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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OOK] 풍부의 추월차선

[책]나는 왜 너를 용서하지못하는가<정의중독>/ 타인을 비난할 때 뇌는 도파민을 분비한다/ 내가 무조건 옳다는 비뚤어진 정의감

by 돌냥 2024. 1. 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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모든 형태의 중독은 악이다. 그것이 술이든, 모르핀이든, 이상주의든.
-칼 융 Carl Jung

 

 

 

 

생각이 많은 사람은 쓸모가 없다

과거 일본 기업에서는 대학에서 체육동아리를 했던 사람을 골라 채용하는 풍조가 있었다. 어쩌면 지금도 그럴지 모른다. 이는 ‘집단의 결정에 대한 충성도가 높음’을 중요 자질이자 필요 능력으로 보고, 그런 사람을 일을 잘한다고 판단했기 때문이다. 일본의 조직은 조직의 결정에 순순히 따르는 사람을 높이 평가해왔다.

장기적 전망을 예측하고 사고하는 기능은 전두전야의 배외측부가 담당하며, 상대의 반응을 상상하는 기능은 안와와 접한 전두전야 부분이, 자신의 행동의 선악을 판단하는 기능은 전두전야의 내측부가 담당한다. 즉, 일단 멈춰 서서 자신의 행동을 점검하고 스스로를 제어하는 일련의 과정을 모두 전두전야가 담당하는 것이다.

이를 바탕으로 조직 내 인간관계를 살펴보면, 전두전야가 발달된(뇌과학적으로 지능이 높은)사람은 ‘지시나 명령을 내려도 즉시 착수하지 않는다’ ‘학력에 비해 행동이 굼뜬다’ ‘이론만 내세운다’등의 평가를 받는 경우가 있다. 다시 말해, ‘머리만 좋고 쓸모가 없는 사람’ ‘골치 아픈 사람’이라 생각하는 것이다. 현장에서는 지시와 명령을 즉각 실행하는 사람이 부리기 쉽기 때문이다. 이 두 가지(지능파VS빠릿파)유형의 대립은 일본 사회에서 흔히 볼 수 있다.

 

 

인신공격과 토론의 결정적 차이

일본인의 토론은 대립하는 두 의견을 음미하고 검토하여 보다 좋은 결론을 이끌어내기보다는 대부분 인신공격으로 흘러간다. 토론이 아닌 설전은 마치 ‘네가 틀렸어’ ‘너보다 내가 더 잘났다’라는 것을 증명하기 위한 언어폭력이자 말로 하는 살인과 다를 바가 없다.

결국, 정의는 하나 뿐이라는 전제 때문에 토론으로 승화될 수가 없다. 정의의 대립을 권력투쟁이나 주도권 싸움에 이용해왔기 때문에 상대를 받아들이는 것은 곧 동료(자기 정당)에 대한 배신이라 여겼다. 게다가 토론보다 사전협의를 더 중요하게 여기므로 본질적 토론이 힘든지도 모른다. 그렇기 때문에 옳고 그름과는 별개로, 다른 나라에서 봤을 때 일본 사회는 사고방식이 특이한 나라에 속한다.

 

일본은 지금도 대표적인 저출산 고령화 국가이다. 만약 일본이 이러한 문제들을 향후 다른 나라들보다 먼저 직면하게 된다면, 과연 토론 능력을 갖추지 않고도 잘 대응할 수 있을지 걱정이다. 지금까지처럼 ‘해외의 것을 가지고 와서 일본에 맞춰 적응시키는’방법은 더 이상 불가능하기 때문이다. 아직 아무도 답을 찾지 못한 문제이기에 당사자가 머리를 짜내 해결할 수 밖에 없다.

이제 일본에도 무작정 남을 따라하지 않고 진정한 의미의 토론을 해야 하는 시대가 도래했다는 생각이 드는데, 일본이 역사의 시험대에 오를 때 과연 어떤 힘을 발휘할 수 있을 지 전 세계가 주목할 것이다.

 

 

집단을 지속시키는 것이 곧 정의다

뉴욕대 교수 조너선 하이트는 <바른 마음:나의 옳음과 그들의 옳음은 왜 다른가>에서 신기탐색 경향(리스크를 무릅쓰더라도 새로운 것에 도전하려는 성질)이 강하고 주로 선악이나 윤리관에 입각한 판단을 내리는 사람들의 집단을 ‘진보’라 한다. 반대로 신기탐색 경향이 약하고 낯선 것과 새로운 판단을 좋아하지 않으며 선악이나 윤리관보다는 익숙함을 선택하는 집단을 ‘보수’라 한다. 그리고 진보가 보수에게 이기기란 과학적으로 불가능하다는 점을 시사하고 있다.   

 

이런 경험을 한 적이 있다. 미국에서 국내선 비행기를 탔을 때 일이다. 앞좌석 아래 놓아둔 가방에서 필요한 물건을 꺼내려 손을 뻗었는데, 엘리트처럼 보이는 옆자리 백인 남자가 갑자기 자기 가방에 손을 뻗더니 나를 힐끔 보고는 자기 짐을 멀리 옮긴 것이다 ‘이 아시아인이 내 물건을 훔칠 수도 있다’고 생각한 모양이다.

인종과 피부색으로 차별하면 안된다 라든가 다양한 문화를 존중해야 한다는 주장이 정치적으로 옳은 것은 분명하지만, 자신의 안위와 재산을 보호하는 기능은 그보다 늘 우선되기 마련이다.

 

심리학에서는 이를 내집단 편향Ingroup bias이라 부른다. 자신이 속한 집단(내집단, 인그룹)에 대해서는 자신이 속하지 않은 집단(외집단, 아웃그룹)보다 호의적이고 협조적으로 행동하는 경향을 말한다.

제2차 세계대전 중 어떤 연합국 군인이 자신과 똑 같은 백인인 독일인을 죽일 때는 마음이 아팠지만 일본인을 죽일 때는 아무렇지 않았다고 한다. 낯선 그룹의 사람들이 모두 똑같아 보이는 것이 바로 외집단 동질성 편향Outgroup homogeneity bias이다. 낯선 사람들을 볼 때는 그 사람의 외적인 특징에 먼저 주목하기 때문에 인격이나 감정의 움직임을 주의 깊게 보지 못한다. 안타깝게도 같은 인간으로서 느끼는 공감도 생기기가 어렵다.

스스로 정신을 바짝 차리지 않으면, 인간은 누구나 친한 사람들에게는 너그럽고 그 외의 사람들에게는 엄격한 태도를 취하게 된다. 이것이 바로 자신이 속한 집단 내의 인물은 너그러이 평가하고 집단 밖의 인물은 엄격하게 평가하는 ‘내집단 편향’이다.

 

 

타인을 비난할 때 쾌감을 얻는 뇌

당신이 직접적으로 불이익을 받지도 않았고 당사자와 관계도 없는데 강한 분노와 미움의 감정이 생긴다면, 일면식도 없는 상대에게 공격적인 말을 퍼붓고 완전히 짓밟아야 직성이 풀린다면, ‘용서할 수 없는’ 감정이 폭주한 상태다.

인간은 누구나 이러한 상태에 빠질 수 있다. 인간의 뇌는 범법자나 배신자 등 누가 봐도 비난받아 마땅한 대상을 찾아 벌하는 데 쾌감을 느끼도록 만들어져 있다.

 

타인에게 ‘정의의 철퇴’를 가하면 뇌의 쾌락중추가 자극을 받아 쾌락물질인 도파민이 분비된다. 이 쾌락에 한번 빠지면 쉽게 헤어나지 못하며, 항상 벌할 대상을 찾아 헤매고 타인을 절대 용서하려 하지 않는다. 나는 이런 상태를 정의에 취해 버린 중독 상태, ‘정의 중독’이라 부른다. 인지구조가 의존증과 거의 비슷하기 때문이다.

누가 옳고 그른가를 떠나 양측 모두 자신이 정의라고 확신하는 공격들은 해결점을 찾기가 매우 힘들다. ‘어쩌면 처음부터 해결할 마음이 없었던 것은 아닐까? 하는 생각마저 든다. 어려운 상황을 극복해 새로운 답을 찾으려 하기 보다는, 스스로 정의에 취해 상대를 일방적으로 깎아내리는데 만족감을 느끼는 것이다.

 

 

양날의 검 SNS와 마녀사냥 정의중독

SNS가 ‘용서하지 못하는’인간의 감정을 가시화한 것이 분명하다는 생각이 든다. 누군가를 용서하지 않는 대신 자신을 긍정하고 자신이 옳다는 것을 인정받으려는 욕구, 이것의 또 다른 표현으로도 보인다. 나와 상반된 의견을 가진 대상을 어떻게든 찾아 싸움을 걸면 그만큼 자신이 ‘올바르게 살아가는 정의의 수호자’처럼 느껴지는 것이다. 정의 중독에 빠진 이들에게 SNS는 손쉽고 매력적인 도구다.

 

최신 뉴스나 화제에 대해 언급하거나 지극히 일상적인 일을 SNS에 올렸다가 몰상식하다, 의외로 무식하다, 무례하다, 사람을 무시한다 등 비난을 받을 때도 있다. 심지어 고급 식당에서 밥을 먹더라, 명품을 샀더라 등 댓글을 보고 돈 자랑 한다며 질투 섞인 비난을 퍼붓는 사람도 생겨난다. 신문 잡지 같은 일방향 미디어만 존재하던 과거에 유명인이나 전문가는 자신의 세계 안에서만 노출되었고 그만큼 일반 대중에게 공격받을 기회나 위험성이 한정적이었다. 하지만 이제는 타분야에 대한 의견을 피력해야 하는 상황이 늘어났고 사생활도 예상치 못한 방식으로 전달되며 정의 중독에 빠진 일반인들에게 ‘책잡힐 거리’를 던져주는 결과로 이어졌다.

 

 

자신과 다르면 비웃고 매도하는 불모의 사회

정의 중독자가 SNS에서 빈번하게 사용하는 단어가 ‘멍청하다(우리나라식으로는 ‘개념없다’)’는 표현이다. 자신이 옳다는 과도한 믿음에서 자신과 다른 생각을 가진 사람을 멍청하다고 단정짓고 공격하는 것이다. 재해 등 좋지 않은 일이 생겼을 때 올라오는 무개념 발언들, 연예인의 불륜을 욕하는 비난 댓글도 이러한 견지에서 보면 정의 중독자들의 폭주라 볼 수 있다.

인터넷 등장과 SNS의 보급으로 우리는 예전보다 훨씬 정의 중독에 빠지기 쉬운 환경에 놓였다. 또 증독 증상이 전 세계에 공개되는 장이 등장하면서, 누가 멍청한 짓을 저질렀고 누가 나보다 못난지를 항상 신경써야 하는 상황이 되었다. 두려운 나머지 자신이 표적이 되지 않도록 타인을 비난하는 행위에 가담하는(혹은 모른척 하고 도와주지 않는)현상이 나타나게 된 것이다. 이는 왕따가 될까 두려워 가해자 편에 서는 모습과 매우 흡사하다.

 

일본에서는 남들 시선을 생각하지 않고 집단의 다양한 부조리와 문제점을 지적하는 사람이 눈총을 받는 경향이 있다. 그것이 불합리하다고 항의하며 목소리를 높이면 집단에게 심한 압력을 받다 결국 배제되고 만다.

현대 일본과 같이 안정된 사회에서 우수하다고 평가받는 사람은 ‘생각없이 사는 사람’일지도 모르겠다. 집단이 정한 규칙을 지키고, 전례를 답습하며, 집단 내에서 우위에 서 있는 사람들의 생각이나 명령을 충실하게 따르는 순종적인 사람이 선택되는 경향이 있음을 부정하기 어렵다.

 

 

 

정의중독에서 벗어나는 아주 작은 뇌습관

만약 당신이 옛날엔 참 좋았지,라는 생각에 자주 잠긴다면 주의해야 한다. 과거를 추억하며 그리워하는 것은 뇌의 전두전야가 노화하고 있다는 신호이자, 정의 중독과 다를 바가 없기 때문이다.

인간의 뇌는 과거 기억을 멋대로 재구성한다. 괴로웠던 경험이나 일상적 요소는 싹 지우고 좋은 것만 골라 마음대로 조합하는 것이다.

 

머릿 속에 떠오르는 기억은 상당히 미화되었을 가능성이 있으므로 유의할 필요가 있다. 인간이 종종 이런 생각에 빠지는 이유는 뇌가 늙었기 때문이다. 노화로 인해 전두전야의 기능이 약해지면 아무래도 새로운 것을 받아들이기가 힘들어진다.

자기가 잘못해서 헤어졌으면서 기억 속에서는 사이 좋고 달콤했던 시간만 남아있는 경우도 많다. 자기가 한 짓은 잊어버려도 당한 일은 잊지 않는 것도 흔한 일이다. 그러니 주의할 필요가 있다.

 

만약 상대를 가르쳐 주려던 의도였더라도 ‘난 옳고 넌 틀렸어’라는 사고 회로에 갇히면 그것이 바로 정의 중독 상태이며, 상대방 입장에서 봤을 때 갑질 그 이상도 이하도 아니다.

인간인 이상 언행에 모순이 있는 것은 당연하며 과거에 한 발언과 행동은 얼마든지 번복할 수 있다. 지금 이 순간에는 절대적인 진실처럼 보이는 것도 시간이 지나면 잘못됐음을 깨달을 날이 올지 모른다. 지금은 그 누구보다 가장 잘 맞는 친구지만, 한 달 뒤에는 더 잘 맞는 친구가 생겨 멀어질지도 모르는 일이다. 믿는 도끼에 발등 찍히는 느낌 때문에 다툼이 벌어지기도 하는데, 이를 피할 수 있는 가장 좋은 방법은 (사람을 아예 안만나는 것이다)처음부터 타인에게 ‘일관성’을 요구하지 않는 것이다.

 

늙지 않는 뇌를 만드는 생활습관

항상 자신을 객관적으로 보는 습관을 들여 메타인지를 활성화하는 것이 곧 전두전야를 단련하는 방법이다. 그러려면 늘 빡빡한 일정을 소화하며 바쁘게 살기보다 자신을 돌아볼 여유를 갖는 것이 중요하다.

1.     익숙한 것 버리고 새로운 경험하기 -평소와 다른 경로 걷기, 단골 메뉴나 가게 바꾸기 등

2.     불안정한 하고 가혹한(?) 환경 들어가기 -공동체 행사, 수련, 마인드풀니스

3.     절대 읽지 않을 책, 관심없는 책 고르기

4.     일부러 관심없는 키워드 검색하기 (그래서 알고리즘 깨뜨리기 그러나 이것도 계속 연관 뜸..)

5.     낙인 찍기 방식의 한꺼번에 정보처리 하지 말기 -안이한 도피(뇌의 취약성)하지 말기

6.     뇌에 여유주기 -출퇴근시간 단축

7.     식습관과 수면습관 -오메가3먹기, 틈날때마다 자투리 잠자기

8.     메타인지 능력이 뛰어난 사람 만나기 -인생에 좋은 영향을 주는 인간

9.     자신에게도 타인에게도 ‘일관성 요구하지 않기’

10.   대립이 아니라 ‘병렬’적으로 생각하기 -정답 없음을 받아들이고 가능한 많은 것을 포용하기

 

 

책을 다 읽어가는 후반 문득 깨닫는다. 공립 도서관에서 빌린 책에 이런 형광색 줄이 수십개 좍좍 그어져있다는 사실을. 당사자는 어떤 식으로든 정의중독(저자에 의하면 '비뚤어진 정의감')에 걸려있을 확률이 높아보인다. 줄친 내용들과는 명백히 상반되는 행동의 결과에 실소를 금치 못했다. 이렇게 버젓이 남의 재산을 훼손하는 중에도 '나만 깨달을 수 없다' '너네도 깨달아라!' 하는 공명심으로 이런 짓을 자행한 것일까?

 

 

 

책은 2020년 일본에서 출간되었다. 코로나 및 제반 사회 변화가 지금처럼 진행되기 전의 일이다.

일본이라는 다른 나라 환경, 바쁘다 바빠 현대사회에서 책이 나오고 다소 시간이 흐른 점 등을 고려해 읽었다.

그럼에도 구체적인 상황을 제하더라도 큰 맥락에서는 공감을 많이 느끼게 된 책이다. 

 

읽으면서 느낀 것은 저자가 강조한 SNS, 정치집단이라는 공간과 대상이 아니더라도 이 시대에 우리 개개인은 정의 중독에 걸릴 가능성이 충분하다는 생각을 하게 되었다. 마치 일대 만인의 투쟁처럼 말이다. 나 외에는 거의 모든 인간이 또라이고 실제로도 그렇다는 경험을 자주 하게 되는 것이다. (심지어 매일 타는 지하철에서도.. 나만 그런가? 남들에게 '아무렇지 않게' 피해를 주고 여전히 '아무렇지 않게' 살아가는 그들에 대한 분노가 잠깐이라도 들끓는 것, 그것을 단순히 정의중독(분노장애)이라고 할 수 있는가?)

더는 익명의 욕설을 남발하는 온라인상이 아니라 할지라도 각자의 개인은 일상 삶에서도 ‘확증 편향(예: MZ 또는 젊꼰/늙꼰에 대한 어떤 상)’을 흔하게 경험하며 살아간다. 

 

책을 통해 한 가지 유념하게 된 것은 저자가 후반에 말하듯 다양성에 대한 용인성, 외집단에 대해 배려하고 존중하고 서로 인정하라는 다소 현실적이지 못하고 근본적 깊이는 덜한 대안보다는, '나이를 먹으면 뇌가 보수화 된다는 것'이었다.

정치 사상적인 보수의 의미가 아니라 자신이 본래 가진 사상의 경향이 좀 더 둔화되고, 그 밖의 의견은 자동적으로 ‘기각’되는 확증 편향이 작동해 사고가 더욱 경직된다는 것이다(꼰대화라고 해야하나). 노화가 진행되면서 자신이 속한 집단의 논리 밖에 수용하지 못하게 된다는 것인데 내 입장에서는 이것이 단순히 다름, 다양함에 대한 배타성보다도 훨씬 더 우려되는 현상이었다.(노화를 동반한 상태에서의 배타성은 상대에게 훨씬 더 큰 반감을 일으킬 수 있으므로)

 

여튼 책을 읽는 동안 ‘특정 대상에 대한 중독적 정의와 중독적 분노’에 대하여 많이 생각하게 되었다. 지금도, 또 늙어서도 미움의 고통에서 벗어나 평온한 마음을 살고 싶은 사람들이라면 한번쯤 스스로 생각해볼 기회를 주는 책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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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의 중독 - 인간이 타인을 용서하지 못하는 이유> 


지은이 나카노 노부코
옮긴이 김현정
펴낸곳 시크릿하우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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