미술이란 삶의 경험에 상응하는 것을 창조해 냄으로써 인간 경험의 범위를 넓혀 나가는 방법이다. 미술에서는 인간 삶의 경험이 선택되고 다양화되며 반복된다. 상징의 세계에서 모든 미술적인 경험이 일어난다. 그것은 인공적인 세계이지만 진실된 정서를 불러일으키는 힘을 가지고 있다. 오히려 밀랍인형이나 조화같이 너무 진짜 같은 복제품을 예술이라고 하기는 어렵다. 이런 것들은 현실과 미술 간의 경계를 불분명하게 해서 우리를 불편하게 만든다. 반면 미술은 현실과는 동떨어진 상징의 추상적인 틀 안에서 일어나기 때문에 죄책감이나 불안 없이 편안하게 즐길 수 있으며, 그 틀 안에서 일어나는 경험들은 '실제로 저지르도록 충동질되지 않는다'. 그래서 사람들은 미술을 통해 깊은 무의식적인 내용을 포함하는 경험을 표현할 수 있게 되고, 현실에 적절하지 않다는 두려움, 방어기제가 약화될 수도 있는 모험을 한다는 두려움 없이 미술로부터 기쁨을 얻을 수 있다. 실제로 미술 경험을 통해 사람들이 억압과 부인의 짐에서 벗어날 수 있다.
미술가란 현실과 환상 사이에서 그리고 그의 본능과 초자아의 요구 사이에서 일어나는 갈등을 풀어내는 능력을 미술 작업을 통해 발전시키는 사람이라고 할 수 있다. 문화적, 사회적으로 생산적인 형태의 승화된 미술 작업을 통해서 미술가는 그의 내면의 경험을 몇 가지의 다른 수준으로 경험한다.
승화란 무엇인가
우리는 원초적인 반사회적인 충동이 사회적으로 생산적인 행동으로 변형되고, 그러한 사회적인 행동으로 인한 성취감이 원래 갖고 있던 충동에서 오는 쾌락을 대신해 주는 모든 과정을 승화라고 부른다.
우리는 본능적인 행동이 사회적인 행동으로 대치되고 이러한 변화를 자아의 승리라고 볼 때 승화가 일어났다고 할 수 있을 것이다.
모든 승화의 근원에는 본능적인 욕구의 포기가 있고, 보다 심오한 승화로 나아가는 단계들마다 보다 많은 욕구의 포기가 있어야만 한다. 그래서 모든 종류의 승화는 좌절과 위태로움의 요소를 내포하고 있다.
완전하게 기쁨을 주는 본능은 승화가 될 수 없다. 오직 본능의 원래 목적이 부인되고 방해받을 때만 그 고유한 힘이 새로운 목적을 위해 쓰여질 수 있다.
승화란 어떤 본능적인 목적이 직접적인 만족을 추구하는 것을 부인하는 과정이다. 원래의 목적은 새롭고 사회적으로 생산적인 목적으로 바뀌며, 그 과정은 억압과 새로운 행동 창출을 포함하고 있다. 사회적으로 바람직한 수행에서 오는 만족은 본능적인 쾌락을 대신한다.
승화를 정의하는 데에 있어서 나는 사회적으로 '받아들여질 만한' 행동이라는 말보다는 사회적으로 '생산적인' 행동이라는 말을 더 선호한다. 승화된 행동의 결과라고 할 수 있는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에서의 죽음, 소크라테스가 악법도 법이라고 받아들인 죽음, 렘브란트의 그림, 인사파 화가들의 그림들 모두 처음에는 그들이 속해 있는 사회에서 '받아들여지지' 않았었다.
승화는 초자아와 본능의 요구를 중재하는 '자아의 가장 효과적인 수단'이 된다. 숨겨진 성적, 공격적 욕구가 사회적으로 생산적인 활동으로 바뀌어 만족을 얻는 과정을 통해 자아가 초자아적 구조를 형성하게 되고, 이에 따라 쾌락도 초자아의 인정을 받는 것이 가능해진다. 즐거움은 초자아와 이드(id 본능)모두에서 얻어질 수 있는데, 이 두 힘은 대개 양립할 수 없는 것들이다. '초자아와 이드의 조화'는 정지되어 있는 것이 아니다. 그것은 갈등하는 힘들 사이에서 '끊임없이 균형을 잡아야 하는 과정'이며 이 과정에서 많은 양의 에너지가 소모된다.
승화를 통하면 내면의 불안이나 위협 없이도 만족을 느끼는 것이 가능하다. 이 조화로운 상태를 달성하는 것은 자아의 가장 큰 승리라고 할 수 있다. 초기 아동기에 승화를 경험하기 어려운 상황에 놓여 있었던 아이들이나, 나중에 자라서 신체적으로 혹은 정신적으로 승화를 할 기회를 박탈당한 사람들이 느끼는 좌절감은 본능적인 쾌락을 부정하는 것만큼이나 심각하고 고통스러운 증상을 만들어낸다. 모든 긍정적인 인간관계는 본능적 행동을 어떻게 조절하느냐에 달려있다.
요안나: 속에 시커먼 것(?)을 저질러버리는데도 쾌락이 있다. 예를 들어 한 아이가 블럭 장난감을 집어던지는 자체도 쾌락이 있지만 그렇게 던져버리지 않고 블럭으로 탑을 만들거나 자동차를 만드는 과정에서 즐거움을 느낀다면 승화가 일어났다고 할 수 있다.
(관련한 다른 얘기) 소확행이 주는 즐거움이 분명 있다. 소확행이 나쁘다는 것이 아니라 소확행만 추구해서는 대확행을 기회를 잃어버리게 된다. 시간이 없기 때문이다. 모든 쾌락의 끝은 허무다. 예를 들면 티비 예능을 보면 맥주 한 캔을 따 마실 때의 즐거움이 분명 있고 우리에게 필요하다. 그러나 '그것만 추구해서는' 그 결과가 허무할 수 있다. 승화 또는 대확행으로 인한 기쁨과 만족은 힘들지만 그런 소소한 쾌락이 주는 만족에 비할 수가 없다.
자신의 생각, 감정, 행동 그리고 공격성을 미술로 표현하는 것, 예술로 변화된 것 자체가 개인의 충동이 사회적인 행동으로 전환이 이루어진 것이다. 친구를 때리고 싶은 심정을 그대로 행동으로 옮기지 않고 미술로 표현하는 것 이것이 자아의 승리, 곧 승화가 일어난 것이다.
승화로 향해가는 길을 꽃길만 걷지 않는다. 딱 때려치고 싶은 순간이 온다. 모든 가치있는 일은 쉬운 일이 없다.
본능을 다 표출하고 살면 승화가 일어나지 않는다(예: 아무 시련없이 온실 속 화초에서 자란 아이). 반대로 본능을 너무 억압하고 부인하고만 살아도 승화가 일어나기 힘들다(예: 지나치게 금욕적인 집안에서 자란 아이).
말하자면 찰랑찰랑한 해변가에 있어야 하는 것이다. 아예 산으로 들어가버려서도, 물 속 깊이 빠져버려서도 안된다. 충동이 수면 가까이 떠 있어야 이것을 잘 꺼내서 승화의 작업에 쓸 수가 있다.(종종 이 과정이 엇나갔을 때 아티스트들이 사회적 물의를 일으키는 탈선하게 된다)
너무 억압되있는 아이들은 풀어줘야 예술이 되고, 너무 제멋대로인 아이들은 틀을 잡아주어야 예술이 될 수 있다. 그 중간에 대한 감각을 유지해야 한다. 공감적 태도를 지니면서도 한계를 설정해주는(무슨 주제로 그림을 그려도 되지만, 친구를 때리거나 친구 작품을 훼손하면 안된다, 선생님을 때리면 안된다 등) warm & firm의 자세가 필요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