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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OOK] 풍부의 추월차선

[책]<사라진 것들>앤드루포터 단편소설집/중년기의 불안과 미묘한 감정들/사실주의 북미소설/일상적이고도 깊고 풍부한 내면 묘사/현대미국단편문학

by 돌냥 2024. 7. 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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앤드루 포터의 소설 <사라진 것들 The Disappeared>을 처음 읽었을 때, 나는 이게 정말 소설이 맞는지 의문이 들었다. 이야기 속에 등장하는 에피소드들은 마치 일기처럼 느껴졌기 때문이다. 짧은 초단편부터 여러 장에 걸친 중단편까지, 포터의 글은 소설이라기보다는 서사가 거의 없는 논픽션처럼 보였다.

 

‘사건’ 중심으로 서사를 파악하려는 나의 조급함과 모든 작가의 ‘숨은 의도’에 대해 의심을 품는 나의 성격 탓에, 포터의 단편들을 읽으면서도 마지막 페이지까지 애써 긴장감을 유지했다. ‘이 글의 끝에는 필히 어떤 반전 또는 폭로가 있을 것이다’라고 생각하면서. 하지만 이야기는 그런 예상을 완전히 빗나갔고 '정말로 담담하게' 끝나버렸다. 결국 나는 나의 공감 능력 결핍을 확인하며 처음으로 돌아가 글을 읽었고, 이런 반복을 이 단편집을 보는 내내 했다. 

 

각 단편들에서 ‘나’로 표현되는 1인칭 시점의 주인공들은 대개 중년의 남성들로, 주로 학교나 예술 바운더리에서 일하며 살아가는 사람들이다. 그들은 일상 속에서 큰 사건 없이 살아가지만, 그들의 이야기에는 묘한 공통점이 있다. 그들은 젊었을 때의 낭만과 패기가 더 이상은 어울리지 않는 무미하고 반복된 일상을 살아가고 있으며, 중년 나이가 되어  '자기 자신을 잃었다는' 공통점이 있다.

 

 


 

 

<오스틴>에서 ‘나’는 오랜 친구들과의 모임에서 낯선 이질감을 느낀다. 한 친구가 집에 침입한 소년을 정당방위로 살해한 이야기가 화제가 되지만, 나는 그다지 흥미를 느끼지 않는다. 원인이나 배경은 중요하지 않으며 살인과 죽음 모두 가족이 있는 삶에서는 그저 슬플 뿐이기 때문이다. 친구들과 달리 나만 홀로 다른 삶이 되어버린 것 같은 느낌에 나는 작별인사도 없이 파티 자리를 빠져나와 집으로 돌아온다. 유일하게 안온함을 주는 집이지만 이 곳 또한 도처에 불안이 숨을 쉰다. 딸은 밤마다 원인을 알 수 없이 불길한 내용의 꿈을 꾸고, 아내는 온갖 예민함과 불안 속에 매일 수면장애를 겪는다. 그리고 나는 세탁실에서 들려오는 낯선 소음에도 온몸의 촉수를 잔뜩 긴장한 채 집 주변을 점검하고 안전장치를 확인한다. 그러면서 나는 확인한다. 젊은 시절 꿈꿨던 삶은 바로 이렇게 매일 저녁 세탁실과 뒷마당, 차고를 살피고(물론 미국의 실정이 반영된 것도 있다) 잠금장치를 단단히 잠그며 '안전함을 확인하는' 무한한 반복의 일상에 다를 바 없다는 것을. 그 순간 모임에 있던 친구로부터 온 문자가 날아온다. 나는 답장을 하지 않은 채 하루를 마무리한다. 문자엔 이렇게 쓰여 있었다. 

'무슨 일이 일어난 거야 친구? 너 어디로 간 거야?'

 

 


 

 

<라인벡>에서는 대학 동창 친구들인 데이비드와 리베카 부부와 함께 일상을 살아가는 ‘나’의 이야기가 펼쳐진다. 처음에는 두 달 정도 친구의 식당 사업을 도우려던 단순한 마음이었지만 시간은 어느 덧 두 해가 되고, 이십 년이 된다. 나는 (소설 속에서 그 스스로 알아차렸다고 나오진 않지만) 반은 그들 싸움의 원인이 되고, 나머지 반은 그들 필요(부부 갈등을 중재하기 위한)의 이용 수단이 되는 삶을 살아간다. 진정한 우정인 줄 알았던 부부는 정작 중요한 결정은 늘 일방적으로 전달하지만 나 또한 그것을 매번 수동적으로 받아들이고 그들을 '좇아서' 그들 인생의 바운더리 안에서 살아간다.

그런 어느 날, 식당 이전과 관련해 데이비드와 리베카의 이사 계획을 갑작스럽개 통보받게 되고 나는 크게 배신감과 분노를 느끼게 된다. 한편으로는 나는 그들과의 본격적 이별을 감당하기 힘들어한다. 여자친구도 만들지 않고 결혼도 하지 않고 일정한 정기직업도 없으며 홀로 독립되어 살아가지 않고 살아온 나는, 자신이 부부의 삶에 오랜 세월 지나치게 깊이 관여해 왔다는 것을 알게 된다. 나는 그들에게 정서적, 현실적으로 의존해온 나머지 자신도 모르는 새 이상하게 변해버린 삶을 살게 되었음을 깨닫게 된다.

 

 


 

 

 

<히메나>의 주인공 '나'는 젊은 시절의 감정을 떠올리며, 현재의 아무 꿈과 변화가 없는 상태와 과거의 삶을 비교한다. 나는 아랫층에 사는 젊은 여자 이웃 '히메나'와 어쩌다 인연이 된다. 히메나와 영화나 감성코드가 잘 맞는다는 걸 알게 된  나는 그녀와 함께 자주 대화하며 영화를 같이 보는 시간을 보낸다. 알고보니 히메나는 부부 중 남편인 나뿐만 아니라 '나의 부인'과도 친분이 있었다. 희한하게도 부부는 그 사실에 대해서(각자 히메나와 시간을 같이 보내는)서로 결코 나누지 않는다. 남편인 내가 보기에 '히메나와 와이프 간의 관계'는 '히메나와 나의 관계'보다도 훨씬 깊고 어딘가 은밀하고 진지해 보인다.

어디로 튈지, 매일 무슨 사건을 만들지, 과거에 어떤 문제와 비밀이 있는지 갈팡질팡과 엉망진창 그 자체인 히메나의 인생을 바라보며 나는 여러 감정과 생각들 가운데 욕망과 혼란을 느낀다. 결국 히메나는 떠난다. 나도 버리고 와이프도 버렸다. 아니 사실은 아무도 버리지 않았다. '나'는 히메나나 자신이 젊은 독신 시절에 그랬던 것처럼, 혼자 있는 빈 방보다는 누구든 간에 자신과 함께 하고 있는 상태를 바랐던 것이 아닐까 하고 생각하게 된다. 짧은 시간의 모험처럼 존재했던 히메나와의 시간을 통해 나는  젊은 시절의 에너지와 불안정을 추억하게 된다. 그리고 젊은 시절과는 다른 현재의 삶에서 느끼는 단절감과 공허감 등에 대해 새삼 새로운 눈으로 알아차리게 된다.

 

 


 

포터의 단편들은 중년의 불안과 불확실성을 그려낸다.  <오스틴>, <라인벡>, <히메나> 등 모든 이야기에서 등장인물들은 과거의 환상을 욕망하면서도, 현재의 안온함과 안정감을 추구한다.

책을 덮으면서, 나는 포터가 ‘곁에 있는 것만으로도 위안이 되는 타인의 존재’에 대해 말하고 싶었던 것이 아닌가 생각했다. 이 소설집은 다큐멘터리 영화를 보듯 심심하게 느껴지기도 하지만, 동시에 깊은 공감을 불러일으킨다. 잔잔한 공감의 울림이 큰 소설집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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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라진 것들>
원제 : The Disappeared

지은이 앤드루 포터
옮긴이 민은영
펴낸곳 문학동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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