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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OOK] 풍부의 추월차선

[책]<헤르만 헤세의 나무들>"조용히하렴! 나를 봐봐! 삶은 쉽지 않단다하지만 어렵지도 않아 그건 다 애들 생각이야"/ 독일문학 자연에세이

by 돌냥 2024. 2. 2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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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후 출간된 헤르만 헤세의 글 모음집이다.

 

이 문집은 헤세가 나무와 자연에 대한 깊은 탐구와 존경심을 엿볼 수 있는 일기, 에세이, 시의 모음과 함께 아름다운 나무 그림 삽화로 구성되어 있다.

얼핏 식물원에 들어가 나무를 감상하는 느낌 같은 것을 예상할 수 있지만 그보단 헤세 자신의 삶에서 나무와의 관계에 대한 경험과, 그 속의 간결하고도 관찰자적 사색에 몰두하도록 초대받는다.

 

산문 속에서도 시어가 갖는 함축된 정서가 느껴지는 헤세의 글에서는 시대를 초월한 자연에 대한 추앙과 함께 (산과 나무를 좋아하는 사람이 아닐지라도) 저마다 살아오면서 한 번쯤은 지니고 있을 자연과의 소소한 추억들을 불러일으킨다.

 

그는 소비주의와 도시화로 인한 자연 서식지의 만연한 파괴를 한탄하면서 현대의 환경 문제에도 언급을 한다. 홀로 살며 나무를 날마다 돌보고 단조로운 생활을 영위하면서도 세계대전의 시대를 살아간 인간들을 향하여 당 시대 상황에 의문을 제기하고, 생태학적 위기와 복잡성에 맞서도록 도전하며, 자연 세계와의 관계를 재평가하도록 촉구한다.

 

헤세의 이 성찰적인 산문은 단순히 문학적 가치뿐만 아니라 독자들에게 지구의 관리자로서의 역할을 다시 생각하게 한다. 나무의 내재적 가치와 보호에 대한 긴급성에 대한 헤세의 호소는 그의 다른 작품에서도 자주 나타나는 성장, 재생, 상호 연결이라는 주제와 일치한다. 나무라는 소재는 종종 헤세의 소설 속에서 철학적이고 영적인 탐구의 공감대로 쓰여졌으며 안정성, 지혜, 영적 깊이와도 관련되어 있곤 하다.

 

헤세 스스로 나무를 돌보고 심는 것은 글을 쓰는 데에만 그치지 않고, 미래 세대를 위해 긍정적인 유산을 남기고자 하는 헤세의 인간의 의식과 복지에 대한 가치관과 정서를 직접적이고 실제적으로 발현하는 수단이 되었다.

 

여러 글 속에 그가 남겼던 자연과 나무에 대한 미적 감상, 환경 의식, 철학적 사유 등을 보기 쉽도록 한데 엮어낸 이 책을 읽는 동안 헤세 문학 저변에 익숙하게 드러나는 자연에 대한 사랑과 상징주의, 그 의미와 이유에 대하여 더 깊이 체감할 수 있을 것이다.

 

 

 

 

 

<나무들( Bäume )>

나무는 언제나 내 마음을 파고드는 최고의 설교자다. 나무들이 크고 작은 숲에서 종족이나 가족을 이루어 사는 것을 보면 나는 경배심이 든다. 그들이 홀로 서 있으면 더 큰 경배심이 생긴다. 그들은 고독한 사람들 같다. 어떤 약점 때문에 슬그머니 도망친 은둔자가 아니라 베토벤이나 니체처럼 스스로를 고립시킨 위대한 사람들처럼 느껴진다. 이들의 우듬지에서는 세계가 속삭이고 뿌리는 무한성에 들어가 있다. 다만 그들은 거기 빠져들어 자신을 잃지 않고 있는 힘을 다해 오로지 한 가지만을 추구한다. 자기 안에 깃든 본연의 법칙을 실현하는 일, 즉 자신의 형태를 만들어내는 것, 자신을 표현하는 일에만 힘쓴다. 강하고 아름다운 나무보다 더 거룩하고 모범이 되는 것은 없다. 


나무는 모두 성소이다. 그들과 더불어 이야기하고 그들의 말에 귀를 기울일 줄 아는 사람은 진실을 알게 된다. 그들은 학설이나 특별한 비법을 설교하지 않고 개별적인 것에는 무심한 채 삶의 근원 법칙을 이야기한다. 
...내 피부의 맥과 형태, 우듬지의 가장 작은 잎사귀놀이, 그리고 껍질의 가장 자그마한 흉터도 단 하나뿐이다. 인상적인 유일무이함으로 영원성을 드러내고 보여주는 것이 나의 직분이다. 


한그루 나무는 말한다. 나의 힘은 나의 믿음이다. 나는 조상들에 대해 아무것도 모르고 해마다 내게서 생겨나는 수천의 자식들에 관해서도 전혀 모른다. 나는 씨앗의 비밀을 끝까지 살아낼 뿐 다른 것은 내 걱정이 아니다. 나는 신이 내 안에 깃들어 있음을 믿는다. 내 의무가 거룩한 것임을 믿는다. 나는 이런 믿음으로 산다.

 

우리가 슬픔 속에 삶을 더는 잘 견딜 수 없을 때 한그루 나무는 우리에게 말을 건넨다. 

조용히 해봐! 조용히 하렴! 나를 봐봐! 삶은 쉽지 않단다. 하지만 어렵지도 않아. 그건 다 애들 생각이야. 네 안에 깃든 신이 말하게 해 봐. 그럼 그런 애들 같은 생각은 침묵할 거야. 넌 너의 길이 어머니와 고향에서 너를 멀리 데려간다고 두려워하지. 하지만 모든 발걸음 모든 하루가 너를 어머니에게 도로 데려간단다. 고향은 이곳이나 저곳이 아니야. 고향은 어떤 곳도 아닌 네 안에 깃들어 있어. 


저녁 무렵 바람에 솨솨 소리를 내는 나무들의 말을 듣고 있으면 방랑벽이 마음을 휩쓴다. 고통을 피해 멀리 도망치려는 것이 아니다. 고향과 어머니에 대한 기억들, 그리고 삶의 새로운 비유들을 향한 동경이다. 그것은 집으로 데려간다. 모든 길은 집으로 데려가는 길, 모든 발걸음은 탄생이고 죽음이며 모든 무덤은 어머니다. 

 

우리가 자신의 철없는 생각을 두려워하는 저녁때면 나무는 속삭인다. 나무는 우리보다 오랜 삶을 지녔기에 긴 호흡으로 평온하게 긴 생각을 한다. 우리가 그들의 말에 귀를 기울이지 않는 동안에도 나무는 우리보다 더 지혜롭다. 하지만 우리가 나무의 말을 듣는 법을 배우고 나면, 우리 사유의 짧음과 빠름과 아이 같은 서두름은 비할 바 없는 기쁨이 된다. 나무의 말에 귀를 기울이는 법을 배운 사람은 더는 나무가 되기를 갈망하지 않는다. 그는 자기 자신 말고 다른 무엇이 되기를 갈망하지 않는다. 그것이 바로 고향이다. 그것이 행복이다. 

 

 


<동작과 정지의 일치>

바람도 없이 온화하고 따스한 날씨인 오늘, 불을 쬐며 장작을 쪼개다가 나는 그 일이 일어나는 것을 보았다. 거의 숨결처럼 부드럽고 온화한 한줄기 바람이 일어났을 뿐인데 그토록 아껴두었던 수많은 잎들이 떨어져 내렸다. 오래 견디느라 지쳐서, 반항과 자신들의 용기에 지쳐서 소리 없이 가볍게 스스로 떨어졌다. 

대여섯달이나 꼭 붙잡고서 저항했는데 이제 시간이 되어 쓰라린 인고가 더는 필요 없게 되자 불과 몇 분 만에 아무것도 아닌 한줄기 숨결에 무너진 것이다. 나뭇잎은 바람에 펄럭이며 성숙하게 미소 짓고는 싸움조차 없이 떨어져 흩날렸다. 숨결 같은 바람은 너무나 약해서 그토록 가볍고 얇아진 작은 나뭇잎들을 멀리 밀어보내지도 못했다. 보슬비처럼 그들을 살그머니 아래로 떨어뜨려서, 잎눈들 몇이 벌써 열려 초록이 되고 있는 작은 나무 아래의 길과 풀을 덮었다. 이 놀랍고도 감동적인 광경에서 내게 무언가 계시가 나타났던 건가? 그것은 자발적으로 쉽게 이루어진 겨울 잎의 죽음이었던가? 그것은 생명이었나? 갑작스럽게 깨어난 의지로 공간을 차지한 잎눈들이 밀쳐내며 환호하는 젊음이었나? 그것은 슬픈 일이었나? 마음을 밝게 하는 일이었나? 이제 늙은 나도 펄럭이며 떨어져 내리라는 경고였던가? 내가 어쩌면 젊은이들과 더욱 강한 이들의 공간을 빼앗고 있다는 경고였나? 아니면 너도밤나무의 잎처럼 나도 가능한 한 끈질기게 오래 두 발로 꼿꼿이 버티고 서서 저항하라는 요구였던가? 그래야만 올바른 순간에 이별이 쉽고도 명랑하게 나타날 테니까?

아니다. 그것은 모든 바라봄이 그렇듯 위대하고 영원한 것이 눈에 보인 일, 모순들의 붕괴, 즉 모순들이 현실이라는 불꽃에 녹아 없어짐이 눈에 보인 일이었다. 그것은 아무 의미도 없었고 그 어떤 경고도 아니었다. 또는 모든 것을 의미했다. 존재의 비밀을 뜻했다. 그것은 아름다웠고 행운이었으며 의미였다. 바흐의 음악으로 가득 채워진 귀, 세잔의 그림이 가득 담긴 눈길을 바라보는 자에게 주어진 선물이자 발견이었다. 이런 이름이나 해석은 체험이 아니었고 그런 의미들은 나중에야 나타났다. 체험 자체는 그저 현상, 기적, 비밀로서, 아름답고도 진지했으며 사랑스럽고도 가차 없는 일이었다. 

 

 


<밤나무>

진짜 밤나무 도시는 오랫동안 보지 못했다. 이웃 마을에서 아름다운 마로니에 나무가 여기저기 외따로 서 있는 것을 볼 때마다, 또는 유감스럽게도 여러 마을에서 가련한 작은 원예용 밤나무를 볼 때마다 이런 생각이 떠오른다. 밤나무가 어떤 모습이 될 수 있는지 저 사람들이 알기만 한다면! 밤나무가 얼마나 강력한 모습으로 서서 풍성하게 꽃을 피우는지, 또 얼마나 깊은 소리로 속살거리며 푸근하고 완전한 그늘을 던지는지, 여름철이면 얼마나 커다란 풍성함으로 부풀어 오르고 가을철이면 황금갈색 낙엽으로 얼마나 두툼하고 보드랍게 바닥을 덮는지를 말이다!
오늘은 아름다운 밤나무들이 있는 슈바벤의 작은 도시를 생각한다. 도시 한가운데에는 막강한 건축물인 너른 성곽을 지닌 오래된 성이 있다. 거대한 성곽 주변에는 이미 오래전에 말라버린 놀랄 만큼 넓은 해자가 둘러싸고 있으며 위풍당당한 도로 하나가 반지처럼 해자를 둘러싸고 있다. 도로 이편엔 온통 낮은 집과 작은 정원들 뿐이지만 툭 트린 저편에는 커다란 밤나무들의 풍성한 화환이 있다. 

 

 


<복숭아 나무>

나는 나무의 몸통을 잡고 힘들게 끌고 가는 로렌초의 뒷모습을 바라봤다.

안녕, 내 사랑하는 복숭아나무야! 너는 적어도 기품 있고 자연스러우며 정상적으로 죽었으니 나는 네가 행운아라고 찬양한다. 너는 거대한 적이 팔다리를 몸통에서 비틀어서 더는 어찌할 수 없을 때까지 버티고 견뎠다. 굴복하지 않을 수 없게 되자 쓰러져서 뿌리와 분리되었다. 
너는 그냥 동족들에게 일어나는 어울리는 운명을 겪었다. 그러니 나는 네가 행운아라고 칭송한다.

너는 우리보다 훨씬 낫고 아름답게 나이가 들었다. 우리는 나이 들어도 오염된 세상의 독과 비참함에 맞서야 하고, 숨 쉴 때마다 사방을 갉아먹는 유해물질에서 깨끗한 공기를 얻으려고 싸워야 하니 말이다. 
나무가 쓰러진 것을 보았을 때 나는 이런 일이 생길 때면 언제나 그랬듯 대체품을, 그러니까 새로 나무를 심을 생각을 했다. 쓰러진 나무가 있던 자리에 구멍을 파고 한동안 그대로 놔둔 채 공기와 비와 햇빛에 노출시키고, 구멍 안에 잡초더미와 온갖 재들이 뒤섞인 퇴비를 집어넣고 기다렸다가 보슬비가 내리는 어느 온화한 날에 어린 묘목을 심는 것이다. 
하지만 이번에는 다른 나무를 심기로 결정할 수가 없었다. 평생 꽤 많은 나무를 심었으니 특정한 나무의 문제가 아니었다. 내 안에서 무언가가 이곳에서 새롭게 순환을 시작하는 것에, 생명의 바퀴를 새로 굴려 욕심 많은 죽음에게 바칠 새로운 먹이를 키워내는 일에 저항했다. 그러고 싶지 않다. 이 자리는 그냥 비워둬야겠다. 

 

 


<시든 잎 Welkes Blatt>

모든 꽃은 열매가 되고자 하고
모든 아침은 저녁이 되고자 하며,
변화와 시간의 흐름 말고
지상에 영원한 것은 없다.

가장 아름다운 여름도 언젠가는
가을이 되어 시들어감을 느끼고자 한다.
잎사귀야, 바람이 너를 데려가려 하거든
참을성 있게 조용히 있어라

너의 놀이를 하고, 반항하지 말고
조용히 그 일이 일어나게 하렴.
너를 떼어낸 바람이
너를 집으로 불어 보내게 하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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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헤르만 헤세의 나무들> 원제 : Bäume (2014년)
지은이 헤르만 헤세
옮긴이 안인희
펴낸곳 창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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