내가 읽은 모든 소설 중에서 '구의 증명'은 가장 오해의 소지가 있는 책 제목 중 하나다. 제목에서 기대되는 뭔가 딱딱한 수학 문제 같은 느낌과는 달리, 소설은 생동감 있고 감각적인 글들로 가득 차 있다. 일부 줄거리 장치는 비현실적이지만, 소설 전체는 믿을 수 없을 정도로 현실적으로 느껴진다. 무엇보다 놀라운 것은 제목의 '구'가 내가 생각했던 것(球)이 아니었다는 것이다. 의도적으로 저자가 책의 본색을 가리기 위한 의도였다면, 그것은 영리한 마케팅였다고 생각된다.
괴이해보이지만 결국, '사랑이야기'
소설은 본질적으로 사랑 이야기이다. 분명 사랑에 관한 이야기지만, 나는 마지막까지 이것이 그것의 중심 주제라고 생각하지 않았다. 필자는 최근 저자와의 인터뷰를 읽고 나서야 완전히 파악했다.
나는 구씨나 다미 같은 인물들이 우리가 생각하는 것보다 더 가까이에 존재할 수 있다고 느꼈다. 단지 기괴하고 유별난 설정의 허구가 아니라 많은 이들의 실제 경험들이 녹아있는 것이다(물론 식인 행위를 제외하고).
첫사랑은 솔직히 내가 질리다 못해 물려하는 소재다. 사람들은 정말 어른이 되어서도 같은 강도의 첫사랑을 기억할까? (특히 여자들) 실제 첫사랑 사례들과는 별도로, 여러 성공 적한 대중 콘텐츠들 덕분에 첫사랑 드라마의 효능(?)을 체험하면서부터는 좀 더 관대해졌다.
최근 영화와 드라마에서 첫사랑 이야기가 유행하는 것도 이 소설이 지속적으로 인기를 끌고 있는 중 하나와 무관하지는 않을 것이다. 유년기와 청소년기의 세밀한 묘사는 세월 풍파로 굳어있던 감정 근육을 다시 작동시키고 막혔던 혈액을 다시 돌게 만든다(풉).
구와 담이가 사랑에 빠져드는 과정에서 느끼는 위안과 그리고 통쾌함은 그들이 처한 냉혹한 현실의 끝없는 좌절과 병치되어 생생하게 묘사된다. 연인이 주는 안정감과 불가항적인 현실 불안감의 극명한 대조는 저마다의 이유로 매일 '괴리감'을 안고 살아가는 이들에게 이 소설이 공감을 이끌어내는 요소가 된다.
"오래 전부터 저는 ‘죽음’에 대해 자주, 깊이 생각하는 편이에요. 죽음에 대해 생각하다보면 ‘정신’ ‘육체’ ‘몸’ ‘영혼’ 등에 대해서도 생각할 수밖에 없고요. 사랑하는 사람의 죽음을 생각하면 저의 죽음과 비교할 수 없이 슬펐고, 정신이 사라지고 영혼이 떠난 연인의 시체라도 저에게는 너무 소중했습니다. 그래서 연인의 시체를 땅에 묻거나 불에 태울 수 없을 것 같았어요. 시체 또한 그 사람이라고 생각했기 때문에. 그런 생각들을 오랫동안 거듭하다보니 ‘구의 증명’이란 소설을 쓰게 된 것 같아요."
-작가 인터뷰(2023-04-27 <매일경제>문화면)
공유된 절망 -출간 후 8년 , 주인공의 감정을 경험해버린 우리들
운명에 대한 구의 처절한 반항과 담이의 체념어린 수용은 이야기를 복잡하게 만들지 않고 이야기에 층을 더한다. 둘이 만들어가는 단순한 구조는 구와 담이의 좁고 고립된 세계에 집중할 수 있도록 도와주며, 그들의 사랑이 생존인 동시에 잠재적인 자멸임을 상징한다.
내가 읽기엔 (다소 극단적인 설정 때문인지)구와 담이의 사회적, 경제적 투쟁이란 냉혹한 현실 측면이 둘 사이의 감정적 측면보다 더 두드러졌다. 구와 담이가 겪는 극심한 고통은 누군가가 당면한 처절한 현실일 수 있음에도 애정 감정을 고조시키기 위한 서사적 (다소 장식적인) 장치로 느껴지기도 했다. 남자 주인공이 보이는 퇴행적 냉담함(결과적으로는 여주를 배려하는. 쌍남자라고 부르는)은 구식 로맨틱물의 트로피를 연상케 다소 진부한 느낌이 들었다. 무엇보다 이들의 절망과 식인 행위 사이의 연관성은 다소 억지스럽게 느껴졌던 것이 사실이다.
구의 증명은 출간 당시엔 즉각적인 관심을 끌지 못했지만, 시간이 지나면서 입소문을 타고 꾸준히 팔리며 더 큰 인기를 얻게 되었다. 소설이 가진 특유의 우울함과 기괴함은 출간 이후 8년 동안 한국 사회가 변화함에 따라 더욱 '현실과 연관성이 높아졌다'. 지난 세월 우리가 접한 실제 사건들은 소설의 가장 어두운 장면들을 초월하는 그 이상이었기에(인천 초등생 사건, 고유정 사건 등등) 소설 속에서 등장하는 '엽기 잔혹'의 장르로 오인될 만한 요소들이 오히려 온건한 편으로 느껴질 정도였다.
소수층이 아닌 생각보다 많은 독자들이 결국 이 소설에 빠져든 이유는 특정 장르적인 소재나 묘사 때문이라기보다 등장인물들의 원초적이고 공감할 만한 현실 감정 때문이다. 끝없는 불안, 절망, 그리고 고립으로 대표되는 구와 담이의 감정은 그들만의 특별한 감정이라기보다는 지금의 많은 사람들 사이에도 현재진행형인 익숙한 감정이 되었다. '소설 속' 아웃사이더 주인공들의 극단적인 감정이 '소설 밖' 대다수의 평범한 사람들이 수시로 느끼게 되는 일상적인 감정이 돼버린 것이다.
두번 그리고 세번 읽어야 알멩이가 드러나는 소설
'구의 증명'은 두번 그리고 세 번 읽어서야 그 진면목이 드러나는 소설이다. 아주 쉽게 오해를 살 수 있지만 결과적으로는 더없이 순수하고 정신적이며 헌신적인 사랑의 유형에 대해 알려주는 소설이다. 마지막 장면은 소설 절반 이상을 지배하는 다크하고 기이한 분위기와 극명하게 대비되며 언제까지고 모든 것을 바칠 수 있을 것 같은 '영원히 불타오르는 사랑'에 대한 환상을 꿈꾸게 한다.
내가 이십대에 이 소설을 읽었더라면 과연 감당할 수 있었을지 의문이다(영화 한 편을 보면 일주일 이상 감정이 지속되는 HSP였기에). 소설 속 깊은 고통과 슬픔은 누구나 공통으로 가진 그 지점으로부터 어느 정도 시간과 거리를 갖게 되었을 때(현실적으로는 구와 담이가 처한 터널을 어느 정도 빠져나왔을 때) 압도되지 않고 오히려 본연의 감정을 충분히 감상할 수 있는 것 같다. 결과적으로 2015년이 아닌 2024년에 만나서 참 다행이었던, 작품이었다.
“어릴 땐 왜 글을 쓰는지 생각해보지 않았습니다. 아무도 제게 그런 질문을 하지 않았거든요. 책을 내고 작가로 살다보니 소설가가 된 이유에 관한 질문을 받았어요. 제 안에 먼저 답이 있던 게 아니라 질문을 받았기 때문에 깨달은 것들이 있습니다. ‘아, 나는 글쓰기를 통해 많은 것을 해소했구나, 글을 쓰지 않았다면 나는 더 많이 방황했겠구나’ 하는 깨달음이요. 글을 쓸 땐 조금씩 나은 사람이 되는 것 같아요.”
-작가 인터뷰 중(2023-04-27 <매일경제>문화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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구의 증명 | 은행나무 시리즈 N°(노벨라) 7
최진영 (지은이)은행나무