내게도 서른은 멍투성이였고 정신과 상담을 받을 만큼 나를 몰아세우는 극한의 노동과 바쁨, 맹목적인 모든 열심들이 가득했던 때였다.
그러나 이 책에서와 같은 스스로에 대한 발견, 통찰, 그리고 돌봄의 노력들은 한참이 흐른 뒤에야 시작하게 됐다.
거의 마흔이 될 때 쯤부터였다.
아마 내 이후의 태생은 '나 때(라떼..)보다' 좀 더 이른 나이부터 고강도의 경쟁 라이프를 살아내고, 더 이른 나이에 고통과 좌절 허무를 맛보고(대학 입시 전에), 이십대가 된 후 저성장 시대 및 자기 의미의 시대에 맞물려 보다 전형적인 길보다는 여러 갈래로 뻗은 길들을 걸어가며 자기만의 길을 만들기 위해 여러 시도를 하고, 단순히 취업 여부와 회사 크기 여부에 따라 성공, 실패 둘 중 하나이기 보다는 자기 확립의 고군분투를 빠르게 스타트를 끊고 죽이 되든 밥이 되든 자신만을 위한 삶의 모험을 일종의 실험처럼 살아가고 있는 것 같다.
물론 모든 MZ가 그런 것은 아니지만 적어도 내 또래보다는 ‘좀 덜’ 정형화된 모습으로, 그리고 ‘좀 더’ 자신만의 경험을 우위 가치에 두며, 본래의 자기 모습을 유지하면서도 의미있게 살아가고자 하는 시도와 과정이 (나는 그 나이에 그렇기 살지 못했다는 자기 반성과 함께) 굉장히 바람직하게 느껴진다.
저자의 업종, 문체 모두 당연히 나와는 다르지만 자신이라는 존재를 감당하고 부양하고 동행하면서 느끼는, 일과 관계 속의 고충, 삶의 단상 그 결이 나와 참 많이 닮아있었다.
단지 나라는 존재로 살아가며 순간 순간 꿈틀대는 불안을 이기고 결과를 획득하기 위한 모든 노동들과 몸져누움, 자기 홀대와 병듦, 번아웃된 마음들, 스스로를 어루만지고 부추켜세움.. 이 지난하고 세세한 과정들은 나 뿐 아니라 많은 현대인들, 그 속에서도 세상의 속도와 방향에 맞추기 보다 자신의 목소리에 귀기울이고 자신과 제대로 된 관계를 맺는 데 집중하기로 마음먹은 이들이라면 나이 불문 누구나 공감할 만한 내용들일 것이라 생각된다.
엠지 엠지 타령하지만, 그마저도 어설프게 엠지 초기에 걸쳐있는 세대는 낀 세대, 버린(?) 세대 취급받곤 하지만, 1940~60년대 태생처럼 명명백백 산업화 역군으로 나라와 사회의 경제 기둥이자 한국 경제 발전의 초대가 된 세대에 대한 인식과는 달리, 그 이후의 세대들에 대해서는 여전히 그 ‘사회 기능적인 색채’가 불명확한 감이 있다.
개인적으로는 90년대에 청년 시기를 보낸 세대와(X세대다-1968년을 전후해서 태어난 세대로서 정확한 특징을 설명하기가 모호한 세대)그 이후로 이어진 지금까지의 세대들의 '역사적 의미'는 무엇인지 아직도 정리가 되지 않았다.
아니 정확히 말하자면 ‘배부르게 지낸 것도 아닌데 늘 등따시고 배부른 취급을 받으면서도 이전 어느 세대보다 더 정밀하고 교활하고 고강도의 방식(가스라이팅과 훈련, 제도를 통해)으로 경쟁과 최고의 결과를 강요받고, 개개인화된 각자의 환경, 질병, 관계에 대한 인과들은 모두 무시되며 오로지 결과로 존재가치를 입증받는 세대. 그럼에도 유년기 성장환경과 자유의지만큼은 역대 최고 수준이라는 환상과 포장을 입은 세대에 대한 의미 말이다(MZ 이전과 이후를 한덩어리씩 묶는 것은 무리가 있을 수 있지만, 그만큼 MZ 이전까지의 세대는 몽땅 묶어서 '개인이 사회와 국가와 한덩어리로 묶여진, 즉 벌떼처럼 개체 자체가 곧 군집인, 전체의 사고방식이 개인의 사고방식이 되는' 세대이기에 이렇게 단순화할 수 밖에 없다).
한편으로 지금은 민주주의나 초자본주의가가 공기처럼 익숙해졌지만 동시에 물질주의, 성과주의는 훨씬 더 무자비해지고 살벌해졌다. 게다가 전근대에만 존재하는 줄 알았던 전체주의적 사고방식은 돈과 유명세라는 기준 아래 오늘날 훨씬 더 공고해진 것은 아닌가 싶은 생각도 든다. 단지 이제는 세계과 각 국가들이 전부 그렇게 된 상황(단체 정신병처럼)이라 감옥 속에서의 자유도 자유라고 분별하기가 힘들어진 것일 뿐.
어쨌든 먹고 사는 것을 포함해서도 오늘날 젊은이들은 힘들다.
일은 훨씬 치열하고 일 외에도 자기 존재가 땅으로 한없이 곤두박칠치지 않으려면 각자는 바닥없는 물 속 심연으로 가라앉아 죽지 않기 위해(그것을 단순한 SNS와, 분별없는 비교의식, 낮은 자존감의 원인으로만 핑계할 순 없다)두 팔 다리를 끊임없이 휘적이며 수면 위로 얼굴을 빼놓기 위해 단지 '숨을 쉬기 위해' 사력을 다해야 한다.
나는 진정 지금 이 시대가 그런 시대가 되었다고 생각한다. 자기 스스로조차, 자신이 자기 자신을 인정하기 위해서조차도 너무 많은 투자, 정신적이고 때로는 물질적인 에너지를 투자해야만 하는 시대라고(한낱 '관심'정도 따위로는 부족하다).
우리 스스로가 완벽주의적으로 강박적으로 스펙과 돈을 만들어내기 위해 장기간, 엄청난 체력과 물질을 들여온 것처럼 나 자신을 인정해주는 것도 그 이상으로 얼렁뚱땅, 대충할 수는 없게 된 시대가 되버리고 만 것이다. 돈을 들여 개인피티를 받고 바디프로필을 찍고 요가 자격증을 따고 그림을 그리고 책을 내고.. 물론 돈이 들지 않더라해도 스스로가 인정하고 만족스러워질 만큼의 '성심성의'가 필요하다. 이제 칭찬과 인정의 기준은 '내'가 되버렸다.
나 역시 어느 정도는 그렇다. 그런데 그런 나 조차도 내부적으로는 경쟁시대에 태어난 사회 유전자(비록 다소 '변이'에 가깝긴 하지만)를 일부 갖고 있기에 외적 내적으로 애초 온전히 나 자체만을 위하는 기준은 갖고 있지 못하다. 내가 좋아하는 것이 무엇인지 하고 싶은 게 무엇인지, 어떤 걸 편하게 느끼는지 이 지긋지긋할 정도로 뻔한 질문들조차 자기 내부의 어디서부터 거슬러 올라가야 하는지를 알지 못한다.
그럼에도 이런 과정이 고역스럽지 않고 또 고역스럽지 않아야만 할 것은 앞으로 이런 시대가 얼마간은, 아니 생각보다 오래 지속될 것 같기 때문이다. 나 자신과 화해해야만, 나와 온전한 관계를 맺어야만 각 사람에게 해당하는 물결의 흐름과는 상관없이 끊임없이 들이쳐서 물결을 흩뜨리고 거품을 일으키는 세상의 파도에 휩쓸리지 않고 겨우 온전한 정신을 붙들고 눈 앞 당장의 현실을 순간 순간 견딜 수 있는 그런 시대.
오래 지속되는 장기 불황 속 '본의 아니게 가진 것이 없기에' 외부 기준 채점이 아닌 내부 기준 채점(내면 욕구의 참 성취 여부를 심사)에서의 고득점을 달성하는 편이 훨씬 빠르고 실현 가능성이 있는 시대.
아니 이미 도래한 지 꽤 지난 건지도 모른 세태 속에서 나는 이 책의 저자가 쓴 모든 챕터의 내용이 참 부러워졌다. 그녀의 지난 이십대 전부가 내부 기준 채점에 고득점이 될 만한 유일무이한 경험-실패해도 실패한 것을 느낄 수 없는 계속된 자기 배움들-들로 가득차 있었기 때문이다.
온몸이 휘고 고장나는 줄도 모를 정도로 자신을 혹독히 앞세워 고생시켜 본 사람은 아무래도 앞으로는 자신으로 인해 병들어본 자신의 육체와 마음을 보다 제대로 케어할 확률이 높다. 또한 동병상련이라고 적어도 자신과 같은 증상 아픔 시행착오를 겪는 이들을 보다 잘 이해하고 자신이 효과를 본 방법들(생각, 행동 두 가지 면 모두)에 대해 제대로 가르쳐 줄 수 있다. (기적의 자가 암 완치법을 소개하는 이들 중에는 더러 본인 스스로가 치료의 첫 환자이자 수혜자인 경우가 꽤나 있다)
그래서 좀 더 믿을 만한 인사이트를 주는 책이다.
마음챙김 명상 앱 서비스를 운영하는 저자는 지난 시간의 자신처럼 '마음에 운동이 필요한' 이들을 위해 자신의 삶을 있는 그대로 바라보며 자신의 대상으로 한 자기 챙김의 발로로서 일상을 기록하고 그것을 책으로 내었다. 그저 일을 위한 일로서 업무적 멘트를 하는 것이 아니고 본인이 지나온 경험담들이기에 그것은 읽는 이에게도 고스란히 진심과 위로로 깊이 전달되고 어느샌가 내 것이 아님에도 '나의' 경험과 '나의' 사실로써 공유된다.
요가를 시작한지 겨우 한 주 된 시점에서 읽게 된 이 책은 요가 에피소드 외에도 내가 겪은 일들과 무관하지 않은 우연들이 넘친다(요가도 이젠 너무 보편화되어 개별적일 것이 없을 수도 있지만 작가가 묘사한 '내 마음에 변화를 일으키는 일련의 흐름 그것이 곧 '마술같은' 그 느낌' 만은 나에게도 역시 매우 놀랍고도 개별적인 것, 뜻밖에 다가온 '우연적인' 공감이었다).
청소, 요리, 요가, 산책.. 내가 가치있는 존재로 느끼기위해 하는 것이라면 무엇이든 당장 살아갈 수 있는 힘이 된다.
힘든 시기에도 생각하지 않기 위해, 또는 외로워지지 않기 위해 스스로 ‘쉼 거지’를 택하는 이들이 있다면 꼭 이 책을 읽어보길 바란다.
좀 다른 얘길 하자면 우리나라는 늘 깍두기같은 나라의 위치에서 불운과 행운을 다 겪었음에도 유럽, 미국, 일본이 다 거친 68운동(다른 역사 평가를 떠나 소수자의 인권, 다양한 성적지향, 환경보호와 다양한 의견 존중, 개인의 자아실현 등 현재 서구 사회에 자연스러운 문화에 큰 분수령이 된 계기임에는 분명했던)류의 사회적 성찰의 기회를 거친 적이 여태껏 없었다. 이제라도 호흡을 가다듬고 지나온 시대의 실상과 부작용과 온갖 점진적 개선들을 해나가야 할 필요가 있어보인다.
우리 부모님만 봐도 기성세대가 기존의 타인 위주 체면을 버리고자신을 있는 그대로 받아들이며 살아간다는 것은 여전히 불가능한 과제처럼 느껴지지만, 이런 저자같은 ‘젊은이들(..)’이 있기에 한국 사회의 큰 흐름이 바뀌기를 기대해 볼 뿐이다.
좌우 어느 것에도 치우치지 않고 오직 자기 내면에 치우치면서도 상황과 필요에 따라 주변에 적절하게 합해지고 기여도 할 수 있는 그런 각자 한명 한명들이 매일 내일 더 나아지는 삶을 살며, 이 각자도생의 힘든 시대를 건강하게 잘 살아나갈 수 있기를.
소심과 눈치로 살아가는 가운데서도 편안하면서도 용맹한 '자연(自然-자기 저절로 그렇게 되는 모양)', 또 자존이 확립된 상태에서의 참된 어울림을 꿈꾸는 나 자신을 응원하는 마음으로, 더 많은 사람들이 이 책을 통해 응원을 얻어가길 바라본다.
모든 게 다 나의 문제는 아니다. 내가 아무리 열심히 해도 지금과 같은 방법으로는 결코 탈피할 수 없는 구조의 문제일 수도 있다. 그런데 구조를 고민하기보다는 구조에 순응하고 그 규칙에 따라 열심히만 플레이해왔다는 생각이 들었다. 무작정 열심히 하며 게으름을 피워왔구나. 스스로 질문하고 고민하는 데에는 게을러졌던 거다. 열심히 한다는 건 방향을 점검하고, 나에 대해 성찰하고, 불편한 질문에 답하는 일보다 더 편안하고 쉬운 일이니까.
지나치게 하거나 지나치게 하지 않는 건 실은 그 일을 제대로 하고 싶어서가 아닐까. 그놈의 '제대로'. 잘하고 싶으니까 고민이 길어지고, 더 완벽하게 해내야겠다는 부담감으로 시작이 계속 늦춰졌다. 결과물은 일의 크기가 작으면 어느 정도 감당해볼 수도 있지만, 해야 하는 일의 크기가 커지면 결과물이 성에 차지 않게 나오거나 아예 엎어지는 일도 생겼다. 반드시 해야 하는 때가 오면 몰아칠 수밖에 없기 때문에 무리하게 됐다. 자꾸 무리하면 몸이든 맘이든 고장났다.
흔들림 없는 쉼의 목적을 찾은 건 목이 아파 일을 잠시 쉬게 된 이후였다. 우연히 본 드라마 <미생>에 한 대사가 내 가슴을 후벼 팠다.
"체력이 약하면 빨리 편안함을 찾게 되고, 그러면 인내심이 떨어지고 또 그 피로감을 견디지 못하면 승부 따위는 상관없는 지경에 이르지. 정신력은 체력의 보호 없이는 구호밖에 안 돼."
내 체력이야말로 앞으로 즐겁게 해나가고 싶은 모든 일에 위험 요인이 되고 있다는 것을 받아들였다.
내 것을 홀라당 뒤로 한 채 무작정 상대의 평가가 옳다고 여기며 나의 부족한 점을 메우기에 바빴던 게 아닐까? 그렇게 내가 알고 있는 것, 내가 해오던 것 중 좋은 것을 남기고 인정해주는 과정 없이 피드백을 흡수하다 보니 막상 좋은 것들은 소중하게 여기지 않고, 부족한 것만 계속 들여다보고 있었다. 부족함을 알아채고 고쳐나가는 것도 중요하지만, 내가 잘해오던 게 뭔지 알고 그걸 지켜내는 것도 성장의 한 방식임을 잘 몰랐다.
아직도 가까운 사람의 의견은 일단 자동으로 받아들일 준비가 되어버리는 게 문제라면 문제다. 누군가가 '이걸 바꿔 달라. 이 부분을 채우면 어떻겠냐'고 하면 나에게 한 가지 질문을 던져본다. 지금 여기서 내가 지켜내야 하는 건 없을까? 내가 이걸 바꾸면 원래 잘하고 있던 부분까지 해치게 되는 건 아닐까? 부족함을 메우는 과정 앞에 딱 한 가지 질문을 추가하는 연습을 해보고 있다.
나와 나 사이에도 똑같이 적용할 수 있을 것 같다. 들꽃의 가치처럼, 나의 가치도 내가 직접 발견해야만 하는 게 아닐까? 깨끗이 몸을 정돈하고, 립밤을 바르는 것. 좀 더 나은 음식을 먹는 것. 누군가를 돌보는 것. 일을 하는 것. 내가 나를 어떻게 바라보느냐, 무엇을 멋지게 여기느냐에 따라서 살아가는 모습이 다를 뿐, 나를 괜찮은 사람으로 인식하고 싶은 토대는 달라지지 않는 것 같다. 대체로 나를 더 가치 있는 존재로 느끼기 위해 노력하는 하루하루가 이어진다.
내가 나를 어떻게 바라보는가가 정말로 중요하다면, 왜 내가 직접 정의하지 않을까? 왜 스스로 괜찮은 사람이라고 말해주지 않을까? 나의 커리어나 내가 다닌 학교, 나의 외모, 관계의 질 등이 모두 나의 가치에 영향을 주겠지만, 내가 무엇을 나의 가치로 받아들일 것인가 하는 것은 어느 정도 내 힘 아래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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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리는 스스로를 폭주기관차 삼은 폐해와 후유증(번아웃, 다양한 육체와 정신의 질병)을 스스로 심각하게 겪었음에도 진지한 자기 관찰과 돌봄, 훨씬 자기답게 살 수 있게 할지 모르는 여러 시행착오와 도전들-그러나 여태까지 우리가 알고 있는 '성과와 이김이라는 결과'와는 다른 양상의 모습들-과 같은 변화에 대해서는 여전히 익숙하지 않다. 또 내로남불하게도 그 변화가 타인의 것일 경우(친구, 배우자, 형제, 자식)엔 더더욱 달가워하지 않는다.
우리는 모든 '성찰'과 '자기를 보는 것'에 인색하다. 자기 자신과 타인 모두에게 마찬가지다. 그럼에도 그러기로 결정한 이상 우리는 이제 나 자신도 타인도 눈치를 봐서는 안된다. 대단한 도전이 아닐지라도 대단한 결과도 아닐지라도 상관이 없다. 매일 나와 한 발 더 가까워 지는 것, 나에게 있어 더 나은 존재가 되는 것 그 외에는 어느 것도 신경 쓸 필요가 없다.
왜냐하면 나를 알게 됐다 해도, 그 때부터가 시작일 뿐 모든 상황에서의 자기 착오, 자기결핍, 서투름, 협잡함..그렇게 까지는 알고 싶지 않았던 내 단점들까지 자기혐오가 아닌 중립적으로 보게 된 후에도 여전히 실망하거나 포기하지 않고 나에게 기회를 주고, 일관성있게 나를 돌보기로 마음먹으며 실행하는 것은 별개의 일이기 때문이다. 아주 아주 여러번의 반복, 시행착오, 그리고 또 반복이 있어야만 하는, '또 넘어지게 될 일'이자 '시간이 많이 걸리는 일' 이기 때문이다.
그러기에 더더욱 다른 신경은 끄고 시간은 내 편이다, 하면서 나를 바라보고 나를 받아주는 것, 나를 일으키는 것에만 전념하고 살아만 가도 삶이 모자라게 된다.
사람을 고통스럽게 하는 것은 저마다 다른 다양한 이유이지만 행복하게 하는 것은 거의 같은 단순한 몇 가지 이유다.
나의 대단치 않은 우주를 순애보처럼 그 자체로 사랑하고, 날마다 온전히 만족스럽게 여기는 것만으로 나는 어제보다 더 나은 존재가 될 수 있다. 어차피 살아있을 동안 온갖 내용을 휘갈겨 쓴 시험지를 낼 사람도, 그것을 채점을 할 사람도 오직 나 밖에는 없기 때문이다.
+덧.
참고로,
자신이 '최선이자 정답'이라고 규정했던 모든 것, 또는 자신을 이끌어온 모든 '원동력적인 신념과 원칙 그리고 그에 상응하는 대가지불(근면과 노오력)'에 대해 완전히 무너져 본, 원천적인 초기화 상태를 겪어본 사람이 아니라면 ''자신의 참 모습을 찾고 단단함을 만들어가려는" 당신의 시도와 생각들에 대해 구태여 그 사람으로부터 공감이나 응원을 받을 생각은 애시당초 하지 말아야 한다. 비슷한 인간만 모아놓은 좁은 바운더리를 벗어나면 당신과 같은 시간과 경험을 가진 사람들, 당신이 진짜 위로와 힘 삼을 사람들은 따로 있다는 걸 알게 된다. 그리고 생각보다 많이, 있다. 책을 지은 이처럼 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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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은이 김지언
펴낸곳 일토