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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OOK] 풍부의 추월차선

[책]순수지성세계로의 초대<굿윌_임마누엘 칸트>우리 스스로 행동할 때 목적의 왕국의 시민이 된다

by 돌냥 2024. 1. 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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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중번역으로 되어있음에도 정말 어려웠던 책이다

어투가 쉬워져도 내용 자체가 진입 장벽이 너무 높다

예전에 교과서만 파도 시험이 잘 나온다고 해서 사회 교과서를 디립다 팠지만

그 때마다 넘을 수 없는 사점을 느꼈던 것 처럼 비슷한 느낌이다

(책 첫장 추천사에 '똑똑한 중학생 정도면 읽을 수 있다'고 되어있는데

그래 읽을 수 있는 것과 온전한 이해하기는 다른 의미이다..(일단 내 머리가 현재 똑똑한 중학생이 아님))

글자를 읽는 순간은 이해하고 있는 것 같으나 문장을 끝내면 그래서

이 글자의 조합들에서 무슨 뜻을 파악해야 하는지 자체를 모른다

아카넷이 펴낸<순수이성비판>,

학술번역인 백종현 교수의 <윤리형이상학의 정초>를

읽으면 대중번역과 학술번역을 비교하는 즐거움을 체험할 수 있다는데

대중서가 나에겐 이미 대중서로 소화되지 않는 안타까움이 있었다

여전히 내가 지성세계 보다는 이성을 낯설어하는 감각세계에 속해있다는 것을 발견.. 

칸트를 정언명령 키워드와 함께 그냥 통암기 했었던(이게 끝이고 무슨 의미인지도 모름)

학청시절과 달라진 점이 있다면 그래도 두번, 세번 읽으니 이 사람이 무슨 말을 하는지

알 것도 같고, 의외로 이런 '경험을 분리해놓는' 순수철학 분야에서 내 일상의 잔경험과

그 가운데 느낀 생활철학적 사유들이 연상이 된다는 것이다

늘 존경과 감탄으로 칸트의 마음 새롭게 채워주는  두 가지가

하나는 밤하늘의 별들, 다른 하나는 자기 안의 도덕법률이라 했는데

외부의 종교도 사상도 아닌 자기 안의 법률을 가지고 산 사람의 말이 

어느 때보다 궁금해졌다

그래서 이 책으로 칸트를 포기하게 되는 것이 아니라 

'시작' 해보기로 마음 먹었다

 

 

 

내가 지성 세계의 시민이라면 나의 모든 행위는 언제나 의지의 자율성과 일치하겠지요.
그러나 나는 동시에 감각 세계의 시민이기 때문에, 나의 모든 행위는 자연의 타율성을 따릅니다.
그리고 이 무조건적인 <해야만 한다>는 종합 선천성 명제를 나타내 줍니다. 
그가 자신을 지성 세계의 시민으로 여긴다면 도덕적으로 <해야만 한다>는 당연히 <할 것이다>가 됩니다. 마찬가지로 그가 자신을 감각 세계의 시민으로 여기는 한, 그에게 <해야만 한다>로 표현되는 것입니다. 

 

 

-스스로 독창적인 사상가라고 자칭하면서 이성적인 부분만 다루는 사람을 하찮은 철학자라고

이름 붙이는 사람들이라면 어떨까요? 그런 사람들에게는 아주 다른 일을 하는 두 사람을 함께

작업시키지 말라고 말하고 싶습니다. 그러는 편이 학술 산업 전체에 더 이롭지 않을까요?

두 사람의 일이 각각 특별한 재능을 요구하는 것이라면 그중 한 사람의 일로 두 사람을 합치는 것은

서로를 보잘것없게 만들 뿐이니까요.

그러나 여기서는 단지 이렇게 묻겠습니다. 우리가 이성적인 부분에서 경험적인 부분을 항상

조심스럽게 분리하고, 자연 형이상학을 자연학(혹은 경험 자연학)앞에 위치시키며, 

또한 도덕 형이상학을 실천 인간학 앞에 놓기를 요구하는 것이 학문의 본성 아니겠습니까?

이런 일은 경험적인 것을 조심스럽게 제거해야만 하는 일이기도 합니다.

그렇게 '경험을 빼냄으로써' 순수이성이 얼마나 많은 일을 할 수 있는지를 알 수 있습니다.

또한 순수이성이 어떤 원천들로부터 선천적인 가르침을 만들어 내는지도 알게 됩니다.

'모든 도덕교사(이런 명칭의 사람들이 한 군단은 됩니다)'에 의해 행해지든,

또는 '도덕 형이상학의 요청을 느끼는 몇몇 사람들'에 의해 행해지든 말입니다.

->칸트는 학문의 체계를 매우 중요하게 생각한다. 산업이 분업을 통해 발전한 것처럼, 학문도

명확한 분류에 따른 분업이 필요하다. 특히 도덕철학에서는 '경험'과 '이성'을 분리하는 작업이

필요하다고 봤다. 이 분리 작업이 이 책 전체를 관통한다. 이를 대표적으로 나타내는 단어가

'아프리오리(a priori)' 즉 경험에 앞선 선천성이다. 

칸트의 기본적인 생각은 매우 간단하다. 어떤 계율이 도덕법칙, 즉  law가 되려면 모든 이에게

적용되어야 하는데, 그 계율이 경험의 영향을 받는다면 모든 이에게 적용될 수 없다는 생각이다.

 

-선한 의지는 그것이 실현하거나 성취한 결과 때문에 선한 것이 아니며,

어떤 목적을 달성하기 쉽게 해주기 때문에 선한 것도 아닙니다.

그저 바라는 마음 덕분에 선합니다. 다시 말해서 선한 의지는 그 자체로 선합니다.

그것은 어떤 개인적인 성향을 통해, 심지어 그런 성향의 전체를 통해 얻을 수 있는 

모든 결과보다 훨씬 더 큰 존경을 받을 만합니다. 

사실 잘 연마한 이성이 인생과 행복을 누리는 목적에 매이면 매일수록, 우리 인간은

진정한 만족에서 더 멀어집니다. 이런 일은 자주 발생하고, 실제로 이성을 잘 연마한

사람들에게서 일어나지요. 그들이 솔직히 고백한다면 어느 정도의 이론혐오증, 즉

이성에 대한 혐오를 지니게 됩니다. 왜냐하면 이성으로 만들어낸 모든 이익을 따져 봐도,

결국은 이성을 통해 행복을 얻기보다는 더 많은 고통을 짊어지기만 한다는 것을 알게 되기

때문입니다. 종국에 그들은 그저 본능의 인도에 익숙하게 따르면서 이성에는 더 많은 

영향을 허락하지 않는 평범한 계층의 사람들을 경멸하기보다는 부러워 할 것입니다.

그들의 판단에는 우리 존재가 훨씬 고결한 다른 목적을 지닌다는 생각이 뿌리내려 있습니다. 

이성은 행복이 아니라 다른 의도에 맞춰줘 있으며, 그런 다른 의도를 최고의 조건으로 

여겨야 한다는 생각입니다. 인간의 사사로운 목적은 이 최고의 조건 뒤에 있어야 합니다. 

의지의 온갖 욕구를 충족시키고자 한다면, 이성은 의지의 확실한 인도자로서 유능하지 

않습니다. 그런 것은 뿌리내린 본능에게 훨씬 더 확실하게 맞춰진 목적입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이성은 실천적인 능력으로서, 다시 말해 의지에 영향을 미치는 능력으로 

우리에게 주어집니다. 

자연은 모든 곳에서 자연 자신의 능력을 배분할 때 목적을 가지고 행합니다.

그런데 의지는 그 자체로 선하며 다른 목적을 위한 수단이 아닙니다. 의지는 유일한 선함이 

아니어도, 선함의 전부가 아니어도 좋습니다만, 최고의 선함이자 나머지 모든 선함의 조건이며

그리고 행복을 열망하는 조건이어야 합니다. 그래서 이성이 절대적으로 필요했던 것입니다.

일차적이며 무조건적인 목적에 필수적인 이런 이성을 잘 수양하는 것이 행복 달성에 여러모로

방해가 될 지 모르겠습니다. 적어도 인생에서는 그러하지요. 행복이란 항상 조건적이며 이차적인

의미를 지니기 때문입니다. 그렇지만 이성이 행복에 방해가 되는 것이 자연의 지혜와 모순되지는

않습니다. 이성이 심지어 행복을 무가치하게 만들지도 모릅니다만, 그것이 자연의 섭리를 벗어난

것도 아닙니다.

왜냐하면 선한 의지를 확립하는 것이야말로 이성 자신의 최고 실천적인 사명이기 때문입니다.  

 

-생각하는 모든 이성적인 존재 한 사람 한 사람의 의지라는 개념은 그 개념에 의존하는 또 다른 

개념을 낳습니다. 바로 목적의 왕국입니다. 공통된 법률에 의한 이성적인 존재의 체계적인 결합이며

이 법률들은 서로가 목적이자 수단인 이성적인 존재들의 관계를 목표로 합니다.

이성적인 존재  그 자신이 보편적인 법률의 적용을 받는 사람이라면 이 왕국의 시민member입니다.

자기 안에서 보편적인 법률을 만드는 사람일지라도 그러합니다.

반면 보편적인 법률을 만드는 사람이면서 다른 사람들의 의지로부터 자유로운 사람이라면 이 왕국의

통치자sovereign입니다.

목적의 왕국에서는 시민이건 통치자건 의지의 자유가 있으므로 이성적인 존재는 언제나 스스로를

입법자로 여겨야 합니다. 통치자가 되려면 온전히 독립적인 존재여야 하며 욕망이 아닌 자기 의지에 따라

자유로운 힘을 지닌 존재여야 합니다. 그저 개인적인 규범만을 따르는 의지로는 통치자의 지위를 얻지

못합니다.

목적의 왕국에서는 모든 것이 가격을 지니거나 또는 존엄을 지닙니다. 가격을 지닌 것은 무엇이든지

동등한 가치를 지닌 다른 것으로 대체될 수 있지요. 반면 가격을 초월한 모든 것은 그것이 무엇이든지

등가물을 허용하지 않고 존엄을 지닙니다.

인류의 일반적인 성향과 욕구에 관한 것은 무엇이든지 시장 가격을 지닙니다. 욕구와는 상관없이 취향에나

따르는 것은 기호 가격을 지닙니다. 그것은 우리 인간이 지니는 능력 중에서 그저 별 목적이 없는 유희를

만족시키는 것입니다. 그런데 어떤 것이 그 자체로 홀로 목적이 될 수 있다는 조건을 이룬다면 그저

상대적인 값어치, 즉 가격을 지니는 게 아닙니다. 고유한 가치, 즉 존엄을 지닙니다.

도덕은 존재가 그 자체로 목적이 될 수 있도록 하는 조건입니다. 도덕만이 목적의 왕국에서 이성적인 존재가

법률을 제정하는 입법위원legislating member이 되게 합니다.  

 

-나는 이제 확실히 말합니다. 의지를 지닌 모든 이성적인 존재에게는 자유라는 관념이 있으며, 온전히 자유라는

관념 아래에서 행동합니다. 자유로운 존재여야 실천적인 이성, 즉 대상에 관해 원인이 되는 이성을 우리가

생각할 수 있기 때문입니다. 어떤 판결을 내릴 때 다른 무엇에 의해 의식적으로 조종을 당하는 이성은

상상할 수 없습니다.

그것은 판단 결정권을 이성이 아니라 충동에 맡긴 것이기 때문입니다. 행위 주체는 스스로 원리들을 써 내려가는

입안자이며, 외부 영향과는 독립적입니다. 결과적으로 행위의 주체는 실천이성으로서 혹은 이성 존재의 의지로서 

스스로를 자유로운 존재로 여겨야 합니다. 다시 말해 이성적인 존재의 의지는 자유라는 관념 바깥에서는 자기 자신의

의지가 될 수 없습니다. 그러므로 행위에 대한 자유라는 관념은 이성을 지닌 모든 존재에게 적용되어야 합니다. 

 

 

이것만은 분명합니다. 도덕법률이 우리의 관심을 끌기 때문에 우리에게 타당한 것이 아니라(그건 타율적인 것이지요), 도덕법률이 우리 인간에게 타당하기 때문에 우리의 관심을 끈다는 점입니다. 
도덕이란 지적인 존재인 우리 의지 안, 즉 올바른 자아 안에 근원을 둔다는 점을 생각해서도 그러합니다.

단지 현상에 속하는 것은 이성에 의해 필연적으로 사물 그 자체의 본성에 종속됩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정언명령을 가능하게 하는 유일한 전제, 즉 자유라는 이념을 제시할 수 있습니다.
이 전제는 이성을 실천적으로 사용하는 것, 즉 정언명령의 타당성을 확신하기에 충분합니다.
그러므로 도덕법률의 타당성을 확신하기에도 충분하지요. 그렇지만 이 전제 자체가 어떻게 
가능한지 인간 이성으로서는 결코 알아낼 수 없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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