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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OOK] 풍부의 추월차선

[책]'참 좋은 시절' 미국 90년대와 X세대 전격분석기<90년대-길고도 가벼웠던 10년간의 질주>세기말 향수병 자극하는 시대여행기

by 돌냥 2023. 9. 1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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쿨함, 진정성, 자의식이 뒤섞인 
역사상 가장 아이러니한 10년으로의 여행

 

'1990년대'. 내가 생존해있던 시대임에도 MZ의 뉴트로 패션이 지향하는 스타일로 부상하면서 뭔가 전과 달리 생경함이 생겨버린 새삼스러운 시대가 되었다. 물론 당시의 주인공은 90년대에 청년기를 보낸 이들은 X세대(빠르게는 밀레니얼 세대의 부모세대)였고 나는 한창 그 언니오빠들을 선망하거나 따라하던 초등학생이었으니 예전이나 지금이나 X세대는 길거리에서 걷다가 부딪힐만큼 흔함해도 현실 속에서는 실체하지 않는 것만 같은 요원한 감이 있다.

 

서태지와 아이들이 나왔고 내게도 그들의 등장은 새로운 시대를 알리는 서막과도 같은 존재감이있었다. 나와 언니는 문방구에서 ‘난 알아요’ 가사와 음표가 적힌 노란 개나리색 도화지로 만들어진 악보를 샀다.(당시 역주행으로 큰 인기몰이 중이었던 김국환의 ‘타타타’도 샀다) 친척언니네 방은 그들의 사진과 포스터로 도배되었고, 나도 언니들처럼 사진카드를 모으고 잡지에서 오려낸 사진들을 붙여 멋진 하드보드지 필통을 만들고 싶었지만 초3때 그런 돈을 구할 수는 없어서 늘 놀러가서 구경하는 것으로 만족했다.

 

초등학교 3학년 무렵이다. 그 어린 나이에 다른 것은 몰라도 신문과 뉴스에 오르내리는 X세대('신세대'라고도 불렀다)라는 명칭이 이전에는 없던 새로운 신조어라는 것을 알았다. 그 때로부터 ‘세대 특성’에 대한 우리 사회의 새삼스러운 관찰과 인식이 시작된 것이다.

그리고 이번에 <90년대> 이 책을 읽으면서 나는 처음으로 알게 되었다. 당시에도 살짝 촌스러웠던 것 같지만 아니 세월의 흐름이 덧입혀지면서 당시를 회상할 때의 느낌 때문에 촌스럽다고 인식했던 그 단어 ‘X세대'가 내 예상과 달리 ‘순우리말(?)’이 전혀 아닌 원산지가 미국에 있으며, 그 세대의 특성 또한(90년대 동시대라는 연도만 같지, 한국과 미국은 지금보다도 사회 경제적 수준이 전혀 달랐다) 묘하게 문화적으로 비슷한 색채를 공유한다는 것이 개인적으로는 대단히 큰 발견처럼 느껴진다.

 

그도 그럴 것이 얼마 전 다른 책 리뷰를 쓰다가 우리나라의 세대 분류에 대한 생각을 하게 됐다. 생각의 흐름은 X세대에 멈추었다. 1910년 이후 일제강점기 세대, 독립운동세대, 6.25참전세대, 그리고 1940~60년대 산업화 역군으로 한국 경제 발전의 초대가 된 세대. 역사를 따라 세대별로 비교적 명확한 역할이나 결과론적인 사회 기능이 있었던 것 같지만 그 이후에 이어진 세대들에 대해서는 그 ‘사회적 캐릭터’에 있어 뭔가 불명확한 감이 있다고 느껴진다. 나에게 그 첫번째 세대가 바로 X세대다.

 

Douglas Coupland의 1991년 소설<X세대: 가속화된 문화를 위한 이야기>에서 처음 사용된 ‘X세대’라는 용어는 명칭은 같아도 미국과 한국에서 각자 가리키는 연령대에 차이가 있다. 보통 미국에서는 60년대 초중반에서 80년대 초반까지를 아우르며, 시대 변화가 보다 급격했던 한국의 경우 통상적으로 70년대생 전체를 일컫는다.(그러나 책을 다 읽은 후 한국의 80년대 중반 태생인 나는 정서적으로는 한국의 엑스세대에 더 가깝다는 엄중한 자기발견..을 하게 된다)

 

물론 엑스세대의 특징에 대해 단편적으로 써놓은 인터넷자료들이 제법 있지만 음악, 드라마, 패션 등의 특성으로 다소 제한된 정보량에 그들의 세대 색채를 보다 가까이 느끼기란 여전히 두루뭉술하다(오히려 내 부모인 베이비부머에 대한 생각은 고정관념이 좀 섞였을지언정 사는 내내 ‘부모세대를 반대하고 저항하면서’ 터특해온 대강의 앎이라도 있는데 말이다). 나랑은 적게는 다섯살~많게는 14살 정도 ‘밖에(어릴 땐 세살 터울부터 엄청 큰선배 같았는데)’안되는 동세대 사람들이기도 하고 그들이 현재 50대에 이르기까지 사회가 여전히 급속하게 돌아갔기 때문에 한국의 X세대를 규정하기에는 아직 충분히 시간이 흐르지 않은 것인지도 모르겠다. 

 

책은 90년대를 둘러싸고 미국에서 일어난 ‘거의 모든’ 이야기다. 저자는 1972년생으로(우리나라 ‘현존 X세대 연예인 중 가장 유명한(다고 할 수 있는)’ 유재석과 동갑니다) 90년대에 청년기를 보낸 사람이자 본인 자체가 미국의 X세대다. X세대가 메인 대상은 아니지만 90년대와 뗄레야 뗄 수 없는 주축 세대(우리나라와 마찬가지로 본인들은 주축인지도 모르고 사그라들었지만)이기 때문에 읽는 동안 염두에 두고 살펴볼 필요가 있다.

 

이 대중문화지침서의 무대배경은 당연히 미국이다. 그러나 보면 볼수록 우리나라에 비슷한 시기에 있었던 사회 조류와 그 이후 일어난 일들의 단초라도 되듯 거의 CTRL+C, CTRL+V 수준으로 아주 익숙해진 기시감(일본의 트랜드나 드라마를 볼 적마다 느끼는)이 느껴지기도 한다. 당시 우리나라에서 굉장히 독보적이라 생각했던 사회를 뒤흔들 정도의 작품, 연예인, 문화사조들이 결국은 알고보면 각각 모두 모방의 원대상과 거의 일대일로 매치시킬 수 있을 만큼 온전한 우리만의 족적이라곤 당시 한 가지도 갖고 있지 못했다는 예상치 못한 자조감도 살짝 든다. 물론 큼직한 몇 가지 것들이 그랬다는 건데 90년일수록 거의 전부가 그렇다(대중가요에서 표절이 남발되었던 것처럼). 당연히 우리보다 경제적 문화적 선진국이었던 미국과 일본으로부터 늘 문화가 대거 유입되었고(따라해왔고) 이제는 우리가 다른 나라에게 따라올 거리를 제공해줄 만큼 선두에 서게 되었으니 다행삼아야겠지만 개인적으로 나름 애틋했던 90년대 향수의 반절쯤은 외국산을 그대로 베껴온 제작자들과 연예계의 산물이었다는 것이 조금, 아주 조금 아쉬울 뿐이다.

 

큼직하게는 다사다난 속에서도 어느 정도의 무사태평함(우리나라는 IMF가 터지기 직전까지), 비디오의 확산과 인터넷 발달 등 미디어의 영향, 진실에 대한 집착과 자의식적 경향(쿨함 또는 자뻑 사이를 왔다갔다하는)과 함께 아직까지는 인터넷의 편향과 왜곡(가짜뉴스나 SNS의 폭발적 상용화)이 시작되기 전이었던 그 시대를, 겪어보지도 않은 미국의 지난 사회상을 하나 하나 반추하면서 동시에 한국의 90년대를 돌이켜보는, 신기하고 진기한 경험을 이 책(사전 두께만한 방대한 양을 가진)을 읽는 동안 하게 됐다. 

 

역사 속의 한 시기를 같이 살아냈다고 해서 같은 동시대 사람들이 모두 동일한 특성을 보인다고 단언할 수는 없다. 그러나 동갑만 해도 일이년 차가 아닌 동갑들 특유의 어떤 시대적 공통점이 거의 반드시(우리나라처럼 좁고 유행이 빠르게 돌며 1,2년 내에서도 시류가 급속히 변해온 나라일 경우 더더욱)있는 것처럼 동시대의 사조라는 것도 어느 정도 ‘어림잡을 수(일반화가 아닌)’있다고 생각한다. 그다지 오래 전 시대도 아니지만 감정적으로는 이미 어렴풋한 흑백사진의 코드를 갖게 된 ‘90년대(코로나 이후로는 더더욱 까마득해진..!)’에 대해 이 책은 설득력있고 섬세하게 다루고 있다.

내 생각에는 우리나라 나이로는 70년대 중반~84년생까지는 과거의 기억을 더듬어가며 확실히 ‘더 큰 재미’를 느끼며 볼 수 있을 것이다. 90년대에 대해 단순한 궁금증을 가진 사람이라도 꽤 다양하고 균형있게 당시의 십년을 훑을 수 있는 풍부한 시간여행서가 될 거라 예상하며 일독을 '매우 추천'한다(일단 '스타워즈를 기억해야하며' 한 때라도 너바나, 펄잼 같은 '록그룹을 좋아했거나 그 반향이라도 기억했던' 사람이라면 상대적으로 공감하며 읽기에 좋다- 어려서부터 배철수의 음악캠프 자주 들었으면 연령은 굳이 상관없지만).

 

 

 

 

1990년대는 미국이 역사상 가장 긴 경제 성장을 누린 시기였다. 결과적으로 전체 X세대의 경험은 거의 전적으로 사회 경제적 측면에서 기억되고 있다. 냉소적이고 팔자 좋게 늘어진 듯한 X세대의 모습을 재정적 특권의 부산물로 취급하는 경향이 흔해졌다. 여기에는 오직 돈 걱정 없는 사람만이 정치에 무관심할 수 있다는 고정관념이 전제로 깔려 있었다. 그러나 이것은 잘못된 해석이다. 90년대의 번영은 90년대 후반에서야 본격화된 데다가, 젊은 청년층은 이 번영에 거의 끼지도 못했다. 1992년 가을 기준 X세대는 미국 가계 자산의 0.8%만을 소유했으며, 이는 직전 2년 전보다 약간 떨어진 수치였다. 90년대 초 젊은이들에게는 자신의 직업에 희망이나 기대를 품을 이유가 거의 없었다. 그들의 새로운 목표는 재미없는 주류 사회로부터 감정적으로나 이성적으로 거리를 두는 것이었다.

 

베이비 붐 세대는 툭하면 자기 집착적이라는 평을 듣곤 했지만, 자기 인식은 둔했다. 베이비 붐 세대가 “불편한 자가 분석”단계에 도달하기까지는 시간이 제법 걸렸다. 처음부터 바로 자기 분석에 들어가 여기서 결코 헤어나지 못한 X세대와는 사뭇 달랐다.
…이들에게 확실히 칭찬할 만한 점이 하나 있다. 여전히 X세대는 아직 살아 있는 세대 중에서 가장 덜 성가신 세대다. 또 모종의 이유로 X세대의 불만은 앞 세대보다는 덜 현학적이고 다음 세대보다는 덜 매서웠다. X세대의 공허한 불만은 바로 베이비 붐 세대의 이데올로기에 대한 반사적 혐오감과 소리 없이 도처에 침투하는 시장주의에 대한 두려움이 중심에 있었다. 이처럼 보이지 않는 억압에 X세대는 오랫동안 괴로워했다.
그러나 이 불만은 이례적이었다. X세대가 어쩔 수 없이 느껴야 했던 무기력과 소외감은 전체 사회의 측면에서 한 가지 장점이 있었다. 바로 쿨함이 거의 전부였던 이 시기에, 보란 듯이 사회적 의분을 표출하는 태도는 쿨하게 여겨지지 않았다는 점이다. 이 시기의 정서는 자기도취보다 자기중심주의가 대세였다. 도덕성을 판단하거나 생활방식을 트집잡아 생면부지의 남을 비판하는 것은 주제넘고 무례하다고 인식되었다. 대신 스스로 불행하다 싶은 사람은 그저 어깨 한 번 으쓱하고 자신의 불행을 체념하듯 받아들이면 그만이었다. 모호한 좌절감은 나쁘지 않았다.

 

1960년의 10대는 원형 폴리염화비닐 레코드라는 실물 형태로 음악을 구입했다. 반면 1990년의 10대는 원형의 폴리카보네이트 디스크로 실물 음악을 구입했다. 1960년대 음반가격은 약 3달러, 1990년대 CD가격은 13.25달러였다. 21세기(2000년 이후)에 태어난 세대는 고가의 전용 재생 장치로만 들을 수 있고, 열두 곡이 통째로 수록된 음반을 13달러나 주고 사는 이유를 도무지 이해할 수 없다(한국은 케이팝 열기와 팬서비스 차원으로 종종 기념CD가 나오고 있어 예외지만..). 요즘 웬만한 음악은 대부분 10달러도 안 되는 한달 이용료로 그때그때 즐길 수 있으니 말이다.
음악을 감상하는 이 두 가지 방식을 모두 경험한 세대라면 음반 구매를 어리석다고 볼 수 없는 이유를 단순하고도 추상적으로 설명할 수 있다. “그 때는 당연했으니까. 그리고 우리도 그렇게 해 왔으니까.”라고 말이다.
그 시대를 전혀 살아 보지 못한 사람들에게는 이러한 사고에 대한 괴리감이 상당할 것이다. 이것은 자동차와 마차의 차이에 비할 바가 아니다. 어둠 속에서 옹기종기 모여 해가 뜨기를 기다리는 것과, 불을 피우기 시작한 것의 차이라 할 만하다.
젊은 세대는 자신들이 어쩔 수 없이 따라야 하는 지금의 세계를 만든 기성세대를 몹시 싫어하며, 이는 기성세대가 반박하기 어려운 비난이다. 기성세대도 젊은 세대를 싫어할 이유가 많은데, 항상 크게 두 가지로 나뉜다.
그들은 젊은 세대가 나약하거나 게으른(혹은 둘 다)자기 세대의 업데이트 버전이라고 인식한다. 이러한 평가는 대개 맞는 말인데다가 긍정적인 신호이기도 하다. 사회가 진보했다는 뜻이기 때문이다. 사회가 진보하면 그 사회에서 성장하는 다음 세대의 생활은 덜 고되고 더 안락해져야 옳다(불행히도 그렇게 된 세대는 우리나라에선 엑스세대가 마지막인듯..MZ세대는 부모보다 가난해진 첫 세대가 되었다). 기술이 발전하고 효율성이 높아지면 다음 세대의 노동 시간은 줄어들 것으로 예상하는 것이 이치에 맞다. 다음 세대가 나약하거나 게으르지 않다면 뭔가 잘못된 것이다.

 

 

 

베이비붐세대가 1950년대에 평온한 어린 시절을 보낸 덕에 훗날 혁명의 주역으로 성장했다면, 오늘날의 20대 세대는 마약, 이혼, 생활고의 시기를 겪으며 자랐다. 그들은 사실상 알아서 컸다. TV프로그램이 부모의 양육을 대신했고, 도널드 레이건 대통령은 현실판 로저스 아저씨로 등장하여 고뇌하는 청년들을 위로했다. 레이건이 던진 메시지는 “문제는 나중으로 미루면 된다”였다. 오늘날 청년들의 가장 큰 특징은 위험, 고통, 급격한 변화를 피하고 싶어 한다는 것이다. 그들은 자신의 잘못이 아니라 앞 세대가 떠넘겼다고 생각하는 인종갈등, 노숙자, 에이즈,가족 해체, 연방 재정 적자 등 사회문제로 머리가 마비될 지경이다.
베이비 붐 세대는 오만한 이기심으로 비난받을 때면, 자신들이 종전의 주역이었다고 강조하려 했다. 훗날 밀레니얼 세대는 자질과 관련해 비난받을 때면, 실제로 자신들을 앞 세대보다 더 적은 보수를 받고 더 열심히 일한다고 반박하곤 한다. 무심하다는 평가를 들을 때 X세대들의 가장 흔한 반응은 이에 발끈할 의욕도 없을 만큼의 무심함이었고, 이는 무심하다는 세간의 평가를 자신들도 본의 아니게 인정한 셈이었다. 그들에게 온갖 두려움이나 걱정은 늘 따라다녔고, 저항은 소용없는 짓이었다.

 

90년대 ‘변절’이라는 용어의 쓰임과 중요성은 절정에 달했다. 이 용어는 단순히 어떤 사람이 부자가 되기 위해 무언가를 팔려고 한다는 의미가 아니었다. 그 사람이 어떤 피상적 가치를 위해(대개 돈을 가리키지만 돈에만 국한되지는 않는다) 초심을 버리고 타협한다는 의미를 내포했다. 상업성을 추구하는 모든 행위는 차등적으로 등급이 매겨졌으며 이익 추구를 가장 철저히 따르는 사람일수록 가장 혹독한 처벌을 받았다. 팬들의 신뢰를 얻기 위해 한결같이 타협을 거부하는 절개는 아티스트들에게 필수 덕목이었다. 다른 사람에게(특히 생면부지 사람들에게)사랑받으려는 솔직한 욕망은 처절하고 한심하다고 비쳤다. 그래서 자신의 페르소나를 바꾸거나 온화하게 행동하는 사람은 모두 가식적이고 나약하다고 여겼다.(당시의 기준은 지금으로보면 연예인병, 진지병과 다름이 없다..)
이는 이익 추구가 불가피한 성인의 현실을 무시하는 이런 비판은 10대의 정신 수준으로 이해되었다. 그리고 혁신과 야망을 깎아내리고, 논지에 일관성이 거의 없는 위선으로 가득하다는 비판을 받았다. 그건 패자의 게임이었고 누구나 이를 알고 있었다. 하지만 ‘여전히 멈출 수 없는’ 패자의 게임이었다. 한동안 사람들은 집단적으로 인지 부조화에 빠졌다. 변절을 심각하게 받아들이는 것도 미련한 짓이었지만, 변절 행위는 여전히 용납할 수 없는 것이었다(과거 우리나라에서 가수가 예능에 나온다거나 본업 외의 무엇(예: 과거 윤종신처럼 가수출신이 연기나 개그에 도전했던 것)을 하는 것과 비슷해보인다)

 

우리는 어떤 사건은 ‘생중계’로 시청하면 마음에 더 깊이 각인된다고 생각하는 경향이 있다. 물론 이론상으로는 그렇다. 그러나 걸프전은 정반대의 결과를 낳았다. 마치 캐릭터 전개가 없는 컴퓨터 그래픽 액션 영화처럼, 스토리는 폭발과 동시에 증발했다. 방송 영상은 날 것 그대로 생중계되었지만, 어떤 장면이 방송될지는 국방부에 달려 있었다. 다시 말해 날것으로 보였지만 은근히 조작된 셈이었다.
시청자 눈에는 이라크와 미국의 사상자 모습이 거의 보이지 않았다. 마치 로봇이 거둔 전략적 승리 같았다. 건물이 파괴되고 민간인이 희생되는 와중에도 전쟁에 대한 뚜렷한 감정적 요소가 없었으며, 이는 내러티브의 부재를 의미했다. 미국 시청자들은 스토리텔링의 과정을 거쳐 세상을 이해하는 데 익숙하기 때문에 스토리 없는 전쟁은 그들의 기억에 남지 않았다.

 

1993년 미수에 그친 세계무역센터 폭탄 테러 시도는 테러범이 목적을 달성한 2011년 테러에 묻혀 버렸다. 1993년 슈퍼스톰도 2005년 1,800명이 사망하고 뉴올리언스 주민 전체가 대피했던 허리케인 카트리나의 피해와 비교하면 이제 사소해 보인다. 이렇게 기억이 희미해지는 것은 사람들의 관점과도 일부 관련이 있다. 1993년에는 현실을 한 개인 자신에게만 일어나는 일로 바라보는 경향이 더 강했다. 역사는 개인의 경험으로 이루어진 총체였다.

 

 

<Smells Like Teen Spirit>이 처음 나왔을 때는 당연히 가사의 유래와 의미, 전달하려는 메시지에 대해 알려진 정보가 없었다. 이러한 신비감은 나중에 와서 보니 중요한 역할을 했다. 노래 중간에 커트 코베인은 “뭐, 어쨌든, 신경 꺼(Oh well, whatever, never mind)”라는 가사를 건조하게 읊조린다. 다른 시대였다면 조롱받기에 충분했을 이 가사는 이제 막 싹트고 있던 X세대에게 격언이 되었다. 사실상 코베인은 지적 무관심의 창시자였다. 그는 “부정(A denial)”이라는 단어를 아홈 번 연속 절규하며 곡을 마무리한다. 무엇을 부정한다는 뜻일까? 설명된 바 없으니, 더욱 절절하게 들린다. 이 곡은 의미 없음이 오히려 워낙 특별한 의미로 다가온 나머지, 본의 아니게 모든 것을 의미하게 되었다.
<Nevermind>는 훗날 누적 판매량 1,000만 장을 돌파하게 된다. 그보다 한 달 앞서 발매된 펄 잼의 <Ten>은 결국 13,00만 장이 팔렸다. 음반 판매가 중요했던 밴드들로서는 90년대가 그들의 전성기였고, 또 앞으로도 그렇게 기억될 것이다. 그러나 그 성공은 역사적으로 잘못된 방향으로 나아갔다. 모든 당사자들은 눈치채지 못하고 있었지만, 더 중요한 현상이 공공연하게 벌어지고 있었다. 하나의 장르가 아닌 청년 문화의 추동력으로서, 록 음악은 필연적으로 종착역에 다다랐다. <Nevermind>이후 무수한 록 앨범이 쏟아져 나왔지만, 그 어떤 앨범도 <Nevermind>가 음악 외적으로 남긴 중대한 영향력에 견줄 수 없었다. 너바나의 음악이 지닌 모순의 미학이 세상을 지배하면서 이데올로기로서의 록은 지배권을 잃었다. 그러나 대부분 사람들이 이를 깨닫기까지는 15년이 걸렸다.

코베인은 너바나 B사이드 모음 앨범의 속지에 “나는 이미 완전히 소모된 청년 록 문화를 상업적으로 이용해 먹은 것에 일말의 죄책감도 느끼지 않는다”라고 썼다. 직전 25년 동안 록 음악은 과대 포장된 환상의 세계에서 번성했고, 소수의 비주류만이 여기에 의문을 제기했다. 그러나 이제 그 비주류도 환상의 세계에 진입했다.
라디오헤드의 톰 요크는 자신에게 “찌질이”라는 닥지를 붙였다. 스매싱 펌킨스의 빌린 코건은 자신이 “무쓸모”라고 노래했다. 1994년 자기 비하는 일종의 철학적 사조가 되었다. 그것은 허울일 때가 많았고, 슈퍼스타들이 스스로 얼마나 자기혐오에 빠져있는지 팬들에게 설득한다는 점에서 다소 엉뚱한 면도 있었다. 아무리 훌륭한 노래라도 록 음악에는 더 이상 특별할 게 없었다. 소위 록스타가 되는 것도 부끄러운 일이었지만, 록스타로 행세하는 것은 더욱 나빴다. 이는 웃음거리가 될 뿐이었다.

 

코베인은 자신이 그토록 되고 싶지 않았던 타블로이드 스타가 되었고, 다른 사람들에게 비치는 자신의 명성을 감당할 수 없었다. 그가 자신이 원하는 아티스트가 되기 위해서는 어떤 면에서 청소년 시절의 연약했던 모습 그대로 남아야 했다. 코베인이 자신의 본모습을 잃어버려 견디기 못했다면, 투팍의 삶은 반대였다. 투팍은 아티스트로서 자신의 캐릭터에 맞추기 위해 스스로 본모습을 버렸다. 이미지가 가짜라면 자신의 작품도 힘을 잃는다고 생각했기 때문이다. 그리고 그 이미지는 그를 극도의 폭력적인 삶으로 인도했다. 투팍의 고교동창 베키모싱은 일간지 인터뷰에서 “(래퍼로서 그의 페르소나는)내가 알던 사람과 전혀 달랐다. 나는 솔직히 그가 자신에게 주어진 역할을 연기했다고 믿는다”라고 말했다.

 

 

타란티노는 1994년 BBC와의 인터뷰에서 이렇게 말한다. "할리우드에서 활동하다 보면 이 바닥이 자기 주관을 거의 믿지 못하는 사회라는 것을 금세 터득하게 된다. 사람들은 남들에게서 의견을 구하려고 한다. 무엇이 좋고 무엇이 안 좋은지 가려내기 위해서 말이다. 하지만 이제 내가 등장했다. 나는 통달의 경지에 오른 영화광 film geek이다. 내 의견이 ‘전부’다. 당신들의 의견이 모두 나와 다를지라도, 난 상관없다."

한동안 이러한 기류는 어디에나 있었다. 90년대는 자유분방한 창작력을 마음껏 펼치는 천재 감독들이 대거 배출된 기간으로, 기존의 틀과 관습에서 벗어나 창작자의 내면이 세련되게 반영된 영화로 가득 찬 놀라운 10년이었다. 대니보일의 <트레인스포팅 Trainspotting>, 포르노 세계의 실화를 각색한<부기 나이트 Boogie Night>, 제인 캠피온의 <피아노 The Piano>,빈센트 갈로의 <버팔로’66 Buffalo’66>, 난해한 작품<존 말코비치되기 Being John Malkovich>도 있었다. <처녀 자살 소동>, <파이>,<메멘토>, <뱀부즐리드>..그들이 만든 세계는 현실 같았지만 현실 자체와 치환될 수는 없었다. 현실에 적용될 수 없는 고립된 세계로 관객들에게 비치고 여겨져야 했다. 거듭 말하지만, 영화는 영화일 뿐이었다.

 

먼 미래에는 인터넷의 급부상이 90년대의 유일한 업적이라고 생각할 수도 있다. 산업혁명이 50년 넘게 전개된 반면, 인터넷 혁명은 10년이 걸렸다. 이 급속도 변화로 대중은 세 갈래로 나뉘었다. 1995년에 이미 중년에 도달한 사람이라면 인터넷을 완전히 무시해도 좋은, 그저 현대성의 흥미로운 부산물로 볼 것이다. 그들에게 인터넷은 필수도 의무도 아니었다(A그룹). 또 다른 집단은 1985년 이후에 태어난 사람들이다(C그룹). 이들은 네트워크 컴퓨팅과 조금이나마 관련된 교육을 받은 기억이 거의 없다. 그들은 주워들은 이야기를 통해서가 아니고 순전한 아날로그 세계에 대한 개념이 없다. 성인기 이후의 C그룹은 “인터넷 네이티브”로 분류된다.

물리적 세계는 아무것도 바뀌지 않은 가운데 재구성된 현실에 적응하느라 씨름해야 했던 사람들은 중간 집단인 B그룹 뿐이었다. 이러한 낀 세대(베이비 붐 세대와 X세대)는 인터넷 이전 세계와 이후 세계를 온전히 기억하면서 이 변화를 몸소 경험한 유일한 사람들이 될 것이다. 마이클 해리스는 저서 <우리에겐 쉼표가 필요하다>에서 “우리가 역사상 인터넷 이전의 삶을 아는 마지막 인류라면, 한마디로 인터넷 이전과 이후의 두 언어를 모두 말할 수 있는 유일한 세대가 되기도 한다. 우리는 인터넷 시대 전후에 유일하게 능숙한 번역가다”라고 썼다.

 

소위 평범한 90년대 삶을 사는 소위 평균적 90년대 사람들에게 일상에서 전화와 인간의 관계만큼 급변한 건 없었다. 중요한 건 19990년에 미국인 중 단지 430만 명이 휴대전화를 가지고 있었다가 2000년에 그 인구가 9,700만 명으로 불어난 사실이 아니다. 그보다 사람들이 전화를 대하는 심리가 훨씬 크게 변했다.
1990년에 사람들이 전화벨을 무시하는 빈도가 얼마나 드물었는지 보여주는 통계는 없다. 이런 질문을 아무도 제기한 적이 없었을 것이기 때문이다. 전화벨을 무시하는 것은 상상도 할 수 없는 일이었다. 우선 옛날 다이얼식 전화기의 벨소리는80데시벨로 설정되어 2층집 기준으로 모든 방에 들릴 수 있었다.다른 예로 자동 응답기가 없는 전화는 발신자가 포기할 때까지 끊임없이 울렸다. 전화벨소리를 ‘멈추려면’ 전화를 받는 수밖에 없었다.
그러나 모든 사람이 항상 전화를 받는 가장 큰 이유는 누가 전화를 걸었는지 알 수 없기 때문이었다. 벨이 울린 모든 전화는 잠재적으로 인생을 바꾸는 사건이 될지도 모를 일이었다. 전화를 받아보기 전까지는 한 통 한 통이 똑같이 중요했으므로, 놀라우리만치 평등주의에 충실한 장치였다.

휴대전화가 없던 세상이 더 즐거웠다고 주장하기도 쉽지만, 동시에 더 열악했다고 주장하기도 쉽다. 그때는 거의 붙박이 생활이었다. 현대인들은 요즘 스마트폰 중독 현상을 걱정하지만, 유선 전화를 쓰던 시절에 훨씬 일상의 제약을 받았다. 중요한 전화를 받아야 할 땐 거실에 앉아 하염없이 기다려야만 했다. 다른 방도가 없었다. 누군가를 찾아야 하는데 어디에 있는지 모른다면 그 사람이 올 때까지 기다려야 했다. 따라서 사람들은 서로를 믿어야 했다. 전화로 약속을 잡고 집을 나갔다면 그 약속은 변경될 수 없었다. 모든 사람이 약속된 시간과 장소에 나타나야 했다. 약속 장소를 조정하지 않는(그리고 조정할 수도 없는)기계에 의해, 사람들의 생활은 융통성을 별로 발휘하지 못하고 마치 각본처럼 움직여야 했다.  

 

 


인터넷은 전통적으로 돈이나 지위로만 극복할 수 있었던 제도적 장애물을 근절할 테고, 이 과정은 문화 전체를 민주화할 것이었다. 이제 현실과 달리 가치 중립적 능력주의가 좌우하는 세계가 가능해지거나 가능해지리라 믿어졌다. 1994년 <타임> “인터넷이라는 이상한 신세계”라는 불길한 제목의 커버스토리를 실으면서 잠재적 혼란을 은연 중에 경고했다.

[인터넷은 중앙 명령 체제의 권한 없이 구축되었다. 다시 말해 소유자도 운영자도 없으며 아무도 누군가를 영원히 쫓아낼 수 없다. 비상시 차단할 수 있는 마스터 스위치조차 없다. 미군 컴퓨터에 침입하려던 독일 스파이를 붙잡아 유명해진 버클리대 천문학자 클리포드 스톨은 “인터넷은 지금껏 존재했던 진정한 무정부 상태와 가장 가깝다”라고 말했다.]

 

현대 버전의 인터넷이 시작된 시기는 전반적으로 1990년대라는 게 정설이다.사람들이 인터넷의 장단점에 대해 설명할 때마다 대개 90년대에 전혀 일어나지 않은 경험을 설명하는 경우가 많다. 또 여러 고정관념들(정치와 사회 조직의 개편, 청소년의 일상 변화, 연결과 소외를 동시에 일으키는 모순성..)은 실상 90년대에는 전혀 해당하지 않고 거의 전적으로 소셜미디어의 확산과 더 관련이 있는 것이다. 페이스북은 2004년에야 시작했고 트위터는 2006년 인스타그램은 2010년에야 개시했다. 초창기에 인터넷이 사회를 재창조할 것이라는 가정과 시나리오도 21세기에 들어서야 이해할 수 있게 되었다. 인터넷의 힘은 워낙 압도적이고 절대적이게 되어, 이제는 실제보다 더 오래 존재한 것 같고, 현재에 이른 인터넷의 모습은 원래부터 늘 그랬던 것처럼 보인다.

 

야구에서 90년대 후반은 동시대 발생한 다른 모든 사건을 무색하게 할 만큼 스테로이드 시대로 영원히 정의될 것이다. 1998년 미국은 스포츠 역사상 가장 놀라운 홈런 경쟁에 사로잡혔다. 간결한 스윙에 극기심 강하고 덩치좋은 세인트루이스 카디널스의 마크 맥과이어(Mark McGwire)는 70홈런을 기록했다. 그는 여름 내내 도미니카 공화국 출신 매력남인 시카코컵스의 새미 소사(Sammy Sosa)에게 쫓기는 입장이었다.
맥과이어와 소사는 야구의 부흥을 일으켰다. 나중에 두 사람 모두 경기력 약물을 사용했다는 사실이 밝혀졌을 때, 이해할 수 없다기보다 실망스럽다는 반응이 더 컸다. 배신감을 느낀 팬들도 있었지만, 대부분은 그저 바보가 된 기분이었다.
맥과이어는 야구 역사상 가장 위풍당당한 풍채의 타자였으며 웬일인지 나이가 들수록 더 몸집이 좋아졌다. 소사는 서른 살에 아직 여드름이 있었다. 이제와서 돌이켜 보면 너무나 뻔해 보인다. 사건이 끝난 후 현명해지기 쉽다는 게 딱 이런 경우다.

 

미국 정보원들은 순진한 평면 TV판매원으로 가장해 모스크바로 이동했다. 옐친은 정략적으로 대대적인 친서방 이미지로 변신해야 했다. 따라서 네거티브 전략으로 가야했다. 그들은 두 가지 계획을 세웠다. 1992년 미국 대선 기간 부시의 모든 언행을 분석하고 무조건 이와 반대로 행동하는 것이었다(옐친과 마찬가지로 부시도 자신이 인기없는 대통령이라는 사실을 받아들이지 않았다). 더 미묘한 나머지 전략은 러시아 국민이 원하는 것 대신 배급제로의 회귀, 내전 가능성, 사회적 불안 등 그들이 두려워하는 것에 초점을 맞추는 것이었다.
선거개입에 대해 미국은 러시아 대선 결과에 국익이 얽혀있고, 옐친이 민주주의의 확장이라는 희망을 걸기에 최선의 후보였으며, 피 흘리지 않고 국제 정책의 성과를 내는 것이 외교의 본질이라는 입장을 표명했다. 그것은 음모가 아니라 계획이었고, 그 계획은 효과가 있었다. 단지 우리가 기억하고 싶지 않은 계획이었을 뿐이다.

 

90년대 복제에 대한 불안은 거의 전적으로 매스 미디어의 영향에 따른 결과물이었다. 돌리의 탄생 이후, 빌 클린턴 대통령은 “우리의 이상과 사회의 핵심에 있는 가족의 신성한 유대를 위협할 가능성이 있다”라며 인간 복제를 금지하는 입법 계획을 발표하지 않을 수 없었다. 이 선언은 어떻게 보면 보이지 않는 뱀파이어를 금지하는 법안을 발표하는 것과 전혀 다를 바 없었다.
돌리의 탄생은 인간 복제의 이론적 가능성을 의미했을 뿐이며, 이론적 가능성이야 원래 늘 있어왔다. 농업 분야에 대해서 사회는 그동안 품종개량 개념을 전혀 거리낌 없이 받아 들여왔다. 즉 두가지 식물이나 동물의 바람직한 특성을 동시에 지닌 품종을 생산하기 위한 의도적인 재배와 사육은 이미 수천 년 동안 계속되었다. 일란성 쌍둥이는 거의 100% 동일한 DNA를 공유하며, 자연스럽게 발생한 복제에 해당한다. 그러나 ‘복제’라는 단어를 사회가 받아들이는 의미는 줄곧 십중팔구 부정적이었다. 이는 돌리가 탄생하기 전이나 후나 마찬가지였다. 돌리가 실험실에서 태어난 사건은 단순히 그러한 불안이 확대되고 가속화된 과정을 보여주는 변곡점 역할을 했다.

 

10년동안 방영된 <프렌즈>는 웨스트빌리지에 사는 남자셋, 여자셋(아하 여기서 우리나라의 시트콤 제목이 그대로 탄생한다..1996~1999방영)의 여섯친구가 등장한다. 1994년 첫 방송 당시 등장인물들은 24~27세로 설정되었지만 겉모습은 좀 더 나이들어보였다. 반면 종영될 무렵 극중 인물들은 34~37세쯤 되었겠지만, 배우들은 좀 더 어린 듯 행동했다. 정신연령은 모두 영원히 29세에 머무른 듯 했다.
이 시리즈는 가족보다 우정을 더 중요시하고 아직 자신의 가정을 꾸리지 않은 ‘어중간한’ 성인기의 고민을 다루었다. 이는 미국인들이 결혼을 미루고 성인으로서의 전통적인 책임감을 떠맡기를 거부하기 시작하던 몇몇 사회적 추세를 뚜렷이 반영하고 있었다. 하지만 <프렌즈>는 단순히 20대 시청자를 끌어들이겠다는 의도로 만든 프로그램이 아니었다.
<프렌즈>는 특정 세대의 존재를 직접적으로 드러내지 않고 그 세대의 관심사를 정확히 짚어 낸 본보기였다. 이 시리즈의 분위기가 갖는 특징은 시대를 초월한 보편적 프리즘을 통해 현재를 묘사했다는 점이다.

 

 

다른 여배우가 주연을 맡았더라도 여전히 <타이타닉>은 성공했으리라고 상상할 수 있다. 하지만 레오나르도 디카프리오 없는 <타이타닉>의 성공은 상상이 가지 않는다. <타이타닉> 이후 전례없이 상승한 그의 주가는 서로 다른 두 가지 현상의 산물이었다. 그는 할리우드라는 거대한 단일 시스템에서 슈퍼스타에 오른 마지막 배우이자, 새로이 부상하던 포스트모던 시대에 유명인사가 된 최초의 배우였다. 그는 언제까지나 이 두 가지 현상을 동시에 겪은 유일한 인물로 남을 것이다. 언론 기사들은 사람들이 레오나르도 디카프리오에 대해 그토록 열광하는 이유를 설명하는 데 지면을 할애할 수 밖에 없었다. 어린 팬들이 <타이타닉>영화 티켓을 사고 디카프리오를 보는 게 아니라, 디카프리오를 보려고 티켓을 샀다가 어쩌다 그 영화가 <타이타닉>이 된 셈이었다(바로 내가 그랬다..!길버트그레이프의 그 소년이 동일인물이라니 성형수술이라도 한 건가 싶어 오로지 엄청난 궁금증과 호기심 (그리고 가장 큰 팬심으로) 중1 그 어린나이에 극장에서만 세 번,을 봤다).
역사상 가장 크게 성공한 영화보다도 그의 존재감이 더 컸다. 그리고 여기서 주목할 점은 그 성공 자체보다도, 이렇게 어마어마한 인기를 얻고 유지하기 위해 디카프리오가 무엇을 했느냐다. 답은 거의 아무것도 하지 않았다는 것이다.

<타이타닉>에서 가장 흥미로운 한 가지는 어떤 메시지도 표현하지 않겠다는 목표에 철저히 집중했고, 그래서 그때나 지금이나 재미있다는 점이다. 이 영화는 관습을 전혀 깨지 않았다. 계급 간의 역학은 원시적이고 통찰력이 없다. 캐릭터는 (기껏해야)2차원의 전형이다. 가장 감동을 극대화할 시퀀스는 컴퓨터 작업으로 만들 수 있다. 영국 연극영화학 교수 숀 쿠빗의 말마따나 <타이타닉>은 무엇보다 기술적 측면을 중요시한 현실 도피성의 “신바로크”영화였다.그들의 역할은 어차피 피할 수 없는 결말을 마무리하는 것뿐이고, 유일한 임무는 배와 함께 가라앉는 것이다.
<타이타닉>에서 가장 인상적인 점은 컴퓨터 아키텍쳐다. 폄하처럼 들릴지 몰라도, 사실 칭찬이다. <타이타닉>은 모든 사람들이 항상 인정하면서도 한편으로는 완전히 받아들이기를 꾸준히 거부한 영화계의 축적된 현실을 활용했다. 어떤 사람들은 이에 도전하는 영화를 원하지만 대부분 사람들은 그렇지 않다. 연기를 관심있게 보는 관객도 있지만 배우에 관심을 두는 관객이 더 많다. 컴퓨터 그래픽으로 만든 화려한 시각적 볼거리를 영화의 오락적 요소로만 치부하는 사람도 있지만, 대부분 사람들이 그것이 그 영화의 핵심 목표라고 생각한다.
<타이타닉>은 이러한 진리를 그 시대의 어떤 영화보다 충실히 실행에 옮겼다. 카메론 감독의 오만함(시상식에서 타이타닉 속 잭의 대사인 ‘나는 세상의 왕이다!’를 인용했다->그리고 올해 25년만에 이에 대해 사과(?)했다)은 완전히 유효한 것으로 검증되었다. 그의 아이디어는 절대 끔찍한 게 아니라, 그저 고리타분했을 뿐이다. 그리고 그 덕에 <타이타닉>이 그토록 대성공할 수 있었다.

 

90년대 젊은이들이 숭상했던 대중문화는 종종 근거 없는 믿음에 기반을 두고 있었다. 바로 어린 시절에 좋아했던 것은 성인이 되어서도 항상 소중하게 남는다는 굳건한 믿음이었다. 통속적인 키치 문화로 출발해 결국 기성 문화의 전복을 상징한 70년대 대중예술(저돌적 인물의 상징인 스턴트맨 에빌 나이벨Evil Knievel, 시트콤 <굿 타임스>, 팝 밴드 아바ABBA..)은 원래부터 ‘늘’ 지금 기억되는 그대로 보이고 경험되었다고 잘못 생각하기 쉽다. 이를 단순히 ‘향수’라 하기엔 그 의식작용이 능동적이고 체계적이라는 점에서 썩 정확한 표현은 아니다. 그보다 이러한 사고의 목적은 지난날 자신이 소비한 예술의 가치를 머릿속에서 의식적으로 높임으로써, 그 예술에 대해 한결같이 품어온 감정적 기억과 현재 가치를 일치시키려는 것에 가깝다.
그 전형적인 예가 바로 1977년 오리지널 <스타워즈>다. 팬들은 <스타워즈>를 향한 집착에 너무 많은 시간과 노력을 투자한 나머지(내게도 몇 명의 그러한 지인들이 있다..그들의 소중하고 가치있는 자신들의 보물 같은 추억이 세월이 흐른 후 이어진 몇 편의 망작들에 의해 심각하게 훼손된 것을 개탄했다), 그들의 마음속에서는 이 영화는 원래의 본질과는 완전히 딴판으로 재창조되었다. 즉, 그들에게 <스타워즈>란 성인을 위한 인간의 감정에 관한 영화였다.
1999년 <보이지 않는 위험>이 마침내 개봉했을 때, 1977년 10세의 나이에 원작을 본 사람들은 이제 32세가 되었다. 그리고 그 팬들이 본 것은 더 정교하지만 깨달음은 별로 주지 않는, 컴퓨터 특수효과로 가득 찬 원작의 느린 재탕이었다. 영화도 별로였지만, 그게 문제가 아니었다. 문제는 <보이지 않는 위험>이 팬들로 하여금 자의적으로 재구성 한 채 간직해온 추억을 깨뜨리게 하여 배신감을 느끼게 했다는 것이었다. ..
루카스는 자신이 어떤 결과물을 내놓아도 만족하지 않았을 듯한, 낯선 사람들로 이루어진 모든 세대를 만족시키기 위해 뼈 빠지게 노력했다. 그가 이렇게 인색한 평가를 받고 괴로워했을까? 그럴지도 모르지만, 썩 그렇지는 않았다. 루카스는 “팬들이 좋아하지 않는다면 유감이다. 그들은 가서 <매트릭스>를 보는 게 좋을 것이다” 라고 말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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