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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잡기] 雜記

[미술치료]불확실한 세계와 예술의 힘/크레이머<치료로서의 미술>16장 인간의 공격성에 대한 원인론/인간정신세계 상상력과 진실한 경험

by 돌냥 2024. 3. 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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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번장에서: 공격성에 대한 연구에서 통찰력을 끌어내며, 공격성의 뿌리 깊은 의미와 인간 행동의 억제력 부족을 탐구합니다. 예술이 치료도구로서 트라우마와 사회적 문제를 어떻게 극복하고, 압도적인 도전에 직면하여 표현과 치유를 위한 피난처를 제공할 수 있는지 그 역할에 대해 탐구합니다. 

 

 

 

 

 

체첸공화국의 한 병원에서 환자들을 돌보던 적십자 요원들이 복면을 한 사람들에 의해 무참히 살해당했다. 이 만행에 대해 적십자 본부는 다음과 같은 성명을 발표했다. '우리는 비록 전쟁 중이라도 최소한의 기본적인 인간상을 지켜질 것이라 믿었기에 우리의 일을 감당해 왔습니다. 인간성이 없다면 우리는 사람과 짐승이 다를 바 없다는 사실을 인정해야 할 것입니다.' 동물이, 같은 종에 대한 짐승 같은 살상 충동을 가지며, 결국 그러한 적개심이 적을 죽이는 결과를 낳게 된다는 생각이 이렇게까지 뿌기 깊게 박혀 있다는 사실이 놀랍다(사실 동물은 실제로 그렇지 않기 때문이다).

 

치명적인 사냥 도구를 지닌 모든 사회적 동물이 같은 종의 구성원과 싸울 때는 발톱, 송곳니, 부리 등을 무기로 사용하지 않는 확실한 자제력을 가지고 있다는 사실이 널리 알려지게(적십자 본부까지는 알려지지지 않았던 게 분명하다)된 것은 콘라드 로렌트의 독창적인 저서 <공격성에 관하여 On Aggression(1966)>가 출간된 이후부터이다. 이런 자제력이 부족한 종은 곧 멸종되고 말 것이다(수많은 전쟁, 대학살, 기타 극악무도한 행위를 자행하고 있음에도 인류는 아직 이 원리에서 예외인 듯하다)

영역 분쟁이 패자를 영구적으로 무력하게 하기 위함이 아니라 그 해 번식을 못하게 하거나 또는 과잉 번식을 막기 위해 다른 영토를 찾아가도록 하는 데 있다는 사실을 기억해야 한다. 어떤 종도 수컷을 거세하지 않는다. 그저 일시적으로 기력을 약화시키는 것으로 보면 된다. 

초식동물의 예와 같이 적에게 쫓길 때 공격하지 않고 오히려 도망치는 무방비 상태의 종은, 같은 종 내의 살상에 대한 자제력을 형성할 필요가 없다. 하지만 도피가 불가능할 경우, 같은 종 안의 살상이 나타날 수 있다. 예를 들어 사슴들이 너무 가까운 영역 내에 감금되어 있는 경우, 수사슴은 뿔을 이용하여 상대를 죽이려 할 것이다. 

 

생물학적으로 인간은 무방비적인 존재에 속한다. 콘라드 로렌츠는 인간이 원래 육체적으로 무방비 상태로 태어났는데, 본능적으로 준비하지 않았던 무기를 발명하고 지니게 된 것이 딜레마가 되었다고 인식하였다. 로렌츠에 따르면, 인류의 몰락은 최초의 인류가 적을 향해 던지려고 돌을 집어 들었을 때부터 시작되었다. 

결론적으로 말하면, 문명화된 전쟁을 하려는 시도는 반복되어 왔으나 늘 실패로 돌아갔다. 예술이 전쟁이나 평화에 대한 사회적 책임을 지지할 수 있는 길은 전혀 없는 것일까? 실제로 예술이 인간의 무책임한 파괴성을 길들일 수 있는 것으로 보이므로 여기에 한 가지 제안을 하고자 한다. 

 

인간의 정신세계에는 욕망과 두려움의 거친 열정에 시달리는 변화무쌍한 이미지가 한 솥 가득 담겨 있다. 정신분석학 용어로는 이것을 1차 과정 기능이라고 부른다. 이러한 비이성적이고 광적인 사고가 개인이나 사회에 치명적인 위협이라는 사실은 분명하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이 솥에 담긴 이미지는 모든 정신 에너지, 창조력, 개념적 사고의 근원이다. 이 사실을 부정할 순 없다.

우리는 이 이미지들을 길들이고/ 변형하여/ 건설적으로 활용해야 한다. 이런 불확실한 상황에서 예술은 변화무쌍한 환상을 안정시켜 상상력이 형성되도록 한다. 이 중간 지역은 현실에서의 가혹함이 없는 피난처와 같다. 상상력을 통하여 실제로 행동에 옮기도록 자극하지는 않으면서 진실한 경험을 만들어 낼 수 있는 힘을 가지게 된다. 이런 식으로 경험의 가능 범위는 훨씬 넓어지게 된다. 철저히 억압되어야 할 도구도 에너지와 즐거움의 근원으로 변형된다.

 

내면의 어머어마한, 길들여지지 않은, 시커먼 에너지를 그대로 표출하면 문제가 된다. 또 안으로 누르면 해결되지 못하고 또 다른 문제를 일으킬 것이다. 그런데 지하 13층까지 처박아 둬서 썩은 곰팡이 냄새가 스멀스멀 올라오도록 방치하는 것이 아니라, 밀어 넣은 시커먼 것을 꺼내서 재료로 삼아서 다른 좋은 것들, '사회적으로' '생산적으로' 변화시키는 것이 바로 '승화'다.

임상심리 박사 과정 중 임상수 감독의 특강을 들은 적이 있다. 감독은 기존에 자신이 찍은 영화 내용들과는 상반되게 '현대 한국인'에 대한 주제에 대해 말하려는 게 여러분은 의아할 것이라고 말했다. 감독은 대구 지하철 참사, 삼풍 백화점 등 영상을 보여주고 그 이후에 당시 사고들의 희생자, 피해자들이 얼마나 큰 트라우마(PTSD)를 겪고 있는지에 대한 다큐들을 보여주었다. 그런 큰 사건을 겪은 이들은 사고 뒤로도 몇 년이 넘도록 힘든 삶을 이어가고 있고, 시간이 흘러도 심각한 후유증이 계속 이어지고 있었다. 감독은 한 번 생각해 보라고 말했다 현대 한국인에 대해서. 현대의 각종 비극을 경험한(그 강연 시기 이후로도 엄청난 비극 사건들이 쌓인) 현대 한국인의 정신세계를 알려면 좀 더 거슬러 가야 한다. 아주 오래전부터 계속 침탈을 겪었었지만 결정적으로, 한국인은 일제 강점기를 겪었다. 일제동안 정말 어마어마한 폭력과 탄압을 겪었고 그 뒤에는 한국전쟁을 겪었다. 한번 상상해 보자. 삼풍백화점 붕괴 속에서 살아남은 사람이 있다고 해보자. 재난을 실제 겪은 것은 길면 며칠이다. 사고를 당한 것은 하루일 수도 한 달 가까일 될 수도 있다. 그 며칠의 경험만으로도 밝혀진 자료들처럼 그 후 몇 년을, 또는 평생을 정상적으로 살 수 없게 될 수가 있다. 그리고 한국전쟁을 생각해 보자. 3년이 넘는 시간 동안 대한민국은 거의 폐허였다. 온 천지가 삼풍백화점 붕괴 모습이었다. 매일 폭격이 이어지고 아버지 죽고 어머니 죽고 팔다리가 잘려 여기저기 돌아다니고.. 그런 걸 내 눈으로 목격하고 나도 죽다 살아나고... 이런 전쟁이었다. 일제강점기를 겪고 한국전쟁을 겪고 그리고 군사독재가 이어졌다. 계속된 폭력이 당연시되던 시대였다. 어린 시절 학교에서 엄청 많이 맞고 자랐던 것도 군사정권 아래 사회 분위기의 연장이었다. 자기도 두드려 맞았으니까 후배를 때렸다. 폭력이 대물림되는 시절을 살았다. 이렇기 때문에, 민주정부가 된 지 몇 년이 됐냐는 거다. 당시 강의 시점 기준으로는 더욱 몇 년이 되지 않았다. 그 긴 트라우마틱한 터널을 끝낸 지 이제 고작 몇 년 안 된 상황이었던 거다. 성수대교 건 삼풍백화점이건 현대한국인은 왜, 이러한가 하냐는 거다. 왜, 돈 때문에 이런 일(인재)을 저지르냐는 거다. 왜 현대한국인은 이렇게, 쪽팔림은 순간이고 이익은 영원하다 이런 정신으로 자꾸 문제를 일으키냐는 거다. 그래 그게 뭐냐? 트라우마라는 거다. 전쟁을 겪은 사람들이 제정신으로 살 수가 없다는 거다. 전쟁길 아직도 피난길을 걷고 있는 불안의 정신상태로 살고 있는 거다. 전쟁길에는 의리고 배려고 그런 건 없다. 일단 내가 살고 봐야 하고 목숨이 왔다 갔다 하기 때문에 체면이고 뭐고 없다. 일단 나 살고 내 새끼 살고 봐야 하는 거다. 어른 세대를 이해하려면 아직도 그런 정신을 갖고 있는 것에 대해 이해해야 시작이 된다.

그리고 그 전쟁세대에 의해 길러진 세대가 바로 우리 세대(부모는 1940-50년 초반 태생, 자녀는 약 70년대 초중반까지로 추측)다. 그러니 우리 나이(어림잡아 80년대 생까지도)까지도 폭력과 트라우마의 역사가 아직 안 빠졌다. 이십 년도 더 된 강연이니 현재와는 많은 차이가 있으나 당시 기준 미국도 유럽도 겪은 전쟁인데 왜 유독 한국은 인명경시와 물질만능주의로 인한 비리와 사회문제가 유독 그토록 심한가에 대한 논의가 나왔다. 편의상 미국의 남북전쟁, 유럽의 홀로코스트에 대해 다룬 시, 소설, 그림, 영화가 100이라면 우리나라 일제강점기나 한국전쟁에 대한 예술은 1 정도일 정도로 말도 안 될 수준의 양으로 거의 없다시피 했다. 사회 전체가 PTSD인 일에 대하여 사회 전체가 치유하고 승화해 왔었어야 했지만, 우리나라는 없었다는 거다. 여전히 치유되지 못한 현대한국인이라는 거다. 그래서 어떻게 해야 하느냐, 한편으로는 이런 상황에 대해 이해하고 한편으로는 사회 전체가 더 예술로써 치유하는 데에 관심을 갖고 집중을 해야 한다는 거다. (물론 내가 들었던 적도 없는 그날 임감독의 발언 영향 때문인지 모르지만 그 후 이십 년이 지날 동안 우리나라에 과거보다는 많은 일제강점기, 전쟁 소재 영화들이 많이 나왔다)

 

의심할 여지없이 우리 사회는 지구를 파괴할 정도로 위협적인 후기 산업사회의 거대한 힘을 통제할 만한 신념을 필요로 한다. 안타깝게도 예술은 그런 힘을 가지고 있지 않다. 예술과 미술치료가 할 수 있는 일은 개인이 상업주의의 유혹에 저항할 수 있도록 돕고, 자연의 위대함에 반응할 수 있게 하며, 보다 잘 방어할 수 있도록 도와주는 것이다. 

→세상의 모든 것이 경제적인 방식으로 움직이는데, 미술만은 그런 방식으로 움직이지 않는다. 미술은 내가 얼마어치 물감을 썼으니 그림값을 얼마 더 받아야지 그렇게 되는 분야가 아니다. 아무런 대가 없이 순수하게 나를 표현하고, 상대방의 마음을 움직이고 다른 의도가 없는, 결과적으로 더 감동을 주고 그러한 기버(giver)의 방식이 큰 성공을 불러일으키는 세계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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