6.25나 월남전에서 나보다 더 많은 사람을 죽인 놈들도 있을 것이다.
그놈들이 다 밤잠을 설치고 있을까? 아닐 거다. 죄책감은 본질적으로 약한 감정이다.
공포나 분노, 질투 같은 게 강한 감정이다. 공포와 분노 속에서는 잠이 안 온다.
죄책감 때문에 잠 못 이루는 인물이 나오는 영화나 드라마를 보면 나는 웃는다.
인생도 모르는 작자들이 어디서 약을 팔고 있나.
최근 본 <서울의 봄> 때문인지, 나는 이부분에서 자연스럽게 전두환(내가 생존했던 년도 안에서는 가장 많은 사람을 죽인 권력자)을 떠올렸다.
작가는 특정인물은 아닐지라도 인간이 지니고 있는 자신의 행동에 대한 합리화 내지는 '무죄책감'이란 특성을 아울러서 김병수란 연쇄살인범으로 대체 창조한 것이 아닐까 마음대로 짐작해보았다
2020 독일 추리문학상 국제부문 수상
2020 독일 독립출판사 문학상 수상
2020 독일 최고 추리소설 선정
2018 일본 번역대상 수상
나는 소설은 거의 읽지 않는다. 내가 소설을 읽는다면 거의 검증된 오래 전 작가의 것(고전 등) 아니면 베스트셀러인 경우가 있지만 후자 또한 그리 많은 편은 아니다. 상도 타고 해외에서도 팔리는 문학적 가치가 있는 소설이라도 해도 베스트셀러에 있을 동안은 어쩐지 흥미를 잃는다.
모순되면서도 웃기는 것은 그것이 비소설의 경우에는 얼마든지 사기도, 빌리기도 하지만 유독 소설이 ‘잘 나가는 최신작’일 때 만큼은 본능적으로 외면을 하게 되는 것이다. 읽어보지도 않는 채 한철 지나가는 유행처럼 취급하는 경솔과 교만이 작동했기 때문임을 부인할 수 없다.
그런 이유로 출간되고 십 여년이 흐른 후에야 (드디어) 최근의 베스트셀러가 아니게 된 이 소설을 읽었다는 것은 아니다.
생각보다 단순한 이유였다. 책이 생각보다 얇고, 가벼웠기 때문이다.
내가 읽은 것은 2020년 ’복복서가’에서 펴낸 판이다. 2013년<살인자의 기억법>이 (초판 문학동네)출간 후 인기를 끌던 무렵엔 돈 번다고 한창 책을 멀리하던 시절이었기 때문에(소설 부문은 더욱),책을 직접 펴 본 건 이번이 처음인 셈이다. 예상과 달리 살인 기록의 컴팩트함(?)에 살짝 놀랐다.
보통 나는 소설을 읽을 때 한번에 정주행을 못하는 관계로 한 5분쯤 읽고 다른 책을 돌려볼 참이었다. 그런데 책이 참 친절하고, 영리했다. (책 말미에 나오는 작가님의 말을 읽으면-치매 환자에 빙의되어 그야말로 한땀 한땀 써내리셨다- 이런 말이 참 경솔하지만,) 어쨌든 소설만큼은 쭉쭉 읽어 나가지를 못하는 나 같은 사람입장에서는 ‘시처럼 짧고 담백한’ 1페이지 내외 하루치 일기들을 한데 모아놓은 듯한 소설의 형식이 독서 체류시간을 늘려준 셈이다(참고로 이 소설도 일종의 추리소설이다)
싸이코패스에게 기대되는 무정함과 무감각함(시대가 시대인지라 지금 읽으니 범인의 정서가 따듯(?)한 것 같기도…), 잔혹함등의 비윤리성은 소설의 묘사나 내용에서 크게 느껴지지는 않는다. 참 대단한 것은 소설보다는 짧은 하루하루의 일기에 가까운 글들이 연결되면서 계속해서 페이지를 넘기게 하는 엄청난 몰입감이 된다는 것이다. 처음에는 이런 사람이 나중에 어떻게 정신을 잃는다는 거야? 싶으면도 어느 샌가 나 역시도 점차로 끊어지는 기억의 파편, 판단의 이상 증세를 겪으면서 1인칭 주인공과 함께 치매 속 혼돈의 결말로 향해가게 된다.
소설은 등장인물들 모두가 동일한 사실로 인지하는 ‘실제 사건의 전개’가 아닌 ‘단 한사람의 진술(자전적인)’에만 의존하여 전개되기 때문에, 보통은 유일한 1인칭 화자를 믿고 읽게 되어있는 독자의 입장에서는 막판에 다가갈수록 다소 헷갈릴 수밖에 없다. 이해력도 부족하지만 라포형성도 불필요하다 싶을만큼 과하게 형성되는 내 경우에는 결말 가까이 이르러서도 연쇄살인범인 화자를 소설의 반전적 구성으로 인해 불가피하게 만들어진 피해자라고까지 생각했다(의도적으로 명확화 되지 않은 결말이니 감상자에 따라 다르겠지만).
반전을 얘기하자면, 이 소설은 결말을 생각하는 사람에 따라서 과연 몇 가지 반전을 내포한 것일까? 나처럼 단순하게 범인이 죽 하는 말만 믿고 따라가면서 ‘은희는 딸, 박주태는 딸을 노리는 살인범, 주인공 자신은 과거 무수한 살인경력이 있고 교통사고 후 살인의욕을 상실한 연쇄살인범’으로 여기는 것이 가장 일차원적 단계다. 그리고 ‘은희는 딸, 박주태는 은희를 죽인 살인자이자 경찰, 주인공 본인은 전과 동일’, 또 최후 경찰측 판결대로 ‘은희는 딸도 혈육도 아니고 갑자기 살해당한 요양보호사/ 박주태는 그냥 오리지널 경찰/ 주인공 본인은 전과 동일하되 은희라는 같은 이름을 가진 아이(과거)와 여자(현재)를 죽인, 치매에 걸린 독거 연쇄살인범’…
단순히 미친 사람의 헛소리라기엔 화자의 진술(일기)이 현실적으로 일관성도 있고 밀도감이 있어서 낚였다, 속았다고 하기에도 애매하다. 풀리지 않은 미스테리도 남아있다. 은희 살인건 외에, 소설이 시작되는 시점에서 연달아 발생했다는 가장 근래의 연쇄 살인도 결국은 70이 된 주인공 김병수가 최근에 저지른 것인지, 아니면 오래전 살인들에 대한 선명한 기억의 번복인 것인지(소설에도 언급되는 것처럼)는 다시 한번 읽어봐야 알 것 같다.
뒷통수를 치는 반전감보다는 자꾸만 마음 한켠에 김병수(주인공)이 어쩌면 정말 여러 정황과 변수를 조합해봄에 따라 (이번만큼은) 누명을 쓴 피해자일지도 모른다는 찝찝함이 남고, 바로 그런 면에서 이 소설이 무섭(?)다. 살인자의 기억법을 따라가다가 어느 샌가 살인자를 옹호하게 되는 그런 심리가 말이다. 나만 그런건지 모르지만 알츠하이머, 그리고 노인의 삶의 생태와 면면들이 요 몇년 사이 남일 같지 않게 된 영향도 있는 듯하다. 또 김병수 생각의 일정 부분 이상은 살인만 떼놓고 보면 평범한(세상 풍파에 정상적인 염세관이 생긴)사람이라면 어느 정도 공감을 하게 되는 지점들도 많다.
여튼 어렵고 음침할 것이라는 예상과 달리 소설은 '매우 재밌다'. 살짝 라이트한 스릴러 영화(최근 본 영화 ‘잠’정도의)한 편을 본 것 같은 기분이다. 실제 영화화는 다소 실망스럽다는 평이 있던데 어쩌면 당연한 것일지도 모른다. 글과 상상력으로써만 증폭될 수 있는 미스테리함으로 영상으로 표현하는 것이 쉬운 일은 아닐테니까.
소설을 읽다가 궁금해진 나는 알츠하이머가 과거에 대한 것들을 새로운 구조와 내용으로 완전히 다르게 기억할 수 있는지(단순히 기억을 잊는 것 외에 과거와 현재에 대한 다른 개연성(스토리)를 갖게 할 수 있는지를) 아주 살짝 알아보았다.
알려진 대로 알츠하이머는 기억력 저하, 헷갈림(딸에게 남편이라 부르는 등), 생각하는 능력의 감소 등 다양한 증상을 일으키는 뇌의 질환이다. 알츠하이머에 걸렸을 때 과거의 기억을 완전히 다른 구조와 내용으로 재구성할 수 있다는 것(김병수처럼 어떤 스토리를 가진 역사성이 있는 기억으로서)은 과학적으로 확증되지는 않았다고 한다. 다만 알츠하이머 환자들은 종종 과거의 사건을 ‘잘못 기억’하거나, ‘혼란스럽게 기억하는 경우’가 있다. 이는 뇌에서 정보를 처리하고 저장하는 방식이 변경되기 때문이다. 일부 연구에서는 알츠하이머 환자가 과거의 기억을 왜곡하거나 재구성하는 경우가 있다고 보고하였지만, 이는 아직 확실하게 이해되지 않은 영역이라고 한다.
알츠하이머병은 복잡한 질병으로, 기억 손상 및 인지 기능 저하 외에도 감정, 행동, 일상생활 능력에도 영향을 미친다. 따라서, 개인의 기억이 어떻게 변화할지는 매우 '개별적이고' '예측하기 어렵다'고 할 수 있다..
알츠하이머의 증상을 이쯤 이해하고 나니 실제 사례와 자료들을 조사한 후 매우 사실적으로 접목시킨 김영하 작가의 이 소설이 더 대단하게 느껴졌다. 주인공의 '기억법'은 그 자체로 얼마든 사실이라해도 과장이 없는 현실이기 때문이다.
아이러니하게도, 치매가 진전됨에 따르는 구체적인 증상과 일상적 일기를 통해 비쳐지는 연쇄살인범이 세상에 대한 사색은 '사건의 진실'을 추적해가는 과정과 별개로 위증없이 매우 '진실하다'. 이 소설에 대해 어떤 평론가의 언급에 카프카적 유머가 느껴진다고 했는데 꽤 자주 그런 부분이 느껴졌다.
알고 있었음에도 두번째 다시 읽을 때 그 유머가 더 유머스럽게 다가온다. 시 강의를 듣는 병수는 강사로부터 전에 시를 배운 적이 정말 없냐며 칭찬을 받는다. 이 때 병수는 대답한다. 시 말고도 '인생에는 남에게 배울 수 없는 것들'이 몇가지 있지요 라고. 그런가보다 했는데 다시 읽으니 이제야 납득이 되는 것이다. 병수가 여기서 말하는 몇 가지란 아마도 살인을 하는 방법, 시체를 감추는 방법, 잡히지 않는 방법..이런 것들이 아닐까 추측하게 되는 것이다.
그는 철저히 살인자의 입장에서 살인을 본다. 거기에는 당연히 윤리 의식 따위는 존재하지 않는다. 스스로도 자신의 범죄 완벽성에 대한 수치감은 있으나 죄책감은 없다고 말한다. 그래서 더 위험한 것이라는 것도(이것을 '안다는 이상' 이미 싸이코패스는 아닌 것 같지만).
주인공은 몰입의 즐거움(칙센트미하이의 책으로 추정) 운운하지만 자신의 과거에는 하나에만 몰입하는 아이는 미친 사람 취급을 당했으며, 자신에게의 몰입이란(살인이기 때문에)매우 위험한 것이다, 그러니 함부로 몰입이 즐겁다느니 뭐니 함부로 지껄이지 말라고 말한다.
또한 그는 자신이 (이미 공소시효가 끝난 관계로) 잡힌다해도 처벌받지 않는다는 것이 인간사회에서 정말 철저히 버림받은 것 같아서 행복하지 않다고 한다. 인간에게 행복은 살아있다고 느끼는 것인데, 자신에게는 행복의 때는 살인을 생각하고 그것을 도모했던 때라는 것이다.
연쇄살인범을 공소시효가 끝나도록 잡지못한 것이 천추의 한이 된 안형사가 병수를 앞에 두고 살인범 그 놈이 발 뻗고 자지 않고 고통스러웠으면 좋겠다고 말하자 주인공 김병수는 속으로 나는 아직도 발을 뻗고 잠을 잘 잔다고 독백한다. (실제 범죄자들 사례를 보면 유머라기보다는 기정 사실이지만)
치매에 대한 묘사는 연민을 일으키고, 시대와 사회에 대한 비웃음에서는 카타르시스를, 그리고 마지막 결말에서는 뭐가 뭔지 모를 미묘함을 남긴다. 살인소설인데도 범죄행위에 대한 구체적 묘사가 없어서인지(내면묘사와 일상묘사가 99%) 소설을 읽는 도중에도 후에도, 살인자의 살인 자체만을 향한 분개나 심판 의식이 발동되지는 않는다. 피칠갑류를 혐오하는 나같은 독자들이 이 소설을 더 재밌게 읽을 수 있는 이유다. 오히려 살인 외의 것들에서 생각할 것들이 많아진다.
치매 소재에 살인자 소재가 믹스되어 당사자가 아니라면 잘 모를 수 있는 치매의 심각한 상황들에 더 내밀하게 공감하게 되고 나중에는 내 노년의 신변(?)까지도 미리 걱정하게 된다.
장르는 좀 다르지만 치매를 소재로한 작품 중 역작임에는 분명하다.
내 짧은 경험 안에서 현재까지 드라마는 <눈이 부시게> , 그리고 소설은 <살인자의 기억법> 이 오래도록 기억에 남게 될 것 같다.
열여섯 살에 시작해서 마흔다섯까지 계속했다.
4.19와 5.16을 겪었다. 박정희가 시월유신을 선포하고 종신독재를 꿈꿨다.
육영수가 총에 맞아 죽었다. 박정희도 암살당했다.
김대중이 일본에서 납치되었다가 구사일생으로 살아나고. 김영삼은 국회에서 제명됐다.
계엄군이 광주를 포위하고 사람들을 때려죽이고 총으로 쏴 죽였다.
그러나 나는 오직 살인만 생각했다. 이 세상과 혼자만의 전쟁을 벌이고 있었다.
그 때는 DNA검사도, 폐쇄회로 TV도 없던 시절이었다.
수십 명의 거동수상자와 정신병자가 용의자로 지목돼 경찰서에 끌려가 고문을 당했다.
경찰 수천 명이 작대기를 들고 애먼 야산만 쑤시고 다녔다. 그게 수사였다.
좋은 시절이었다
사이다다. 무심한 듯 군더더기 한 톨 없이 정연하게 정리된 것이 마치 시 구절같다
새삼스러운(그리고 쓸데없는) 것들
-소설에 계속되는 짤막한 표현은 책을 잘 읽지 않는 요즘 독자들에게 더욱 잘 맞는다 십여년 지나 읽으니 힙하게까지 느껴진다 내용의 몰입력은 덤이다
-평행우주라는 단어가 소설 속에 이미 등장한다 하긴 그 전후 즈음부터 어벤저스를 보았던 것 같다 김영하는 그 때도 부지런히 시대에 따른 공부를 하는 트랜디한(?)작가였다
-어제 방구석1열에서 소개된 대만의 '광주 영화' <비정성시>와 동일한 제목의 시 구절이 부분 등장한다 풋사과 같이 어린 양조위가 나온다 꼭 찾아 볼 것이다 허우 샤오위엔 감독의 이 영화는 1989년 개봉이니, 1976년 태생인 시인 김경주는 이 영화를 찾아본 것이 분명하다
-얼마전 개봉한 서울의 봄이 한창 인기였는데 이 책에서도 한국 근대사를 몇 줄로 정리하는 부분이 나온다 살인의 추억 시대가 그렇듯이(폭력과 공적 살인이 난무했던 그 시대에 제정신으로 살았간 인간들이 있었을까 싶다.. 시대의 트라우마는 당시를 지나고도 한참을 오래간다는데 그시대의 연쇄살인범들(ex.이춘재)은 환경오염의 결과처럼 자연스러운 것인지도), 초딩시절 <이제는 말할 수 있다> 사진전에서 본 사진들이 그렇듯이, 아무리 오랫동안 쉬쉬하거나 모르쇠하거나 둘 다를 다 해왔어도 엄연(儼然)한 것들이라는 것이 있다. 나치의 유태인 학살 자체를 원천 부인하는 이들이 존재하듯 그 시대도 그런 성질의 것일 뿐이다. 그리고 살인범 김병수라는 한 인간의 역사적 배경이 내가 생각한 지점과 너무 동일해서 놀랐다. 절통한 피가 넘쳐흐르는 그런 시대를 살면서도 항거하는 마음 또는 두려워서 외면하는 마음보다는 그야말로 살인 자체에 미쳤던 사람들도, 있었었구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