌레'같다는 생각을 종종 해왔다 오직 빛에만 반응하며 어둠 속으로 피하는 바퀴벌레의 단순무식함은 강한 혐오감을 일으킨다 

 

카프카는 잠자의 징그럽고도 절망적인 객관적 상태에 대하여 지속적으로 묘사하지만 아이러니하게도 한가지 외엔 알 수도, 알 필요도 없는 단편적인 해충 삶의 속성은 실제 벌레가 된 잠자가 아닌 주변 인물의 모습을 통해서 연상된다

잠자가 처한 상황을 불쌍히 여기거나 가족들의 무자비함에 대해 비판하는 것을 떠나서 소설의 마지막 결말은 이 작품이 픽션이라는 것을 감안할 때 가장 현실적으로 그려진 부분이다 자신 역시 그런 유사한 삶의 경험(벌레 이전 잠자의 직업적 고통과 벌레 이후 잠자가 겪게 되는 실존적 소외)을 했던 사람이 보게 된다면 더욱 씁쓸해질 만한 내용이다

 

모든 문학작품이 그렇지만 카프카의 변신은 특히 사람에 따라서 그리고 읽는 시기에 따라서 다르게 읽힐 여지가 있다

물질을 최우선 가치로 한 인간 소외와 합리성을 가장한 인간의 이기심. 이것이 카프카가 의도한 것이 아닐지라도 내 나름의 입장에서 충분히 공감하며 납득할 수 있었다 

읽는 내내 가상이라는 것이 분명함에도 자전적 이야기라는 확신이 강하게 들었던 '소설' <변신>.

시간이 지나 다시 읽게 되면 또 어떤 느낌을 안겨줄지 궁금해지는, 틈날 때마다 다시 읽고 싶어지는 작품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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