에세이 읽기를 좋아하지만 책 리뷰를 하자면 가장 난감해지는 것이 에세이이기도 하다.
에세이도 종류가 다양하다. 특정 주제에 대한 논리적이고 비평적인 내용의 중수필(重隨筆)과 달리,
일상에서의 신변잡기에 대한 개인적인 생각이나 감정을 써 내린 경수필(輕隨筆)의 경우가 오히려 감상을 쓰기가 더 어렵게 느껴진다.
이런 에세이들은 보통 일기보다는 의식의 흐름이 질서가 있고 정연하고 동시에 가끔의 진지하게 생각의 구렁으로 빠져들 때 쓰는 일기만큼 깊이가 있다.
그래도 자주 읽지 않게 되는 건 내가 감정적인 공감이나 위로를 직접적인 감정의 언어로 좀처럼 위로받지 못하는 인간이어서 그런가 싶기도 하다.
어쨌든 이 책도 언제나 그렇듯 제목만 보고 골라든 책이다.
지드래곤이 인스타에 인용한 책이었을 줄은 몰랐다. 스타가 읽은 책은 일단 거르고 싶지만 계속해서 중쇄되고 있는 이유가 있겠지.
엄선된 것처럼 골라진 글들은 거의 시처럼 느껴진다. 시보다 산문이 어쩔 땐 훨씬 함축적일 수 있다는 것을 느끼게 된다.
삶에 코인처럼 무언가를 넣으면 삶은 자판기처럼 다시 무언가를 반환해 준다.. 원인에는 항상 결과가 따르듯이 행동은 무엇이 됐든 나름의 결과를 불러온다. 두말할 것 없이 당연한 공식이다. 다만 감정에 있어서는 예외다. 행동으로 감정을 마무리 짓는다면 모를까, 그저 내면에서 내면으로 감정을 쏟아 붓기만 한다면 삶은 아무것도 반환해주지 않는다. 감정은 또 다른 감정을 불러일으키거나 스스로를 증폭시킬 뿐이다. 감정은 삶의 코인이 될 수 없다. <life and coin>
-처음 읽을 때와 두 번째 읽을 때의 달라진 글이다. 감정 자체는 아웃풋으로서의 기능이 없다는 면에서 공감했다. 감정을 안쪽을 향해 쏟는 것(스트레스를 생각했다)은 효력이 없다, 그러니 맞다는 예시를 스스로 들어봤다. 한 번 더 읽을 때는 흠, 이사람은 결국 고백, 감정의 표현에 대해 얘기하고 있는 걸까? 생각을 했다. 역시 젊은 사람들이 좋아할 만하군..(확증 편향)
나는 정말로 세상을 전혀 모르는 얼뜨기인 데다 자의식만 강할 뿐인 한심한 인간일지도 모른다. 나 좋을 대로만 살아가고 있다. 이뤄놓은 것이 없다. 시도는 계속해왔지만 온전한 내 것을 만들어내지 못하고 있는 것 같다는 생각이 든다. 무모한 시간들이 이토록 무섭게 흘러간다.
부지런한 청년들은 정신없이 돈을 벌고 있었다. 초라하게 구겨진 마음이 자꾸만 구석으로 밀려난다. 적당히 굶어 죽지 않을 정도로만 일하며 책이나 왕창 빌려다 읽고 가끔 글이나 쓰는 삶이 차라리 가장 행복할지도 모른다고 생각했다. 짊어진 무게가 없음에도 불구하고 잔뜩 납작해져 있는 기분이다. 무심코 피아노 뚜껑을 닫다가 그 사이에 손가락을 다 찍힐 것만 같은 기분이다. <허무>
-이 날의 작가의 낙망한 마음 묘사는 내 일기장 속의 훨씬 더 시커먼 글들에 비하면 아무것도 아니다. 따듯함이 느껴질 정도다. 좀 딴 소리긴 하지만 내 일기는 왜 책이 될 수 없고 그의 글은 책으로 나올만한 수준인지 차이를 느끼게 해 준 글이다. 보다가 이런 무력감을 느꼈던 적이 있는 작가가 이 책 출간 후 어떻게 되었나를 보니 최소 대여섯권의 책들을 더내고 최근까지도 책을 계속 내고 있었다. 나야 감성 에세이에 원래 관심이 없어서 몰랐지만 글을 쓴 날로부터 적어도 7년 여가 흐른 그는 지금 이 책 제목의 두 번째 어절을 채 입력하기도 전에 바로 검색창에 뜨는 유명한 책의 작가가 되있던 것이다. 이날의 감정과는 상관없이 실제로 대부분의 시간동안 그가 무엇을 ‘해왔는지’ 분명하게 알 수 있을 것 같았다.
삶의 압박감은 세상이 아닌 나의 내면으로부터 비롯한다. 타인의 마음을 내 멋대로 단정 짓는 생각들이 몸집을 불리고 나를 압박하려 드는 것인데, 우리는 그 원인을 아예 타인에게 떠넘기거나 타인의 영향 때문인 것으로 책임을 회피한다. 내 삶의 모든 결정권은 나만이 가지고 있다는 사실을 모르는 체하는 것이다.
내 선택으로 인해 누군가에게 미안한 마음을 갖게 되는 것은 전적으로 내가 짊어져야 할 몫이며 누구의 책임도 아니다. 매 순간 주어지는 선택의 무게로 마음의 근육을 길러야 한다. 나를 믿는 힘이 마음의 근력이 되어 내 안의 확신들이 새어나가지 않도록 지탱해 줄 것이다. <확신의 힘>
-유전적이든 환경적이든 불안감이 큰 나는 별 쓸데없는 일들로 심리적인 압력을 자주 받는 편이다. 나같은 유형의 사람들이 적은 것은 아니다. HSP(Highly Sensitive Person)라는 전문용어로 일컬어지는 예민한 기질의 사람들이 전체 인구의 많게는 1/41/4 정도가 된다는 걸 알고 있다. 내 경우는 일반적인 예민함과는 다르다고 말하고 싶지만(그냥 불안 장애..?) 어찌 됐든..?) 나의 예민함을 자극하는 모든 상황과 사람들이 전부 유죄인 것은 아니다. 스스로 ‘남탓’‘남 탓’이란 단어에 굉장히 민감하다. 남 탓이란 단어는 어떤 무능함보다도 나를 루저로 만드는 기분이 들기 때문이다. 그래서 이 글에 민감하게 반응했다. 나의 압박감 죄책감 그것은 나의 몫이다. 떠넘기는 것까진 아니지만 그것을 어떻게 연결시켜 매듭짓든 ‘나’라는 카테고리 안에 있어야 할 것들이다. 물론 나의 선택으로 인한 것이 아닌 것, 내가 어떻게 할 수 없는 것들은 카테고리 밖으로 던져버려야 한다. 하지만 대부분의 일은 내 자신에 대한 확신이라는 마음 근육이 있을 때 저절로 해결된다. 나도, 누구도, 탓할 일이 없어진다. 그냥 ‘내가’ 해버리면 그만이기 때문이다.
손안에 쏙 들어오는 이 작고 귀여운 책은 우리가 삶에서 마주하는 감정과 선택의 복잡함을 섬세하게 다루며, 자기 성찰의 중요성을 일깨워준다.
일상의 다양한 순간들 가운데 느끼는 감정의 소용돌이를 고스란히 담아내면서도 그 속에서 자신을 돌아보는 과정을 진솔하게 보여준다. 무력감, 압박감, 그리고 확신을 찾는 과정을 마주할 때의 감정은 때로 고통스럽게 다가오지만 진정한 나를 ‘추구해가는’ 기쁨 또한 크다는 것을 알려준다.
단순한 감정의 기록을 넘어, 저자가 그랬듯 읽는 이들 또한 자신의 감정에 좀 더 솔직해지도록, 그래서 한 발 한 발 자신의 찾아가는 여정을 걸어갈 수 있도록 ‘나 자신을 이해하고 사랑하는 힘’을 키워주는 책이었다.
본 리뷰는 개인의 노동 에너지가 들어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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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무엇인지 무엇이었는지 무엇일 수 있는지>
지은이 최유수
펴낸곳 디자인이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