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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OOK] 풍부의 추월차선

[책]모두가 맞을, 아침 그리고 저녁<아침 그리고 저녁> 욘포세 장편소설/음미 중독 빠지게 하는 특유의 산문체/노벨문학상 북유럽소설 노르웨이문학

by 돌냥 2024. 2. 1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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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금까지 본 소설 중 가장 신기한 형식과 내용의 소설이다

 

내용은 사실 굉장히 크게 새로운 것은 없다

새로운 것이 있다면 박진감 넘치는 내용이 전혀 아님에도 숨 쉴 틈 없이 다음으로 또 다음으로 눈을 몰아붙이게 만든다

그런데 고도의 집중력을 이끌어내는 몰입감 그것이 생각 대화 모든 것을 따옴표나 마침표 등 어떤 문장부호도 없이 통틀어 집어삼킨 순수한 ‘산문들의 연결’에 의해 진행된다는 것이 신선하고 재미있다

 

1장과 2장은 왜 나누어놨는지 다 보고나서 의아했는지, 알고 보니 사건의 서사적으로서가 아니라, 간단하게는 주인공 요한네스의 탄생 전 그리고 죽음 이후를 구분하기 편하게 해 놓은 분류이다 (요한네스의 죽음 이후 다시 읽어보니 큰 감격이 있다 이 부분이 있는 것이 맞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작가는 고상한 영혼의 철저한 설계자다)

 

여하튼 알 수 없이 멜랑콜리한 도입부 때문에 첫눈에는 잘 느껴지지 않을지 모르나 이 기이하고 신선한 산문 묘사(랩도 아니지만 쉼 없이 토해내는)의 마력이란 얼마나 대단한 지, 이렇게나 '잠잠한' 내용에 이토록 강력하게 사로잡힐 수 있다는 것에 읽는 내내 계속 놀랐다

나는 작가가 한 호흡에 (한두밤을 지새워서 연속으로?)써내린 게 아닐까, 그래서 천재작가라는 소릴 듣는 것이 아닌가 싶을 정도의 섬세하고도 촘촘한 연결성이 책을 덮을 때까지 계속된다

 

초중반까지도 치매에 걸린 노인의 비극적이고 참혹하지만 알고 보면 우리 주변의 일상다반사적인 모습을 그린 것인 줄 알았는데(그 많은 복선이라기보다는 대놓고 ‘직접적인 신호’들에도 불구하고, 나는 이해력이 좀 느린 편이다) 그걸 넘어서 이미 죽은 상태에의 묘사인 것은 소설의 끄트머리까지 가서야 알게 됐다(스포)

막내딸 싱네가 화자로 바꿔지는 장면이 없었다면 그것이 교차되고 완전한 ‘사망’ 상태로 확인되기 전까지 나는 주인공 요한네스의 모든 행동거지 그가 보는 인물 장면 행동들이 ‘치매 노인’의 뒤죽박죽 된 기억, 고립된 외로움으로 인한 혼란, 적응하기 위해 쓸 수밖에 없는 다른 (치매환자만의 히스토리를 가진) 세계의 안경 이런 것들로 혼자 안타까워했다 그래서 더 슬펐던 것이 사실이다 그러나 이것이 사망이란 귀결 뒤의 현상들이라니 오히려, 풀어헤쳐진 감정들을 다시 추스르고 담을 수 있었다

 

치매가 아닐지라도 ‘호상’을 당한 요한네스가 죽음 직전 보냈던 일상에 대한 스스로의 묘사들은 환각이 아닌 실제의 것이었다

말년에 나 혼자 살게 된 사람의 일거수일투족, 말년이 아닐지라도 우리 스스로 지긋할 정도로 익숙한 일상, 작은 동작들로 세분화되는 작가의 섬세한 붙잡음은 아직 완전히 늙지도 치매에 걸리지도 사망하지도 않은 내가 요한네스의 처지에 완전한 당면한 듯한 현실감을 느끼게 했다 그것은 부인할 수도 외면할 수도 없는 늙고 아프고 혼자된, ‘성실하고 자애롭게 삶을 살아낸’ 대다수 사람들의 노년의 모습이었기 때문이다

 

작가는 독자를 향해 무언가 숨겼다가 꺼내지도 밀당하지도 않는다 그저 마지막을 향해 충실히 썼을 뿐이다 그리고 그 마지막은 내 통념 속의 소설 결말과도 다르다

해피엔딩 새드엔딩을 붙일 수 없는 진짜 ‘엔딩’이다 그래서 소설이면서도 글로 쓴 다큐멘터리 같기도 하고 어떤 면에서는 따듯한 저예산영화 같기도 하다 사실 그 어디에도 속하지 않고, 뭐라 분류해야 할 필요를 느끼지 못하기도 하다

 

그저 마음에 남은 것은 요한네스(그리고 작가의 실제 삶 또한)가 평생 바라본 바다, 배와 낚시질, 그의 일상을 지지해 주었던 커피와 담배, 사십 년 오십 년을 한결같이 버티게 해 준 좋은 지인들, 노동의 쳇바퀴를 끝내고 연금 소득의 안정적 삶을 짧지만 선물처럼 함께 보낸 아내.. 가 그에게 남긴 존재감이다 비록 그 중 그의 곁에 끝까지 있었던 것은 커피와 담배 뿐이었지만(확실히 사람보다 사물이 남는다) 지극히도 평범한 한 남자의 마지막-위대한 것을 극복한 것도, 엄청난 굴곡의 인생사를 산 것도 아닌-이 이렇게 아름다울 수 있다는 것은 분명 새로운 ‘경험’이다 자신의 삶의 일부를 반영해 낸 작가의 세계를 통해 삶을 기존과 다르게 볼 수 있게 하는 소설의 새로운 힘의 발견이다

내 삶도 분명 서글퍼지고 혼란스럽고 철저히 고독한 순간이 있겠지만 마지막은 아름다울 수 있을지 모른다는 위안이다 이것들이 현실에 대한 나의 좁은 관념, 그리고 소설 장르에 기대되는 나의 좁은 통념을 벗어나서 <아침 그리고 저녁> 이 알게 해준 새로운 경험의 신선함이 나쁘지 않았다

 

소설을 다 읽고 난 후에 '아침 그리고 저녁'이란 제목이 더없이 완벽하게 다가온다

시간의 흐름이라는, 거스를 수 없는 자연의 질서이기도 하지만, 아침 그리고 저녁만큼 오래 반복되는 일상, 또는 아침인데 금세 저녁이라는 빠른 시간의 무상함, 아니면 주인공 요한네스의 마지막 날들처럼 아내도 친구들도 모두 먼저 떠나고 아침이든 저녁이든 혼자 있는 외로운 지속인 삶이라고 느껴질 수도 있다

 

 

이도 저도 아닌 애매함이 아닌 단순하면서도 몰입이 되고 어디에도 치우치지 않고 내 삶의 잔상들을 환기시키고 그래서 여운이 오래가는, 작품이었다 

무엇보다 표현이 미사여구는 없는데 그 긴 문장의 속속들이 참 보석 같다 직접 읽어보아야 공감할 수 있는 부분이다

나도 이런 미사여구 없이 보석 같이 진실한 글을 쓰고 싶어 졌다(미사여구는 지금도 딱히 없지만..) 논리력 어휘력은 기본이고 그 이상의 영혼으로 끌고 가는 것이 소설만이 가진 에너지라는 생각이 들었다

 

+@

'.'마침표를 찍은 문장을 찾는 것은 나름의 의미가 있다. 역자는 ‘몸에서 일어나는 일들과 일상’이라는, 요한네스가 확신할 수 있는 것에만 마침표를 찍을 수 있는 문장이라고 했다.(그것이 열 번 남짓.이라고)

 

 

 

확실한 것은 , 그가 올라이이고 어부이며 마르타와 결혼했고 요한네스의 아들이며 이제, 언제라도, 조그만 사내아이의 아버지가 될 것이며, 아이가 할아버지처럼 요한네스라는 이름을 갖게 되리라는 것이다. 신이 존재하기는 하겠지, 올라이는 생각한다. 하지만 그는 너무 멀리 있거나 너무 가까이 있다. 그리고 그는 전지전능하지도 않다. 그리고 그 신은 홀로 이 세상과 인간들을 지배하지 않는다., 그래 여하튼 존재하기야 하지만, 창조과정에서 방해를 받은 거지, 올라이는 생각한다, 그리고 그렇게 생각하기에 그는 아마도 무신론자인 것이다, 그는 믿음의 서약을 지킬 수 없다, 아니 그럴 수가 없다, 그는 알고 있는 것을, 알지 못하는 척할 수도 없다, 보고도 못 본 척, 이해하고도 이해 못 한 척할 수 없다, 그리고 그가 아는 것을 말로 표현하기는 어렵다, 왜냐하면 그것은 사람의 말로 드러낼 수 없는 것이며, 말이라기보다 어떤 고민일 테니까, 굳이 말하자면, 그의 신은 이 세상에 존재하는 신이 아니다, 누군가 세상에 등돌릴 때 어렴풋이 짐작할 수 있을 뿐, 그래 이상하게, 그는 그런 식으로 한 개인은 물론 세상에 모습을 드러내곤 한다, 올라이는 생각한다, 그리고 거리의 악사가 훌륭한 연주를 할 때, 그는 그의 신이 말하려는 바를, 조금은 들을 수 있다, 그래 그럴 때 신은 거기 있다,

 

 

구두장이 야코프는 사람이 좋고 믿음이 강했다, 다른 사람은 흉내도 못 낼 만큼, 그랬고말고, 그는 자신이 믿고 싶은 것을 믿었다, 그리고 다른 사람들이 믿고 싶은 것을 믿게 두었다, 자신이 믿는 신은 이 사악한 세상으로부터 멀리 떨어져 있다고, 구두장이 야코프는 말했었다, 무슨 수로 자애롭고 전지전능한 신이 이 세상을 지배한다는 것을 믿으라는 거지요? 구두장이 야코프틑 말했다, 제가 믿는 신과 진실을 보고자 하는 사람들의 신은 이 세상을 위한 신이 아니에요, 그런 신도 세상에 존재하지만, 세상을 다스리는 것은 다른 신들입니다, 이 세상의 다른 신 말이에요, 구두장이 야코프는 말했다, 그리고 어쩌면 그의 말이 옳았던 거야, 요한네스는 생각한다, 그 점에서 그는 구두장이 야코프와 생각이 같다, 여하튼 구두장이 야코프는 이곳 사람들에게는 무신론자 비슷하게 비쳤다, 하지만 그게 뭐 어떻단 말인가? 요한네스는 생각한다, 구두장이 야코프는 친절하고 선한 사람이었다, 그는 신발을 고쳐주고도 돈을 거의 받지 않았다, 길모퉁이 작은 공방에서 일하던 좋은 사람, 구두장이 야코프는 그런 사람이었다, 하지만 지금은 그도 가고 없다, 그렇다, 머지않아 이곳에는 그와 비슷한 연배라고는 없게 될 것이다 요한네스는 생각한다,

 

 

이맘때면 하루하루가 그렇듯이, 오늘은 뭘 해야 하나? 온종일 틀어박혀 있을 수도 없고, 에르나가 죽은 후로는 마치 모든 온기가 그녀와 더불어 떠나버린 듯 집안이 너무도 썰렁해졌다, 그래 물론 난로에 불을 피울 수도 있다 그리고 전기히터를 틀 수도 있다, 그리고 히터 온도는 항상 제일 높게 맞추었다, 그는 아무것도 아끼지 않았고, 더 이상 그럴 필요도 없었다, 나이가 들어 다른 사람들처럼, 연금을 받으면서부터는, 하지만 어떻게 해도 집은 온전히 따듯해지지 않았다, 그리고 전등을 아무리 켜도, 더 이상 온전히 환해지지 않았다,

더는 못 누워 있겠군, 그리고 빌어먹을 담배 생각이 간절했다, 방안은 춥고 거실도 마찬가지다, 하지만 부엌에는 밤새 난로에 불을 피워두었다, 그래 가서 한 대 말아 피우자, 커피 주전자를 올려놓고 먹을 걸 좀 만들어야지, 매일 그렇듯 오늘도 브라운 치즈를 곁들인 빵 한 조각을, 요한네스는 생각한다. 하지만 그다음에는? 그 다음에는 뭘 하나? 서쪽 만으로 산책이나 가볼까, 별일 없는지 둘러보기라도 할 겸? 그리고 날씨가 그리 궂지 않으면 배를 타고 가까운 바다로 나가볼 수도 있을 것이다, 낚시를 조금 해볼까, 그래 그럴 수 있겠네, 그러다 이내 생각한다, 아침마다 똑같은 생각이군, 매일 아침 똑같은 생각은 하고 있어, 하지만 달리 무슨 생각을 해야 하나? 서쪽 만을 빼면 달리 산책 나갈 곳이라도 있나? 요한네스는 생각한다, 너무 불평하지 말아야 한다, 그리 나쁠 것도 없다, 어쨌든 비를 피할 지붕이 있다 그리고 몸을 누일 따듯한 집이 있고 장성한 자식들이 있고 막내인 싱네가 그리 멀지 않은 곳에 살고 있어 거의 매일 그를 찾아오지 않는가 그리고 전화로 그의 안부를 묻는다, 그래 그렇지, 걔가 그래, 그리고 손주도 있다,

 

 

 

욘 포세의 작품들 안에서 ‘사람은 가고, 사물은 남는다’. 인물들은 흔적 없이 사라지는 것에 대해 두려움과 열망을 동시에 품은 경우가 많다. 아버지도, 그의 아버지도 대대로 어부인 집안에서 태어난 요한네스 역시 평생 고깃배에서 일하지만 수영을 할 줄 모른다. 그리고 수영을 배워 위험으로부터 삶을 구하려는 적극적인 의지를 보이지도 않는다. 인물과 인물의 관계에서 뿐 아니라 인물의 내면에서도 균열과 소통 부재의 기미가 엿보인다. 균열과 부조화의 이미지는 부정적이지 않다. 욘 포세의 인물들은 ‘모두가 옳기’때문이다. 그들은 ‘의미하지 않고 존재하고픈’ 사람들이므로 어떤 의미도 다른 의미를 덮지 않는다.

 

여하튼 나는 패배자의 시각에서 글을 쓰고 있다고 말할 수 있겠다. 하지만 누가 패배하지 않는가? (….) 내 인물들은 자기 자신을 제대로 표현하지 못하고, 한편으로는 그것을 원하지도 않는다.

 

 .. 그들은 삶의 진정한 의미와 존재의 불안을 끊임없이 사색하는 ‘멜랑콜리 커’들이다. 연구자 주잔 크뤼거에 따르면 멜랑콜리 커는 ‘존재의 이유와 의미를 고민하며, 사후세계에 대한 답을 얻을 수 없다는 딜레마’를 안고 있는 사람이다. 잃어버린 것을 애도하기를 멈추지 않으며, 전진하는 대열에서 멈춰 주변을 돌아볼 줄 알고, 정서가 우울하고, 모호하게 말하는, 과잉소비사회와 자본주의에 반하는 인성의 사람이다. 문제의 표면이 아닌 핵심을 파고들며 스스로에게 정직한 사람이다. -옮긴이의 글 중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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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침 그리고 저녁> 원제 : Morgen und Abend

 

지은이 욘 포세

옮긴이 박경희

펴낸곳 문학동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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