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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잡기] 雜記

[미술치료]생존으로서의 예술/ 크레이머<치료로서의 미술>20장 미술과 극한 상황에서의 생존/ 알프레드 캔터의 홀로코스트 스케치

by 돌냥 2024. 3. 3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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알프레드 캔터 Alfred Kantor ( 1923.11.7~2003.1.16)는 체코슬로바키아에서 태어났고, 막 미술을 배우기 시작했던 열여덟 살  나치에 의해 체포되었다. 그는 테레진(Terezín) 강제수용소에 억류되었고 아우슈비츠(Auschwitz ) 수용소와 슈바르첸하이데(Schwarzenheide)에서 강제 노역을 했다.

그는 강제 수용소에서 살아남았고 이후 프라하, 독일 뒤셀도르프(Düsseldorf)를 거쳐 미국으로 건너갔다. 

 

그는 뒤셀도르프에서 그의 체험을 그림으로 기록했다. 127쪽 분량의 연필 스케치와 수채화를 손으로 꿰맨 책으로, 미국에서 출판되기 쉽도록 영어로 된 설명을 달았다. 그러나 출판사를 찾기까지 26년이라는 세월이 걸렸다.

 

 

"내가 그림 그리는 데 몰두한 것은 나의 깊은 생존에의 본능으로부터 나온 것이었다. 이것이 당시의 상상할 수 없는 공포를 이겨내는 데 도움이 되었다는 것은 의심할 여지가 없다. '관찰자'의 역할을 함으로써 최소한 몇몇의 순간들은 아우슈비츠에서 일어나는 일들로부터 나를 분리할 수 있었고, 그럼으로써 제정신을 차릴 수 있게 해 주었다." ( Kantor, 1971)

 

 

굶주림과 전염병과 몰살의 위협  속에서도 테레진 수용소에서 그는 계속 그림을 그릴 수 있었다. 캔터는 아우슈비츠로 보내지기 전 이 그림들을 친구들에게 전해주었고 이 덕분에 초기 그림들이 보존되어 그가 나중에 책을 만들 때 삽입할 수 있었다. 아우슈비츠와 슈바르첸하이데에서 캔터는 수용소에서 일어나는 공포스런 일들을 스케치했지만 위험을 무릅쓰고 보관하는 일을 하지 않았다. 그는 그림을 완성하자마자 없애버렸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림을 그리는 것은 캔터가 살아남는 데 도움을 주었다. 그림을 그리는 것은 그가 기록하는 기억들의 이미지를 정확하게 유지하도록 해주었을 뿐만 아니라, 무엇보다 무기력한 희생자 역할에서 빠져나와 관찰자의 역할을 할 수 있게 해주었다. 

 

 

"심리학자들은 충격적인 사건에서 살아남은 사람들은 두 집단으로 나누어진다고 관찰했다. 한 집단은 그들의 과거를 꾹꾹 억눌러 차단시켜버리고, 다른 한 집단은 충격적인 경험에 대한 그들의 기억을 마치 돌에 새겨 넣은 것처럼 선명하게 표현한다. 그것은 오늘날 나에게도 명백하다. 당시에 대한 나의 집중은 세계와 나를 둘러싼 사람들에게로 향하였다. 그것은 단지 증상이 아니라 중요한 영적이고 정신적인 구원의 요소이다." 프리모 레비(Primo Levi) <집행유예의 순간들> 1986

 

 

알프레드 캔터는 격앙된 열정에 휩싸여 단 두 달 동안 127장에 이르는 그림을 완성했다. 타고난 화가는 아니었지만, 재능있는 초보자의 스킬을 가지고 공간에 대한 묘사, 건축물의 구조와 세부사항에 대한 데생을 뛰어나게 했다. 

캔터는 수용서 터, 막사, 땅을 파고 만든 변소, 전기가 흐르는 철사를 감은 담장, 화장터를 매우 정확하게 사실에 입각해 그렸다. 대량 학살을 위해 만든 기계들, 수많은 표지판과 경고판은 독일인의 질서와 방법에 대한 강박 관념을 보여준다. 우리는 매우 산업화되고 고도로 문명화된 사회가 그것의 기술적 자원을 사람들을 말살시키는 데 사용하는 것을 볼 수 있다. 

 

그가 그린 희생자와 나치의 경비들은 사람같지 않고 마네킹처럼 생겼다. 그들은 극단적 공표를 당하거나 아주 잔인한 행동으로 묘사되는 순간에도 뻣뻣하고 표정 없는 얼굴을 하고 있다.

캔터가 그의 작품 속에서 감정을 표현하는 것을 전적으로 피한 것은 아니다. 그는 색채 그리고 죽은 것 같은 인물의 몸짓을 통해 폭력과 죽음의 분위기를 표현했다. 그는 아우슈피츠 밖의 화장터에서 불길하게 울컥울컥 토해내는 연기를 검은색의 거대한 기둥으로 표현했다. 전기 철사를 감은 담장 위의 기둥 꼭대기에 매달린 투광등은 압제에 눌려 작은 난쟁이처럼 표현된 사람들을 위협하며 쳐다보고 있다. 캔터는 살아있는 사람보다 죽은 사람을 그릴 때 더 대담하고 간정을 실어 표현하였다. 

 

캔터는 자신의 근본적인 정신 건강을 위협하는 경험들의 강력한 영향으로부터 자신을 차단하면서, 색채를 통해 당시의 분위기나 감정을 전달하고 있다. 개인적 감정이 개입되지 않은 증인과 사건들의 기록자로의 역할을 유지하면서-아마도 홀로코스트의 가공할 상황에서 가능했던 유일한 역할-캔터는 우리를 압도하거나 그 자신이 압도당하지 않는 채로, 그의 이야기를 매우 침착하게 말할 수 있었다.

 

그의 책이 출간되는데 26년의 세월이 걸렸다는 것은, 세계가 홀로코스트 희생자들의 비참함과 수백만의 사람들이 견뎌내야 했던 진실을 대면하고 받아들이는 것을 달가워하지 않았음을 보여준다.

캔터와 같은 사례에서의 미술은 미술치료사에게 특별한 통찰력을 준다. 드물지만 우리는 치료과정에서 캔터와 같이 내적으로 강한 힘을 가진 개인을 만날 수 있다. 캔터가 홀로코스트의 충격적인 사건을 경험한 것은 성인이 된 후의 것이지만 미술치료사들이 만나는 개인의 대부분은 아동기 초기에 불우하거나 정서적 손상을 입은 사람들이거나, 신체적 장애를 가진 사람들이거나 또는 양자 모두에 해당되어 고통받는 사람들이다. 자연과 격리된 채 도시의 빈민가에서 자라면서 폭력과 범죄에 둘러싸여 그들의 인간성은 성장하지 못한다. 그래서 그들이 그린 그림은 빈곤하고 분열되고 심하게 미성숙한 것으롤 표현된다. 미술을 통하여 상징적인 삶을 사는 것이 그들에게 치유와 자원이 되기에 앞서, 우리는 그들을 더욱 지원해야만 한다. 

 

알프레드 캔터의 책은 우리를 놀랍게도 두렵게도 하지만 미술치료의 신념을 더욱 굳건히 하도록 북돋는다. 그것은 인간 존재를 통합하고 유지시키는 미술의 놀라운 힘을 증명하는 것이다. 

 

 

요안나 강의: 

타인(부모, 교사 등)에 의해 당위를 부여받는 삶은 자아실현에 영향을 미친다. ~해야만 한다는 방식의 삶은 진짜 자신에 대해 부인하게 만들며 자신다운 삶을 살지 못하도록 한다. 

감정이란 그것을 촉발시키는 사건에 따라 생기는 것이 아니다. 인지체계가 먼저다. 신념체계가 달라지면 행동이 전혀 달라진다. 

 

미술은 인간 경험(생각, 감정, 행동)과 동등한 것을 눈으로 볼 수 있는 형태로 만드는 것이다. 작가 역시 자신의 내면(생각, 감정, 행동)을 눈에 보이는 형태로 표현한다. 자신의 경험이 제대로 표현될 대 치유적 효과가 일어나며 무의식조차 창조를 위한 재료로 써서 표현함으로써 승화가 일어난다. 승화가 잘 되면 자아가 치유되고 자아의 힘이 건강해지면서 본능과 초자아 사이의 갈등을 잘 해결하는 중재자 역할을 하게 된다. 이로써 문제 해결 능력 또한 높아진다. 

 

현대인들은 점점 느끼고 생각하고 경험하는 능력이 부족해져 간다. 자동화된 일상을 살면서 자동적 사고(비합리적 신념)에 빠질 위험에 노출되어 있다. 이는 필연적인 자폐성을 부른다. 인지적 사고를 통해 '알아차리게 되면' 자동화된 사고에 휘둘리지 않을 수 있다. 비합리적 신념은 오직 '대안적 실행'을 함으로써 깨질 수 있다. 그 실행이 바로 승화의 과정이다. 

 

클린 페인 (clean pain 산통, 등산통, 출근통 등..)을 피하려고 하면 '더티 이모션 dirty emotion'이 된다. 힘든 건 나쁘다가 아니다. 고통은 줄일 수 있는 것이 아니지만 관찰하는 내가 훨씬 더 커지면 된다. 

 

일 자체는 대단히 어려운 것은 없다. 모두 상대적인 것이다. 나의 기준을 낮추거나 나의 역량을 높이면 되는 것이다. 이 때 중요한 것은 '나다움'을 계속 확인할 수 있는 생각, 감정, 행동을 계속해서 표현하는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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