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번 장에서는:
우리들이 아주 어린 시절부터 왜 그리고 어떻게, 굶주린 유령처럼 혼란스럽게 헤매며 살게 되었는지에 대해 파악해 보세요.내적인 만족을 만드는 자신만의 능력을 찾을 수 있도록 격려하는 미술치료사의 임무에 대해 살펴보세요.
아이들로 하여금 광고와 물질의 식이 자신의 내면세계를 훔쳐가지 못하도록 방어벽을 쌓아 외적 요구들로부터 스스로를 보호하도록 하고, 내적인 세계 안에서 상징적으로 사는 법을 탐구하는 장소인 ‘과도기적 공간’을 창조하도록 아동을 돕는 미술치료사의 사명을 다시 한번 확인하세요.
나의 동료 저자들에게 내가 관찰한 바를 이야기해 주자, 그들은 나의 관찰이 50년이라는 세월이 흐른 뒤에도 여전히 본질적으로 변한 것이 하나도 없다고 했다. 우리는 미국인들의 자아감(sense of self)이 균형을 잃게 된 원인이 무엇인지 자신들에게 물어보았다.
그것은 우리에게 ‘아메리칸드림(American Dream)’의 어두운 면과 직면하게 했다. 이 신화는 원래 유럽 이민자들이 어려운 상황을 뒤로하고 떠나올 때 만들어진 것이었다. 그들 중 많은 수가 극도의 가난 속에 거친 일을 하며 살았다. 사회적 계급과 가족 체계는 여전히 제한적이었다. 신발을 만드는 사람이 자신 소유의 신발 끈을 파는 가게를 소유하는 꿈을 꿀 수 없었고, 요리사는 자신만의 특별 요리를 제공할 수 있는 레스토랑을 가질 수 없었다. 일을 잘 하면서 덕이 있는 사람은 대중에게 오로지 보잘것없는 보상만을 받을 수 있었다. 내면의 만족으로부터 얻어져야 할 주요한 만족은 기껏해야 가족, 친구들이라는 작은 사회로부터의 존경에서 얻어졌다. 이러한 조건은 잘못했을 때에는 벌을 주면서도 때에 따라서 적절하게 애정 어린 인정을 주는 초자아가 자라도록 내면세계를 만들었다.
미국에서의 상황은 아주 달랐다. 꿈도 꿀 수 없었던 부와 명예가 얻을 수 있는 것이 되었다. 이러한 동기 부여는 새로운 이민자들에게 육체적이고 정신적인 에너지를 성공을 위해 집중하도록 하였다. 미국에 나머지 가족을 데리고 와야 한다는 의무는 그들에게 가능한 빠르게 돈을 벌어야 한다는 긴급한 상황을 만들었다.
이것은 부와 인정을 받고자 하는 몸부림에 의해 작동되는 성격 구조를 만들었다. 더욱 열심히 일해야만 한다는 강제성은 결국 내적인 만족을 위한 공간을 남겨 두지 않았다. 이민자 부모와 미국에서 태어난 자녀간의 관계도, 양자 모두에게 또 다른 내적 불안정을 야기했다. 자녀들은 부모보다 영어를 더 잘하게 되었다. 그들은 또한 부모가 가지고 있는 행동의 규범과 같은 도덕적 기준과 모순되는 문화적인 관습과 가치에 적응하는 경향이 있었다.
결과적으로 서구 사회에서 청소년들에게 나타나는 변화에 따른 적응과 부모가 가진 기준을 부분적으로 거부하는 것은 더욱 이른 시기에 나타나는 경향이 있다. 부모의 영향력이 너무 일찍 기울 때, 문화적 차이로 인하여 부모의 이상과 도덕적 기준이 평가절하될 때, 이상적인 자아는 다른 곳에서 찾아야 한다. 그러한 시대적 상황에서 태어났기 때문에, 그들은 개인들이 겪어야 할 아동기의 경험과 단절되어서 연약하고 불안정하다. 그들은 밖에서부터의 더 많은 지지와 격려가 필요하다.
외적 성공에 대한 열망을 받아들인 초자아는 힘을 많이 잃은 것처럼 보인다. 좋은 물건과 인정을 얻으려는 만족할 줄 모르는 욕망으로 인해 오랫동안 일을 하느라 지치게 된다. 모든 것은 빠르게 이루어져야 한다. 어떠한 일이든지 할당된 시간은 매우 짧다. 심지어 아동들에게도 어떠한 형태의 활동이든지 할당된 시간은 짧다. 작업 또는 창조적인 활동시간들은 짧아야만 한다. 어떤 일이든지 50분을 넘기지 않는 한도에서 완성될 수 있도록 계획되어야 한다.
교육자들은 우리 문화 전체에서도 마리아 몬테소리(Maria Montes-sori)가 진짜로 기진맥진한 피곤과 구별하기 위해서 ‘거짓된 피곤(false fatigue)’이라고 불렀던 현상에 속는 것 같다. 몬테소리는 아동들이 유치원에서 하루를 시작하면서, 어떻게 다양한 활동들에 열정적으로 몰입하는 지 묘사한다. 그러나 곧장 그들의 관심은 시드는 것처럼 보이고, 그들은 어찌할 바를 모르고 낙심하며 포기할 준비를 하는 것처럼 보인다. 몬테소리는 아동들은 진정한 의미에서는 하루 종일 쉬지 못할 것이라고 예언한다. 교사는 아동들의 일시적인 불안을 견딜 수 있어야 하고, 아동들로 하여금 그들이 하던 활동을 계속하도록 도와야 한다. 그러면 그들은 곧 새로운 에너지를 얻을 것이고, 그들이 시작했던 일을 끝낼 수 있을 것이다. 최종적으로 그들은 진짜로 피곤해지고 진짜로 누릴 수 있는 휴식을 준비한다.
몬테소리는 ‘세컨드 윈드(second wind)’현상을 처음에 느끼는 피곤이나 스트레스를 극복하고, 작업을 계속한 후에 얻을 수 있는 예상하지 못한 에너지의 자원이라고 묘사했다. 사실 모든 중요한 업적들은 세컨드 윈드 형상을 통하여 달성된다.
우리 문화는 이러한 사실을 잊어버린 것처럼 보인다. 교사와 미술치료사조차도 상업적인 연예인들로부터 방향을 잡는 것 같다. 어떠한 주제 또는 계획을 향한 관심이 시들어지자마자 새로운 무언가가 제공된다. 거기에는 참을성이라는 것은 찾아볼 수가 없고, 소동과 무기력함과 일시적인 퇴행에 대하여 시간을 할애하지도 않은다. 이러한 분위기는 어떠한 창조적인 작업에서도 피할 수 없는 요소들인데 말이다. 교사들은 보상받지 않은 불안과 낙심의 시기를 보내면서 자신감이 결여된 것처럼 보인다. 만일 그 시기들이 보상되었더라면 예상치 못했던 내적인 자원이 나타나서, 어려운 임무를 성공적으로 완성하는 데 에너지를 공급했을 텐데 말이다. 아마도 그들은 한 번도 세컨드 윈드의 기쁨을 경험하는 충분한 시간과 기회를 가져본 적이 없었을 것이다.
이것은 내면적인 만족 대 외면적인 성공이라는 우리의 주제로 돌아가게 한다. 나에게 있어서는 내면적인 만족이란 세컨드 윈드의 과정을 거쳐서 임무가 완성되었을 때 가장 강렬하게 느낄 수 있는 것 같다. 이러한 경험은 개인의 상처받기 쉬운 내적 자원들을 소중히 해야 한다는 것을 재확신 시켜 준다.
우리는 미술치료사들이 그러한 경험을 제공할 수 있어야 하고, 내적인 만족을 생성할 수 있는 방법으로 미술 회기를 이끌어야 한다고 요구한다. 또한 어떠한 교묘한 조작(외부 보상)들을 피해야 할지 우리 스스로에게 물어보아야 할 것이다. 왜냐하면 그러한 것들이 내적인 만족을 느낄 수 있는 가능성을 방해하기 때문이다.
내면의 만족이라는 개념은, 우리 외부가 아닌 내부로부터 기인한 무언가로부터, 우리가 만족할 수 있고 충만해지고 즐거울 수 있다는 것을 함축한다. 우리 중에 대다수는 인격이 형성되는 시기에 친어머니로부터 좋은 어머니(original good-enough mother)의 경험을 충분하게 누려서 무조건적인 인정을 충분하게 받았을 때 내적인 만족을 경험할 수 있다. 우리 마음에 남아 있는 좋은 어머니는 우리 삶의 나머지 기간에도, 좋은 어머니가 그랬듯이 세상이 우리를 따듯하게 받아줄 것이고, 우리의 행동과 본질이 의미 있고 가치가 있다고 생각하게 할 것이다. 우리는 온전한 형태의 가족과 공동체와 종교를 잃은 것, 그릇된 문화적 주장들, 경제적인 차별, TV 등과 같은 많은 요소들을 나열할 수 있다. 그와 같은 요소들은 내적인 공허감을 더하게 하고, 잃어버린 무언가를 열망하게 한다. 그러한 공허를 채우기 위해서 물질적인 소유, 지위, 밖으로 보이는 이미지, 약물과 알코올 같은 외부에 있는 것에 지나치게 몰두하는 사람들을 우리 주변에서 쉽게 찾을 수 있다.
코헛은 우리의 내면에 충분할 정도로 좋은 엄마의 상이 부재할 경우, 우리는 외부로부터의 인정을 추구하느라 우리의 인생을 소비한다고 주장한다. 우리는 건강하지 않는 자존감을 가지고 있어서, 우리 중 대부분은 다른 사람의 눈을 통한 거울에 자신을 보려고 한다. 즉 우리는 진공 상태가 아닌 우리 주변의 관계 안에서 자존감과 정체성을 유지하려는 경향이 있다.
많은 내담자에게 가장 눈에 띄는 증상이 하나 있는데, 그것은 희망의 상실이다. 그것은 소망하는 것이 이루어질 것이라는 기대의 상실과 어떤 일을 할 수 있다는 자신감의 상실이다. 또한 외부에서 오는 어떠한 것이 그들에게 이로울 수 있겠는가 하는 믿음의 상실, 그리고 그들이 다른 사람들에게 가치 있는 존재가 될 수 있을 것이라는 기대의 상실을 포함한다.
나는 내면의 만족은 다른 사람과의 관계에서 만족하는 것을 통해 자라난다고 믿는다. 정신질환을 앓고 있는 사람은, 다른 사람과 상호적이고 서로 작용하는 사회의 부분으로서 경험할 수 있을 때, 다른 사람들과 연결되어 있다고 느낄 수 있고, 다른 사람과 공유되는 현실에 발을 딛고 서 있다고 느낄 것이며, 그들도 사회에 기여할 수 있다고 느끼는 것으로부터 내적인 만족을 경험할 수 있다.
정신과 의사 마크 엡스타인(Mark Epstein, 1995)은 우리가 마치 불교의 가르침에 등장하는 굶주린 유령(the Hungry Ghost, 아귀 餓鬼)과 같이 끊임없이 외부로부터 만족을 찾기만, 결코 그것을 찾을 수 없다는 것을 발견했다. 불교의 전통에 따르면, 삶의 바퀴(윤회輪廻)에는 사람이 태어날 수 있는 여섯가지 차원(道, realms)이 있다. 이 여섯가지 차원 중에 하나가 아귀이다. 아귀는 가느다란 팔과 다리, 불룩한 배, 길고 가는 목을 가졌다. 그들은 사람과는 다른 차원에 있지, 사람 사이를 걸어 다녀도 보이지 않으며 알아차릴 수도 없다. 아귀는 분노와 욕망의 결합 자체이며, 채워지지 않는 탐욕과 만족할 줄 모르는 욕심으로 고통받는다. 엡스타인은 정신과에서 일하면서 내담자들에게 그와 같은 분노와 욕망이 증가하는 현상을 주목했다. 내담자들은 낮은 자존감과 외로운 느낌, 채워지지 않는 갈망과 공허감, 자신이 무가치하다는 불만을 토로했다. 엡스타인은 이러한 현상이 경계성 성격 장애 환자들에게만 나타나는 것이 아니라 현대 서구 문화에 사는 우리 모두에게도 이와 같은 현상이 나타난다고 보았다. 가끔씩 사랑받지 못한다고 느낄 때면 우리는 굶주린 유령 같은 기분을 덜기 위해 무언가를 혹은 누군가를 찾아 헤맨다.
카너와 고메스(Kanner and Gomes, 1995)는 오늘날 아동들에게 있는 자기애적 상처에 대한 비슷한 글을 썼다. 카너와 고메스는 상업적 광고의 유혹적인 환경이 문제(자기 안의 부적절한 감정)와 해결책(끝없이 소유하고 편안함을 추구)을 만들어 낼 때 사람들에게는 무가치함이라는 감각이 생긴다는 것을 관찰하였다. 이러한 과정이 진정한 정체성 대신에 얄팍한 ‘소비자 정체성’을 만들었고, 순간적인 만족과 물질적인 부에 집착하게 만들었다고 주장했다.
광고 산업은 불만족을 창출하는 목표를 가진다. 광고의 목적은 아동이 새로운 바비인형 하나를 사도록 하는 데 있는 것처럼 보이지만, 사실은 바비인형들을 계속해서 사도록 만드는 것이 광고주에게 중요한 일이다. 그래서 계속적인 불만족이 소비자들 사이에서 발생되어야 한다. 제리 멘더(Jerry Mander, 1978)는 매우 많은 수의 세련되고 고임금을 받는 정신분석가들, 행동과학자들, 지각연구자들과 과학자들이 광고업계에 있으며 우리에게 광고에서 파는 제품들이 끊임없이 필요하다는 확신이 들게 하기 위해서 일하고 있다는 글을 썼다. “새로운 석탄을 찾는 광부들처럼, 광고 분야에 종사하는 사회과학자들은 인간 내면의 미개척지를 캐내기 위해 시도한다.”
이렇게 영악하고 타산적인 사람들의 광고 술책에 저항한다는 것이 가능할 것인가? 어떻게 하면 아동들에게 이 탐욕스러운 사람들에 의해 만들어진 필요로부터 분리된, 자신들의 진정한 감정을 깨닫게 할 수 있을까? 어떠한 종류의 개입이 아동에게 자신의 내면에 있는 만족을 보도록 설득할 수 있을까?
집스(Zipes, 1997)는 미술의 역할이 사람들에게 다가가는 새로운 방법을 찾게 해 주고, 그들의 생각을 자극시키고, ‘더 깊은 기쁨을 공급하는’ 것이라고 제안했다. 대상관계 이론가인 토마스 오그덴(Thomas Ogden, 1986)은 정신분석가의 능력은 상징과 상징화된 것 사이에 커다란 공간을 만들어내는 것이라고 했다. ‘잠재적인 공간’ 안에서 의미와 가능성들이 발견되고 실현되며, 이러한 잠재적 공간에서 생각들을 실험해 볼 수 있다. 그 공간에서 우리는 가능성과 희망을 찾는다. 미술치료사로서 우리는 상징과 상징화된 물건들 사이의 공간을 창조할 수 있도록 사람들을 도울 수 있고, 그곳에서 내면의 만족을 만들 수 있는 자신의 능력을 찾을 수 있도록 사람들을 도울 수 있다.
어머니의 과업은 과도기적 공간(transitional space)을 만드는 것인데, 그곳은 아동이 내면적인 필요나 본능의 압력을 느끼지 않은 곳이며, 환경의 요구에 의해 침입당한다고 느끼지 않는 공간이다. 충분히 좋은 어머니는 그저 유용한 대상들을 아이 주변에 놓아줄 뿐, 아이에게 강제로 어떻게 하라고 하지 않는다. 과도기적 공간이 팽창하면, 아동은 이러한 대상들 중에 몇몇을 선택할 것이고 사용할 수 있다. 어머니는 따듯한 눈과 얼굴로 아동이 노는 것을 지켜보고, 이는 아동을 긍정적으로 비춰주고, 아동에게 아동 자신의 이미지를 사랑스럽고 긍정적으로 비춰 주는 거울 역할을 한다.
나는 도예실이 과도기적 공간과 같은 종류라고 생각한다. 충분히 좋은 미술치료사가 항상 있고, 거기에는 많은 양의 점토와 도구들이 있고, 다양한 실험을 할 수 있다. 긍정적인 반영(friendly mirroring)은 중요하다. 그러나 더욱 중요한 것은 작업 자체가 환자를 반영한다는 것이다. 환자가 만든 것은 좋으며, 환자도 좋은 사람이고, 또한 매우 필요한 감각인 내면적인 만족을 환자들에게 제공한다.
아무리 채워도 만족하지 못하는 굶주린 유령과 같이 대중문화의 이미지와 광고들의 요구에 동화된 평범한 아동들을 위해 우리는 무엇을 해야 하는가? 광고하는 사람들의 일은 아동에게서 잠재적인 공간을 빼앗아가고, 상징과 상징화된 것 사이의 공간을 줄여나가 아동 스스로가 가진 창의적인 해결책과 상상력을 감소시키며, 아동을 수동적이고 의존적으로 만드는 것처럼 보인다. 나는 그러한 자각이 우리에게 힘을 준다고 생각한다. 물질 의식을 심어놓은 사회과학자들이 만들어 놓은 어두운 측면에서 우리 미술치료사의 사명을 발견할 수 있다고 생각한다. 우리가 하는 일은 그들이 한 짓을 거울처럼 비추는 이미지이다. 만일 그들의 역할이 아동의 내면세계를 훔쳐가는 것이라면, 우리의 역할은 아동의 방어벽을 더 높게 쌓을 수 있도록 도와야 하고, 자신의 내면세계를 방어하도록 도와야 한다. 만일 그들의 일이 내면과 외면을 뒤섞어 버리는 것이라면, 우리의 일은 이러한 내면과 외면의 경계를 분명하게 하는 것이다.
우리의 일은 광고의 이미지가 침입하지 않은 아동이 원래 갖고 있던 이미지를 깨달을 수 있게 하여 광고주가 심어 놓은 이미지를 뛰어넘도록 돕는 것이다. 광고로 인해 단조롭고 고갈된 아동의 내면을 풍요롭게 하고 그 안에서 삶을 발견하고 경이로움과 만족을 느끼도록 돕는 것이다.
우리는 과도기적 공간을 창조할 수 있도록 아동을 도울 수 있다. 그 공간은 외부의 요구들로부터 아동이 보호되는 곳이며, 미술작업을 통해 상징적으로 사는 법을 탐구하는 곳이며, 자아와 다른 사람과 문화의 영역과 그것들 사이에서 더욱 편안하게 움직이면서 반복하여 연습해 볼 수 있는 곳이다.
→경제적인 방식으로 처내는, 지금 히어 앤 나우를 즐기지 못하고, 다음에 뭐 해야 할지를 생각하고, 만족이 없고, 다음에 또 뭐 다음에 또 뭐 외부적인 보상에 의해서만 움직이게 된다. 아이들은 즐겁지가 않다.
가짜 소진에도 불구하고 킵고잉 하면 갑자기 전에 없던 에너지가 확 솟는 것을 느끼게 된다. 10km 마라톤을 하는 중에 1km 정도에서 걷는 사람이 속출한다. 아무 생각 없이 뛰다 보면 오히려 몸이 가벼워진다. 수영도 마찬가지다.
사실 모든 중요한 업적들은 세컨드 윈드 현상을 통하여 달성된다. 사점(dead point)에 이를 때마다 제3의 손으로 바위만 넘겨주어 올라가게 해 준다. 세컨드윈드는 일반교육 현장에서는 일어나기 어렵다. 데드포인트라는 일시적 불안을 견뎌야 하기 때문이다. 선생님 자체가 데드포인트를 견디고 킵고잉 하면 세컨드윈드가 온다는 믿음이 있어야 한다. 믿음이 있으려면 나가 진짜로 몸으로 느낀 경험이 있어야 한다. 미술반에서 내가 스스로 선생님의 제3의 손에 의해 데드포인트를 견디고 다음 단계로 넘어갔을 때 어떤 느낌이 들었는 지 이것을 계속해서 반복 경험한 경험이 있어야만 비로소 아이들에게도 내담자에게도 같은 현상이 일어날 수 있다는 믿음이 생기고, 흔들리지 않고 뚝심있게 밀어부치며 편안하게 가르칠 수 있다.
항상 내 스스로 데드포인트에서 도망쳐 버리진 않았는지, 다른 것으로 바꿔버리거나 포기하진 않았는지를 돌아보아야 한다. 그리다가 안되면 뚫고 나가는 것이 아니라 종이를 새로 꺼내서 다시 시작하는 이런 태도가 인생에서도 하다가 안되면 다른 것으로 바꾸고 하다가 포기하고 이런 면과 상징적으로 연결되어 있다.
즐기는 놈 이길 수 없다고 천직자는 내면적 동기, 내면적 만족으로 이루어지는 직업이다. 공부도 마찬가지다. 힘들지 않게 대충대충 하는 애들은 공부의 참맛을 못 느낀다. 코피 터질 때까지 해본 애들만 공부의 참맛을 느낀다. 풀다가 답보고 풀다가 답보고 이런 식이면 참맛을 느낄 수도 없고 성장도 안 된다. 하나를 풀더라도 끙끙 대며 풀어보고 선생님이 제3의 손으로 공식 대입을 힌트를 주고 하다가 확 풀었을 때 성취감, 기쁨과 함께 공부가 재밌어지는 것이다.
아이들은 별로 노력하지 않았는데 칭찬하거나 아이들이 크게 애쓰지 않았는데 그럴듯한 결과물로 꾸미거나 하는 것은 모두 교묘한 조작에 속한다고 할 수 있다
우리 대다수는 인격이 형성되는 시기에 무조건적인 인정을 충분하게 받았을 때 내적인 만족을 경험할 수 있다.
잘나나 못나나 내 새끼 정신으로 키우면 자식이 어른이 돼서도 사회적으로 외부의 칭찬이 있든 없는 나는 내 할 바를 하는 그런 사람으로 성장할 수 있게 된다. 첫째 세컨드 윈드(사점 극복 후 새 에너지 획득)를 경험하며 자랐는지, 둘째 부모로부터 무조건적인 인정과 충분한 내적 만족을 경험하며 자랐는지가 중요하다. 잘난 자식이 위험하다. 내가 못났을 때도 나를 사랑했는지 확인할 수가 없다. 그러다 어쩌다 잘못하면 부모는 뭐라고 한다. 늘 잘났기 때문에 그게 당연한 거다. 매우 위험한 케이스다. 가뜩이나 사랑을 확인할 기회가 없었는데 한번 딱 잘못했는데 뭐라 하는 것 보며 역시 부모는 내가 잘났을 때만 나를 사랑한다고 결론 내게 된다. 그래서 계속 인정에 갈구하고, 외부의 눈에 내가 잘 보이고 싶고, 완벽해져야 한다고 착각하고, 그러면서 자기를 계속 괴롭히고, 자기 다운 자기가 못되고, 실패를 두려워하고 이런 일들이 만들어지는 거다.
이것의 시작이 뭐다? 무조건저인 사랑이 아니라 '조건적인 사랑'이다. 네가 엄마 맘에 들면 예뻐해 주고 맘에 안 들면 혼내고.
미술작업에도 마찬가지다. 그림은 주제와 상황에 따라 거칠게도 그릴 수 있고 꼼꼼하게 되지 않을 때도 있다. 그런데도 예쁘게 그려서 칭찬하고, 꼼꼼하게 그려서 칭찬하고, 잘 그려서 칭찬하고 하다 보면 아이들이 선생님의 마음에 드는 그림을 그리려고 하게 된다. 그런 선생님은 치료사가 될 수 없다. 칭찬을 조심하고, 하더라도 미러링으로 칭찬해야 한다.
미술치료실은 운전면허연습장이다. 안전장치가 되어있는 차로, 안전한 도로에서, 함께 동행해 줄 운전강사가 있는 상태에서 운전 연습을 하는 것이다. 바로 도로에 나가면 위험하겠지만, 똑같지는 않지만 상당히 비슷한 환경에서 충분히 연습해 볼 수 있는 곳이다. 이런 맥락에서 미술치료실의 상징적 역할과 그 영역에 대해서도 더 구체적으로 생각해 볼 수 있다.
'[잡기] 雜記' 카테고리의 다른 글
[미술치료]직접쾌락의 포기와 승화의 창조적 결과물/크레이머<치료로서의 미술>19장 커트 아이슬러의 레오나르도 다빈치 평론 (0) | 2024.03.30 |
---|---|
[미술치료]성에너지와 발달/크레이머<치료로서의 미술>18장 성볼프강 교회의 천사들 (0) | 2024.03.05 |
[미술치료]불확실한 세계와 예술의 힘/크레이머<치료로서의 미술>16장 인간의 공격성에 대한 원인론/인간정신세계 상상력과 진실한 경험 (0) | 2024.03.02 |
[칼럼]'어른되기를 두려워하는 세대'안토니아 케이스 <뉴필로소퍼> /+@MZ이후 알파세대에 대한 추측 (2) | 2024.02.25 |
[미술치료]현대사회의 유혹과 경험의 중요성/크레이머 <치료로서의 미술>15장 미술치료와 유혹적인 환경 (0) | 2024.02.21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