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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잡기] 雜記

[미술치료]미술치료사의 본질, 내담자의 변화를 일으키는 '작은 개입'/ 크레이머<치료로서의 미술>7장 제3의 손

by 돌냥 2023. 12. 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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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번 장에서는_   
크레이머의 통찰력을 통해 미술치료에서 '제3의 손'의 변화하는 힘을 탐구한다.
미술치료사들이 개인적 표현과 고객 정렬 사이의 섬세한 균형에 대해 알아보고, 버려진 작품을 보존하는 것이 방치된 아이들에게 어떤 영향을 미칠 수 있는지 알아본다.
치료의 예술적 성숙이 일상의 긍정적인 변화로 이어지는 실제 사례를 목격한다. 작은 개입으로서의 치료적 접근법이 환자 개인에게 어떠한 변화를 가져올 수 있는지를 관찰하고, 예술적 표현과 정서적 치유 사이의 깊은 연관성을 발견한다.

 

 

 

 

 

‘제3의 손’은 크레이머가 만든 은유적 표현으로, 다른 사람들에게 공감적인 서비스를 할 때 미술적 재능과 상상력을 발휘하는 미술치료사의 기능이다.

 

감정이 시각적 형태로 나타나도록 돕는 것은 미술치료의 중심과제다. 치료라는 이름으로 미술치료사가 행하는 모든 방법들은 ‘내담자의 매우 개인적이고도 진정한 자기 경험’을 ‘유익하고 회화적인 의사소통’으로 만들어내게 하기 위한 노력이어야 한다.

제3의 손은 내담자에게 비시적이면서/ 의미를 왜곡하지 않고/ 내담자의 회화적인 표현에 지나친 간섭을 하지 않으며/ 내담자에게 어울리지 않는 것을 강요하지 않으면서도/ 작품을 만드는 과정을 돕는다.

 

화가들과 마찬가지로 미술치료사는 기본적으로 그림을 그리거나 조소작업을 할 수 있고 감상할 수 있는 능력을 갖고 있어야 한다. 그러나 미술치료사는 자신의 스타일을 개발하는 것에 집중하는 화가들과는 다르며 내담자와 작업할 때 자신만의 스타일에 집중해서는 안 된다. 그는 자신의작업을 할 때에는 자신만의 회화적 목표나 비전을 추구할 수 있겠지만, 내담자와 작업을 할 때에는 반드시 내담자의 스타일에 맞추어야 한다.

 

교사나 미술치료사가 그림을 잘 그리는 것을 보면 어떤 아이들은 자기 그림을 좀 그려달라고 끈질기게 조른다. 이런 아이들은 단순히 치료사가 자기를 돕게 만드는 데 그치지 않고, 자신의 의도대로 치료사를 조종자고자 한다. ‘가르치기’라고 부르는 기술, 지식, 태도에 대한 전수는 단순한 지식의 축적을 넘어서는, 무의식적이고도 규정하기 어려운 면을 많이 지니고 있다. 기술을 익히고 진실을 발견하는 것은 무척 신비로운 기적같은 일이며 모든 교사들은 학생들에게 어떤 면에 있어서는 마법사 같은 존재로 비쳐진다.

 

방임된 아동이 창의적 작품을 만드는 데 있어서 큰 장애물은 ‘실패에 대한 참을성’이 부족하다는 것이다(..그 아동이 바로 나였다). 아주 사소한 실패조차도 그 아동에게는 그 동안의 모든 수고가 수포로 돌아갔다고 받아들여지곤 한다(나나나나나 지금도 조금은 그렇다). 미술치료사의 중요한 임무 중 하나는 별 것 아닌 이유로 인해 버려지는 작품들을 ‘구해내는’ 것이다. 실수는 다시는 돌이킬 수 없는 것이 아니며 미술치료사는 언제든지 도울 준비가 되어 있다는 것을 몇 번이고 반복해서 주지시켜 주어야 한다.

방임되면 발달이 더뎌질 수 있고 p.87의 9살 재키처럼 난화 수준만을 그릴 수 있다. 크레이머는칠면조를 그릴 수 없는 수준의 재키에게 먼저 접시(동그라미)를 그리게 하고 그 위에 칠면조를 그려주었다. 그리고 재키는 감자와 야채(동그라미를 응용)를 그렸다. 여기에 힘입어 재키는 다른 여러가지를 그려냈으며 굉장히 열심히 색칠해서 예전보다 훨씬 잘 그린 것처럼 보였다. 그리고 그림에서 성공을 하자 재키의 행동도 변화하였다. 그는 덜 까다롭고 협조적이 되었고 크게 화내는 일과 욕하는 일이 없어졌다.

 

10살(도식기에서 사실기로 넘어가는 과도기의)프랭크는 엄마가 가출했고, 아빠는 프랭크를 보육원에 맡기고 떠났다. 프랭크에게 있어 엄마는 나쁜 사람이고 아빠만 유일한 가족이었는데 어느날 부터 아빠는 오지 않고, 살 곳을 장만한 엄마만 보육원에 정기적으로 찾아오고 잘해주었다. 악인인줄 알았던 엄마는 잘해주고 세상 의지했던 아빠는 더 이상 자길 안쳐다보는 그런 혼란스러운 상태를 프랭크가 성숙하게 받아들이긴 아직 이르고, 그렇다고 과거 부모를 이분법적으로 보던 사고는 더 이상 아닌 것은 알겠지만 실제 받아들이긴 어려운 그런 애매한 상황-미술치료실에서의 상황과 동일한 상태에 프랭크는 놓여있었다.

역사에 남을 만한 어느 날 오후 프랭크는 로켓을 그리고 있었다. 로켓 바깥 부분에 그린 태양이 로켓의 가장자리로 번졌고, 프랭크가 태양이 로켓을 녹이고 있다고 외쳤다. 크레이머는 흰색 물감을 로켓의 가장자리에 진하게 칠했다. 회색 로켓 위에 칠해진 흰색물감은 배경과 로켓이 떨어져 보이게 했고, 프랭크가 다시 그 위에 주황과 빨강색을 칠하면서 로켓 표면은 자연스럽게 태양빛이 반사된 것처럼 보이게 되었다. 마침내 어른스러운 그림을 그리게 되었다고 느낀 프랭크에게는 큰 변화가 일어났고, 어머니를 좀 더 많이 받아들이기 시작했다.

미술치료 과정에서 그림에서 성숙해지면 일상에서도 성숙해지는 것으로 연결될 수 있음을 잘 보여주는 사례다.

 

적개심과 학대 증상을 갖고 있고, 늘 먼저 사람들이 자기를 때리도록 만드는 욕구를 가진 레이몬드에게 크레이머는 위로를 주고자 커다란 주먹을 그리게 하였다. 그러자 다른 아이들도 이에 합세해 피로 물든 눈을 때리는 주먹을 그렸으며 미술 시간은 야단법석으로 엉망이 되었다. 이는 레이몬드의 동정 받고 싶어하는 욕구와 다른 아이들에게 수용받고자 하는 욕구를 만족시켰으며, 결과적으로 내담자의 정서적 퇴행을 일으킴으로써 치료적으로 위험한 경험이 되었다.

 

베라 질저라는 미술치료사는 ‘작은 변화를 주기(small changes)’라고 부르는 미술치료를 하고 있었다. 이것은 환자가 작업을 하다가 도저히 할 수 없는 부분이 있을 때 환자의 원래 의도와 주제를 해치치 않는 범위 내에서 미술치료사가 조금만 도와주어 작품을 완성하는 것이다.

질저는 20대 만성 조현병 환자인 애덤의 치료를 맡게 되었는데 그가 그려낸 불사조는 종이 끝부분에서 꼬리가 그려지지 못한 채 잘려져 있었다. 질저는 더 큰 하드보드지 위에 그 그림이 그려진 종이를 붙였다. 새 꼬리가 연상되는 부분을 질저는 아주 희미하게 그려주었다.

 

처음에 그가 그린 그림을 단순히 칭찬하고 받아들이는 것은, 미술치료사를 포함한 모든 사람이 그에게 어떤 변화가 있을 것이라는 희망을 버리는 것과 같다. 미술치료사는 말보다는 상징적인 방법(제3의 손)으로 환자를 지지해 줄 방법을 찾아야만 한다.

 

잉크 반점으로 얼룩진 우편물이 주는 공격성, 무기력하고 열등한 익명의 존재들로 그려진 워크숍 안내 그림의 예시처럼 미술치료사에게 있어서 미술적 이미지를 이해하지 못하는 것은 대강 얼버무려질 수 있는 문제가 아니다.

 

미술치료사라는 직업을 가지는 동안 우리는 우리 자신에게 묻고 또 물어봐야 한다. 우리가 담당하는 내담자들이 보다 나아지기 위해서는 각자의 미술 작업에 어떤 변화가 일어나야 하는가? 그러한 변화를 향한 작은 첫걸음이 될 수 있는 것은 무엇인가? 미술 작업을 하는 데 있어서의 조그만 개입이 그러한 변화를 일으킬 수 있는가? 있다면 그것은 무엇인가? 이런 종류의 질문들은 명확한 답이 있는 것이 아니므로 우리는 반드시 여러 상황에 대비해서 항상 준비가 되어 있어야만 한다.

 

 

요안나: 

-아이들 미술 작품의 퀄리티를 좌우하는 것은 스킬이 아니다. 이 작품을 얼마나 몰입해서 정성껏 했느냐에 달려 있다. 그리고 반복이다. 같은 그림을 그리는 것을 부모들이 싫어하곤 하지만 건강한 욕구와 작가의 선택(재키처럼)이 그렇다면 반복을 통한 승화는 전혀 문제될 것이 없으며 오히려 필요하다. 그림에서 변화하면 실제 행동도 변화하고, 치료실에서 변하면 일상에서도 변화한다.

 

-질저는 애덤의 그림에 대해 그 정도로 충분하다 잘했다로 멈추지 않았으며 애덤이 더 해낼 수 있다는 것을 깨닫게 해주었다. 우리의 미술교육이나 미술치료도 그렇다. 무조건 내담자에게 너무 잘했어 라고 칭찬하지만 사실은 더 할 수 있는 상황들이 있다. 현재 상태에 인정하고 감사하고 하지만 더 할 수 있어라는 한계를 넓혀주는 것과 지금 너무 잘했어 그리고 끝.은 서로 너무 다르다.

 

-아이들이 스스로 선택해서 노는 것과 교육에서 잘못된 방식(특히 공격성을 조장하는)을 아이들에게 수행하게 하여 결과적으로 퇴행을 야기하는 것은 전혀 다르다. 무엇이 되었든 결과적으로 내담자의 심리를 조종하게 하는 모든 시도는 위험할 수 있다.

 

-승화는 에너지가 공격적 에너지(때리거나 찢거나 던지거나)가 아닌 중화된 에너지를 쓰는 것이다.

 

-(그림을 통한 언어와 대중과의 소통에 있어서)적어도 미술치료사라면 그림의 힘 그리고 ‘이미지가 주는 해악’ 여부에 대해서 깨어있어야 한다.

 

- 재키에게 크레이머가 칠면조와 접시를 그리게 한 것처럼 그림을 자꾸 고치느라 그림을 완성시키지 못하는 사람에게 제한된 시간에 그림을 그릴 수 있도록 돕는 것처럼 미술치료사는 적절한 변화로의 개입에 대해 준비가 되있어야 한다.

 

-미술치료사의 작업의 본질에 대해 비유해서 설명해보자. 된장찌개의 핵심은, 본질은 ‘된장에 물을 넣고 끓이는 것’이다. ‘맛있는 된장’찌개가 목적이라면 감자 버섯 애호박 배추 멸치육수 소고기 새우 다시다 소금 고춧가루 마늘 청양고추 전복.. 얼마든지 가능하다. 일상의 문제를 가진 내담자가 미술치료실에 오면 동일한 문제가 수업시간에도 나타난다. 작품완성을 못하거나 산만하거나 집, 학교에서도 같은 현상이 나타나는 경우 미술치료 시간에 행동이 바뀌면 다른 현장에서도 바뀔 수 있다. 그러므로 끝까지 묻고 또 물어야 한다. A B C D.. 어떤 방법이든 바뀔 때까지 시도해본다. 시간이 걸리더라도 본질을 꿰뚫으면 찾기는 찾게 된다.

운전면허연습장에서 잘하면 실제 도로에서도 잘할 확률이 높아지는 것처럼 미술치료현장에서 변화가 생기면 일상에서도 변화가 생길 수 있다. 목걸이줄을 먼저 만드는 것, 된장에 물을 넣고 일단 끓이는 것부터가 중요하다.

낮은 수준에서도 도울 수 있고, 높은 수준에서도 도울 수 있다. 내담자가 변화하게 하는 과정(본질)이 있다 보면 여러 시도와 발견 끝에 결국 가치 있는 보석이 달린 나만의 목걸이도 만들 수 있게 된다. 요지는 기법의 화려함보다 '치료 목표를 달성'하는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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