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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OOK] 풍부의 추월차선

[소설]<순박한 마음>'천애고독'을 잊기위한 헌신의 삶/ 귀스타브 플로베르 단편소설/ '세가지 이야기' 수록작품/ 프랑스고전문학 세계문학전집

by 돌냥 2024. 3. 2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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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순박한 마음>은 퐁레베크 마을에 사는 ‘펠리시테’라는 하녀에 대한 이야기다.

 

새벽부터 시작되는 그녀의 일과는 늦은 저녁까지 쉬지 않고 계속된다. 요리, 청소, 바느질, 빨래, 다리미질, 말과 닭과 오리 기르기, 젖을 짜 버터 만들기, 그리고 거만하여 사람들이 가까이하지 않는 안주인 ‘오뱅 부인’을 향한 한결같은 충직함.

펠리시테는 50년이 넘는 세월 동안 가축용 짐승처럼 헌신적으로, 그리고 종교적 대상을 숭배하듯 정성을 다하여 한 주인을 섬긴다.

 

소처럼 왕성하게 일하면서도 깔끔하고 알뜰하기까지 한 그녀는 도가 튼 흥정 실력으로 값을 깎아 장을 보고, 자신의 식사량지도 알아서 아껴서 빵 하나로 스무날이 넘도록 식사를 해결한다. 그런 그녀를 하녀로 둔 오뱅 부인을 부르주아 부인들은 무척 부러워한다.

 

스물다섯 살에 이미 마흔 살의 외모가 된 펠리시테의 이야기는 읽을수록 소설이라기보다는 한 편의 다큐멘터리처럼 느껴진다. 그리고 사실적인 기록 대상은 우리가 살아가면서 너무나 익숙하게 만나고 경험하는 인물들이다. 가장 가깝게는 아버지 어머니 또는 할머니 아니면 고모.. 그들은 대개 혈연의 형식으로 맺어져 일상생활에서 자주 목격할 수 있는 삶들이다.

국적과 시대와 장소가 저마다 다른 '펠리시테들'은 마치 한 사람의 인생을 보듯 생활양식과 습관 그리고 기질과 태도까지도 흡사하게 닮았다. 

 

펠리시테의 삶에는 많은 존재들이 머물렀다가 떠나간다. 자신을 배신하고 돈 많은 과부와 결혼한 약혼자, 자기 자식처럼 돌보았던 주인마님의 아들과 딸, 여동생의 아들(조카), 콜레라 환자들과 폴란드 망명자들, 프랑스혁명 자코뱅파라고 알려진 한 죽어가는 영감, 선물로 받은 미국에서 온 앵무새, 마지막으로 평생 섬겨온 주인마님 오뱅 부인까지.

 

 

 

그녀는 자신의 살아가는 원동력(=희생정신)의 대상이자, 때때로 치솟는 외로움을 잊게 했던 정서적 의존의 대상들을 하나씩 잃어간다. 늘 할 수 있는 최선을 다해 그들을 돌보고 헌신했지만 그녀의 ‘소중한 존재’들은 사고, 질병, 자살, 가난, 추위, 충격 등 갖가지 이유들로 죽음을 맞고 그녀 곁을 떠나간다. 그러나 그들은 펠리시테의 마음 속에 여전히 살아있다. 이것은 그녀의 생존 방식을 의미한다. 그녀는 다른 사람들이 생존해 나가도록 도와주는 방식으로만 살아갈 수 있었고 존재할 수 있었다. 그렇기에 그들이 떠나고 하나둘씩 생겨나는 빈자리들은 반드시 무언가로 채워져야 했다.

고행하는 수행자와 같이 자신의 삶을 아낌없이 바치며 살아가는 펠리시테의 인생은 필연적으로 숭배의 대상을 필요로 한다.

 

펠리시테는 마님의 아들 폴이 판화로 된 지리책을 설명해 주는 것을 들으며 그녀 인생의 유일한 문학 교육을 받는다. 그리고 마님의 딸 비르지니가 성당에서 하는 종교의식들- 단식, 고해성사, 제단 만들기 등-을 그대로 따라 하며 어릴 때 받지 못한 교리교육을 받는다.

 

그녀는 그리스도의 수난들을 들으며 눈물을 흘린다. 씨 뿌리기, 수확하기, 압착기 등 복음서 속에 나오는 것들은 그녀의 삶에 친숙하고도 일상적인 것들이었으나 하나님으로 인해 ‘성스러워졌다’. 그녀는 비르니 지의 첫 영성체를 위해 분주히 준비하며 극도의 떨림과 초조함을 느낀다. 면사포를 쓴 어린양들의 성가대 찬양을 보고 비르지니가 성체를 입에 영하는 모습을 보며 그녀는 의식을 잃을 만큼의 환희에 빠진다. 다음날 펠리시테 역시 영성체를 모셨지만 비르지니의 영성체를 볼 때와 같은 감격은 느낄 수가 없다.

 

조카 빅토르는 그녀에게 있어서 비르지니와 똑같은 소중함을 지닌 또 하나의 존재였다. 일요일마다 찾아오는 조카를 위해 그녀는 자신의 음식을 아껴가면서 배부르게 먹인다. 아들을 시켜서 설탕, 비누 같은 생필품부터 돈까지 뜯어내는 동생네의 요구도 그녀는 빅토르를 계속 보기 위해서 기쁘게 받아들인다. 남편도 자식도 없는 펠리시테는 자신이 어머니라도 된 듯 조카의 옷매무새를 돌보고 조카의 팔짱을 끼고 성당에 가는 기쁨을 누린다.

 

선원일을 하는 조카는 미국과 프랑스령 식민지로 긴 항해를 떠난다. 날씨가 좋으면 좋은 대로, 나쁘면 나쁜 대로, 펠리시테는 매일 매 순간 파도 위를 떠다니고 있을 조카를 노심초사 걱정하며 기도한다. 펼쳐진 지도에 조카가 묵고 있는 집이 나와있기라도 하듯 어딘지 눈이 빠져라 찾는 그녀는 아는 것이 워낙 없는 그 순진함으로 인해 웃음거리가 된다(1876년 소설이다. 지금이라면 실제 찾을 수 있기 때문에 바보 취급을 받진 않았을 것이다).

 

 

 

어느 날 그녀는 조카 빅토르가 황열병에 걸려 죽었다는 소식을 듣게 된다. 그러면서 펠리시테는 늘 조카를 난폭하게 대했던, ‘가난한 사람들의 각박함’을 지녔던 여동생네와 정을 뗀다.

한편 마음으로 낳은 자식 비르지니 또한 폐렴에 걸려 쇠약해지고, 결국 사망한다. 펠리시테는 이틀밤 내내 비르지니 곁을 지킨다. 그녀는 시신을 꾸미고 수의를 입히고 관에 넣고 화관을 씌워준다. 그리고 비르지니의 머리카락 한 움큼을 잘라내어 평생 보관할 것을 다짐한다. 매일 네시 정각이 되면 비르지니의 묘지에 간다. 꽃을 주고 모래를 갈아주고 화단을 일군다.

 

그 후 몇 년이 지나는 동안 마님의 재산관리사 '부레'를 포함해 옛 아이들 교사, 소작인들, 안부인의 삼촌 등 하나둘 세상을 떠난다(언급된 지인들은 ‘모두’ 펠리시테가 하녀로 일하면서 마님댁과 관련된 인간관계이며 그만큼 좁디좁다.. 나는 소설을 세 번쯤 다시 읽으면서 일단 한번 언급이 된 이들은 거의 한 명도 빠짐없이 퇴장(사망)또는 재등장시킴으로써 이야기의 전개에 유의미하게 활용하는 플로베르식 '완벽주의'를 확인했다. 수도 없는 등장인물들의 이름 때문에 무한히 앞으로 돌아가는 것을 반복하던 내게-한국소설을 읽을 때는 이럴 일이 별로 없지만- 이런 별 것 아닐 수 있는 장치는 작가의 의도치 않았을 세심한 친절을 느끼게 했다. 물론 이것은 플로베르가 이 단편에서 성취해 낸 아주 많은 완벽함 중의 극히 일부다).

 

오뱅 부인은 몇 년간 정리하지 않은 채 두었던 비르지니의 옷장을 어느 날 열어본다. 옷장 속에서 나비 몇 마리가 날아 나온다. 펠리시테와 오뱅 부인은 비르지니가 남긴 옷과 장난감들을 정리한다. 펠리시테는 비르지니의 모자를 간직하겠다고 말한다. 두 사람은 눈물이 가득찬 눈으로 서로를 바라본다. 마님은 두 팔을 벌리고 하녀는 그 품에 뛰어든다. 주인과 하녀는 신분 차이를 잊고 서로 고통을 달랜다.

 

 

 

조카, 안주인의 딸, 옷과 먹을 것을 주고 매일 간호를 해준 독거노인이 차례로 죽는다. 원래도 작았던 그녀의 세계는 더욱 작아진다. 많은 이들을 품었던 돌봄과 희생의 공간에서 한 사람의 자리만큼 쪼그라든 그녀의 공간은 한 지인이 오뱅 부인에게 선물한(처분한) 미국에서 건너온 앵무새 ‘룰루’로 다시 채워진다.

 

고독한 펠리시테에게 앵무새 룰루는 자식이자 애인이었다. 사람들이 앵무새에게 욕을 가르치는 것이 걱정된 그녀는 어느 날 룰루의 발에 매인 사슬을 풀어주었다. 룰루는 부리를 받치면서 계단을 걷다가 (펠리시테의 걱정대로) 병에 걸린다. 누구든 잘 간호하는 그녀는 룰루의 부리병도 치료해 놓는다. 그리고 건강하게 해 주겠다고 풀밭에 놓아둔 사이 사라진다. 펠리시테는 오뱅 부인의 표현대로 ‘미친 여자’처럼 덤불과 강가와 동네 지붕들과 그 마을의 정원이란 정원을 죄다 찾아다닌다. 신발은 다 해졌고 슬픔과 탄식이 나온다. 그 순간 룰루가 펠리시테의 어깨 위로 돌아온다. 룰루는 찾았지만 앵무새를 찾기 위해 늙은 몸을 혹사시킨 그녀의 건강은 영영 회복되지 않는다.

 

그녀는 귓병을 앓았고 귀가 아예 멀게 된다. 귀가 먼 만큼 큰 소리로 말해야 했기에, 밝혀진다 해도 전혀 수치스럽지 않은 그녀의 죄들이 고해성사할 때마다 쩌렁쩌렁 성당에 울려 퍼진다. 마침내 환청까지 시달리게 된 펠리시테는 유일하게 한 가지 소리만 들을 수 있다. 앵무새 룰루의 소리다. 그리고 그런 그녀의 유일한 가족이었던 룰루 역시 어느 추운 겨울날, 새장 속에서 죽음을 맞는다. 그녀는 그 전 누구의 죽음보다도 슬피 운다. 주인 마님은 앵무새를 박제로라도 만들라고 제안한다(이 장면에서 나는 내가 본 박제품들 중 적어도 몇은 이런 식의 '손 쓸 수 없는 비애감'을 벗어나기 위한 한 가지 시도일 수 있을 거라고 조금은 달리 생각하게 되었다).

 

마차 이동시 분실사고가 종종 있기에 펠리시테는 앵무새를 데리고 직접 옹플뢰르로 간다. 불치병 환자를 살리기 위해서도 아니고 '이미 죽은' 룰루를 박제하기 위해 떠난 여정은 지난했던 그녀의 인생만큼이나마 쉽지 않다. 바닥은 떨어진 나뭇잎으로 가득하고 도랑은 얼어붙었고 개들은 짖어댄다. 뒤에서 들려오는 엄청난 마차 소리에도 길 한복판을 비킬 생각도 없이 태연히 걷고 있는 펠리시테에게 마부와 말몰이꾼 모두 고함을 치고 속력도 줄여보지만 결국 그녀와 부딪히기 직전까지 간다(네 번째로, 읽으면서야 알았다 그래 이런 사람 (차가 오는 것을 보고도 피하지도 않고 길 '한가운데'를 천천히 걸어가는)이 펠리시테였단 말이야?로 엉뚱한 해석해서는 안 된다는 것을).

겨우 가장자리로 피한 마부는 화가 치밀어 채찍으로 펠리시테의 몸을 후려친다. 앞만 보고 가다가 느닷없이 번개같은 충격을 받은 펠리시테는 벌러덩 넘어진다. 그녀는 고의적으로 뻔뻔스러운 것도, 정신이 나간 것도 아니었다 단지 '귀가 완전히 멀었을 뿐이었다'. 채찍을 맞은 그녀 얼굴에 빨간 피가 흐른다. 그녀는 아무렇지 않게 닦은 후 빵껍질 한 조각을 먹고 룰루를 바라보며 상처를 달랜다.

 

드디어 룰루를 박제해 줄 곳이 가까워 온다. 비참한 어린 시절, 첫사랑에 대한 절망, 조카와의 이별, 비르지니의 죽음.. 순간적으로 밀물처럼 한꺼번에 닥치는 기억들에 그녀는 숨을 쉴 수가 없다. 배의 선장에게 자신이 보내는 것이 어떤 것인지 밝히지 않은 채 그녀는 신신당부를 한다. 그로부터 6개월도 더 지난 후, 펠리시테는 기다리고 기다리던 박제된 룰루를 드디어 자기 방 벽난로 위에 두게 되었다.

 

 

 

 

펠리시테는 성당에서 성령강림 그림의 형상(스테인드글라스창의 그림)을 보며 앵무새와 닮은 듯한 느낌을 받는다. 그녀는 성령 그림을 사서 방에 걸고 박제된 룰루와 함께 바라본다. 가득찬 성물들로 거의 예배당 수준이 된 자신의 방에서 똑닮은 실루엣을 가진 두 형상은 완벽히 조화롭다. 이로써 앵무새는 더욱 ‘성스러워’졌고, 성령은 그녀에게 전보다 더욱 ‘생생하고 이해할 수 있는’ 것이 되었다.

 

주인마님의 하나 남은 핏줄인 아들 폴이 결혼한다. 그 후 주인마님의 재산관리사 부레가 횡령, 밀매, 위조, 사생아 등 갖은 의혹 가운데 자살한다. 집안의 오래된 회계사의 비리에 충격을 받은 오뱅 부인은 병이 나고 결국 숨을 거둔다.

 

주인이 죽었다고 우는 하녀는 없지만 펠리시테는 ‘정말로’ 슬퍼하며 눈물을 흘린다. 그녀에게 (하인보다 먼저 죽는) 주인의 죽음은 순리에 어긋나는 끔찍한 일이었다. 그 와중에 가장 절망적인 사실은 룰루를 위한 안락한 보금자리인 자신의 방이 사라지게 된다는 사실이었다. 성령에게 간절히 기도하던 그녀는 어느새 앵무새 앞에 (이 방에서 쫓겨나지 않기 위해서) 무릎을 꿇고 기도한다. 380프랑의 연금을 받게 된 그녀는(소설 초반 펠리시테가 일 년에 단돈 100프랑의 임금을 받았다고 하니 이 연금 역시 얼마 안 되는 돈임을 짐작할 수 있다) 등불값을 절약하기 위해 해가 지면 바로 잠이 든다. 마을 고물상에 진열된 마님댁 가구들을 보기 싫어서 밖으로는 거의 나가지 않게 된다. 그녀는 시력도 거의 잃는다.

 

세를 들겠다는 사람도 집을 사겠다는 사람도 없이 몇 년이 흐른다. 펠리시테는 폐렴에 걸린다. 임시제단을 세우는 시기가 오자 그녀는 자신의 유일한 전 재산인 룰루를 바치고 싶어진다. 제단에 박제된 앵무새를 올린다니 사람들은 반대했지만 주임신부만은 허락한다. 자신의 죽음을 감지한 그녀는 병자성사를 한다. 그녀는 고백할 것이 있다며 정육점 직원 '파뷔'를 부른다. 그리고 갑자기 용서를 구한다. 그가 앵무새를 죽인 줄 알았다고 말이다. 자신을 살해자로 의심한 것에 분통이 터진 파뷔는 한바탕 난리를 치고 사람들은 이를 말린다.

 

마지막 장면은 성체축일 행사가 치러지는 마을의 전경과 방 안에 고요히 누워있는 펠리시테의 모습을 롱테이크처럼 천천히 보여준다. 시끌벅적하고 설렘 가득한 분위기. 눈 멀고 귀 멀었지만 그녀는 군중들의 커다란 웅성임, 경배를 위해 쏘아 올린 마부들의 총소리를 들을 수 있었다. 펠리시테는 바깥 거리 풍경을 상상한다. 제단 위의 앵무새가 잘 있는지를 걱정한다. 화면은 임시 제단 위를 비춘다. 성자의 유물을 담은 함, 은촛대와 꽃병과 꽃다발, 은도금한 단지와 제비꽃 화관, 보석으로 만든 샹들리에 장식, 중국식 가리개 등 보기 드문 화려한 귀중품들을 비춰준다. 그 속에서 박제된 룰루는 장미꽃에 가려져 청금석 같은 파란 이마만 빼꼼이 드러내고 있다.

 

주임신부의 인도 아래 모두 무릎을 꿇고 사위는 조용해진다. 이윽고 공중으로 높이 솟구친 향로 속의 연기가 펠리시테의 방까지 올라온다. 향내음을 맡은 그녀는 눈을 감는다. 입술에 미소를 짓는다. 메아리가 잦아들 듯 그녀의 심장박동이 잦아든다. 마지막 숨의 순간 그녀는 반쯤 열린 하늘에서 날아오르고 있는 거대한 앵무새 한 마리를 ‘본 듯'하다.

 

 

 


 

 

타고난 환경에 기인한 불가피한 고독감과 한평생 가혹한 생존 과업, 끝없는 애착 대상의 창조희생으로 인한 성취, ‘연속된 상실’ 가운데 앵무새 룰루에서 절정에 이른 불안과 결핍감, 그리고 종교적 승화의 ‘실체화(일상적 대상으로서의 현현(顯現)화)’에 대한 강렬한 욕구 등 펠리시테의 심리와 행동은 어느 것 하나 놀라울 것 없이 평범하고 정상적인 것들이다. 종교적 위안으로 삶의 외로움과 고통을 대체하려는 시도는 오늘날 사람들에게도 계속 재현되고 있는 일이다.

 

그러나 작품이 쓰인 시기를 생각하면 이 소설은 ‘놀라울 정도로’ 앞서가 있고 ‘비정상적일정도로’ 평범하지 않다. 종교와 계급으로부터의 탈출이 완전히 이루어지지 않은 시점임에도 그의 글은 특정한 이념이 섞이지 않으면서도 객관적인 동시에 매우 주관적으로 펠리시테의 인생을 그려낸다.

 

어떻게 보면 소설이 쓰인 시점보다 내가 지금 이 소설을 읽은 시점이 놀라움을 증폭시키는 지도 모르겠다. 공교롭게도 현시점에서 펠리시테의 삶에 공감하게 되는 매우 단순하고도 현실적인 이유들이 있기 때문이다. 우리가 코로나를 겪지 않았더라면 좀 더 주목하지 않았을지도 모르는 부분들, 특히 개인의 내면 증상들에 대한 ‘알아차림’, (결혼하지 않고 자식을 낳지 않고)'혼자 살아가고 늙어가는 사람들'의 삶의 구체적 모습, 끝없는 노동과 정체된 경제적 상황 그 와중에 삶의 의미를 찾고자 하는 발버둥침 등등..

 

 

 

 

그러나 시의성과 상관없이 이 단편은 여러 모로 ‘펠리시테의 삶이 완벽히 펠리시테적일 수밖에 없도록’ ‘완벽하게 구현해 내는’ ‘완벽한 도구적 장치’들을 갖고 있다.  결국 펠리시테의 삶이 왜 그렇게 흘러갔고 그런 결과를 맞았는가에 대한 끊임없는 ‘증거로서의 장치’, 부인할 수 없이 단단한 ‘확인 사살 차원에서의 장치’로서의 완벽함을 보이고 있기 때문이다.

소설 뒷부분을 보면 여러 전문가들이 그것을 '문체'에 두고 집중하고 있는 것을 느낄 수 있는데 내가 보기에 가장 강력한 장치는 문체 이전에 ‘경험’이다. 나는 작가 플로베르의 개인의 삶이 어느 정도는 펠리시테였을 거라고 추측한다. 아니라면 펠리시테는 그의 부모나 아내나 형제와 같은 가족이었을 수 있다. 그럼에도 본인의 경험 부분이 가장 컸을 것으로 느껴지는 것은, 내가 이 단편을 보며 누구보다 나 자신을 많이 발견하게 되기 때문이다. 자신에게 해당되지 않는 부분을 사람은 이토록 자세히 관찰할 수는 없다. 아는 만큼 보이고 보는 만큼 그려낼 수 있다(미술치료에서도 아는 것과 보는 것 모두가 그릴 수 있는 대상이라고 말한다 즉 상상이라는 것도 엄연한 의미에서는 어느 정도 본 것의 연장이며, 아는 것의 변형이라는 것이다 ).

 

 

 

**글을 다 쓴 후 해설 부분은 다시 읽어보았다. 소름.. 역시 현실 그대로로 보일 만큼 촘촘한 장치들은 플로베르의 경험 속에서 연유한 것들이었다. 최초 구상시 소설 제목은 아예 <앵무새>였고, 앵무새에 대한 페티시즘과 그 신비로운 면모가 중심테마였다고 한다. 마지막 앵무새의 성령으로의 상징적 변모는 동일하다. 그러나 자료 조사차 찾은 퐁레베크와 옹플뢰르(모두 소설의 배경으로 나온다)에서 플로베르는 피할 수 없이 과거의 기억들이 떠오르게 됐고, 자신의 기억 속 장소와 인물들을 작품 속에 대입한다. 19세기 문학 즉 1800년대 문학의 가장 큰 특징은 현실의 재현화(낭만주의→사실주의→상징주의)였다. 두 장소는 모두 어머니의 고향이거나 어머니가 자주 왕래한 곳이었다. 비르지니가 신경병 치료를 위해 방문한 투르빌은 실제 작가의 가족이 바캉스를 보낸 휴양지였다. 어쩌다 하녀의 삶에 이렇게 투철한 반영을 하게 되었을까 궁금했던 지점은 당시 시대 분위기에서 대강 유추해 볼 수 있다. 1850년대 이후 구체제 몰락과 산업화로 민주화가 되면서 ‘민중 계급은 새로운 관심의 대상으로서 예술과 문학 속에 많이 등장’하게 되는데 소설 속 하녀 펠리시테의 모습에는 작가 플로베르가 네 살 때 그의 집에 들어와 그가 사망할 때까지(한마디로 그보다 더 오래 산) 늙은 하녀(쥘리)와 자신의 친구의 집 하녀(레오니)의 모습이 투영되어 있다.

이처럼 본인과 관계된 사람의 경험 그리고 자신의 경험을 이야기를 곳곳에 적절히 배치함으로써 실제와 허구가 구분할 수 없이 교묘히 섞인 플로베르 방식의 사실주의를 완성한 것이다.

 

소설의 제목은 <순박한 마음>이다. 작가가 설마 순박한 마음에 대해 얘기하고자 했을까? 그녀의 삶은 충분히 지고지순했다. 그러나 나는 애초 그가 펠리시테의 앵무새에 대한 페티시즘을 구상했을 정도로 강조하려 했던 것은 앵무새를 매개체로 한 그녀의 순박함 또는 신앙심을 나타내려기보다는 우리 인간 누구나 내면에 있는 마음 심리에 대한 있는 그대로의 묘사였다고 생각한다. 나는 그것을 고독과 상실 그리고 그것으로 인해 죽을 때까지 놓지 못하는 애착심이라고 생각한다. 그것은 선량함이나 거룩함과 같은 어떤 묘사라기보다는 그냥 ‘현상’이다.

 

오뱅부인, 폴과 비르지니, 그리고 앵무새 까지도 작가의 실제 삶에서 일대일로 따온 암시였다는 걸 보면 실제적이기 위한 담담한 묘사는 궁금적으로 소설을 통해 이루고자 하는 목적임이 분명해 보인다. 그가 단순히 ‘순박한 한 사람의 표상’을 나타내기 위해 이 소설을 쓴 것이 아닐 것이라는 말이다.

 

이것은 플로베르가 소설을 쓰는 것이 왜 그토록 고통스러울 수밖에 없었는지, 다섯 페이지를 교정하기 위해 왜 여덟 시간이나 소모했는지, <마담 보바리>의 네 페이지를 쓰려고 왜 꼬박 일주일을 보냈는지, 두 줄의 글을 찾아내려 왜 이틀을 몽땅 보냈는지에 대한 이유도 함께 설명해 준다.

그는 ‘현상-현실-있는 그대로의 사실’을, ‘현실이 아닌 모습으로’ 소설 속에 재창조해 내기 위해서 ‘현실적으로 필요한’ 각고의 분투를 그가 모두 경험해냈다는 반증이다.

 

 

 

 

우리가 이 소설을 읽지 않았다면 펠리시테와 같은 삶은 지극히 ‘착한 심성’을 가졌지만 결국 비극이자 연민의 대상으로만 여기며, 그 이상 생각이나 감정을 확장시킬 시도를 하지 않게 될 확률이 높다.

나는 성당에서 신부가 설교를 늘어놓는 시간과 기도문을 암송 시간에는 잠이 들면서도 비르지니의 모든 행동을 따라 하며 신앙심에 싹을 틔운 펠리시테의 심정을 알고 있다. 비르지니가 죽은 후 그녀에 대한 사랑이 앞으로도 계속해서 유효하다는 증거로서의 보관한 작은 모자도, 그런 식으로 그녀가 상실한 존재들을 대체하는 물품들을 방 안에 가득 넘쳐나도록 모으고 사는 그녀의 심리도, 무엇보다 죽은 앵무새를 박제하기 위해 품에 안은 채 장거리를 이동하고 (마부에게 맞은 채찍질로 피를 흘리면서도)그것을 손상되지 않도록 또 분실되지 않도록 배의 선장에게 신신당부하면서 우편을 보내는 심정을 너무 잘 알고 있다.

 

그녀의 방을 상상해 본다. 예배당과 잡화점의 어느 지점에 있다. 그곳은 자신이 소중히 여겼던 이들이 남긴 물건들(그리고 오뱅부인에게 필요 없어진 낡아빠진 모든 것들)로 채워져 있다. 마님댁 아이들이 아주 어릴 때 주었던 것들부터 조카의 선물, 그리고 비르지니의 유품인 작은 모자, 자신이 이 집에 오기 전에 이미 죽고 없는 주인나라의 코트까지.

 

처음에는 처음부터 끝까지 익숙한 펠리시테의 모습에서 아빠를 느꼈다 (잠시지만 엄마도 느꼈다) 그리고 마지막에는 그것이 바로 나라는 것을 알았다. 나 역시 주어진 숙명 안에서만 살려고 한 인간이었고, 그 주어진 숙명 속에는 나와 함께 있는 사람들을 기쁘게 하는 것이 있었다. 이후에는 어떤 인간보다도 낫다는 것을 깨닫게 된 개의 '가치감' 또한 나 스스로 원한 자발성에 의한 것이 아니었다. 남작부인과 오뱅부인이 그들에게 ‘사고뭉치이자 애물단지’인 앵무새 룰루를 펠리시테에게 버렸듯 나 역시 내 본의와 다르게 ‘나에게 버려진’ 존재인 강아지들을 돌보면서 나의 외로움을 채우곤 했다. 계속 헌신할 대상을 찾아 에너지를 쏟았던 나의 마음은 펠리시테와 근본적으로 크게 다르지 않다.

 

사실 이 장면에 묘사된 것들 중 어떤 장면이, 또 어떤 감정이 우리 인생에서 잘 일어나지 않는 것들인지 찾아내기 힘들다. 물론 나 같은 성향의 인생에서 훨씬 더 많이 일어나곤 한다는 것을 부인할 수는 없다. 그러나 나는 계속해서 착한 심성이 ‘더 높은 단계로 나아간’ 펠리시테와는 달리 나는 유년기와 청년기까지에 한정된 경험이라는 차이로 인해, 나의 비극과 펠리시테의 영광스러운 마지막은 엄연히 분리되어야는 성질임을 느낀다.

 

 

 

 

최선의 사실적 묘사를 통하여 그녀와 동일한 경험을 하지 않았음에도 그녀와 동일한 삶을 지내온 것 같은 경험과 감정의 누적치를 경험하도록 만든다. 특히 죽은 앵무새를 연락선에 싣기 전 -자신이 하는 행동이 ‘비정상적’일 수 있다는 것을 자신 스스로도 지각하면서 동시에 이런 행동을 할 수밖에 없도록 누적되온 ‘정상적인 사연들’에 대해 신이든 누구든 아니면 최소 자기 자신에게 항변하고 합리화하기 위한 과정으로서- 지나온 모든 죽음들과 슬픔들과 상실들이 ‘밀물처럼 한꺼번에 목구멍까지 치밀어 올라 숨을 쉴 수가 없는’ 펠리시테의 감정 상태는 과거 내가 종교에 올인했던 세월 내 안에서 줄곧 평생 반복되었던 현상들이다.

 

“조잡하게 박제된 우스꽝스러운 새가 삼위일체 중 하나를 차지하는 성령을 상징하며 끝나는 소설, 그것도 그 의도가 풍자적이거나 감상적이지 않고, 또 신성모독도 아닌 소설을 쓴다는 것이 기법상 얼마나 어려울지 상상해 보라.”

현존하는 영국 소설가 ‘줄리언 반스’는 기법을 말했다. 기법, 문체.. 그것은 여전히 일부에 대한 것일 뿐이라는 생각이 든다. 플로베르의 큰 그림은 수없이 작은 나사들이 적재적소 자리해 단단하게 조립된 완벽한 꼼꼼함에서 비롯된다고 생각된다. 담담한 어조는 최후 수단일 뿐이다. 어떤 것(경험, 관찰, 통찰)을 발견했는지가 더 중요하다. 최고의 소설은 결국 주인공 또는 화자가 자기 자신에 되게 하는 경험, 독자로 하여금 물아일체를 느끼게 하는 소설일 것이라는 생각이 든다. 모든 소설들이 그것을 완벽히 찡-한 느낌으로 전해주지는 않는다.

<순박한 마음>은 오랜만에 그런 놀라운 일체감을 느끼게 해 준, 사실이라고 해도 믿을 정도의 탄탄한 관찰자적 시야를 완숙하게 드러낸 아름답고 청빈하고 성실한 작품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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