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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OOK] 풍부의 추월차선

[책]<난 빨강>좌절부터 명랑까지, 십 대들만의 자기표현의 여정/청소년시집 추천/사춘기과 '사춘기어른'이 읽으면 좋은 시

by 돌냥 2024. 6. 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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최근 청소년들의 시각을 담은 시집들을 읽으면서, 왜 내 어릴 적에는 이런 '청소년 전용의 시'를 접한 적이 없는지 새삼 생각하게 되었다. 교과서에서 어쩌다 인상 깊은 시들을 접하더라도 그것들은 주로 시험 준비를 위한 것이었기에('언제 가는 시험 치게 될 대상으로 처음부터 색안경을 끼고 접근했기에') 결과적으로 온전히 느껴야 할 감상의 약 60% 정도만 맛본 느낌이다. 시 본래의 매력을 그대로 느끼기보다는 단어 하나하나가 낱낱이 분해되어 해석되어 '암기'로 마무리됐기 때문에 진정한 감상의 여지가 거의 없었던 것이다.

어린 시절의 그림책에서 초등학교 수준의 문학 작품까지의 독서 여정은 비교적 순차적 등급으로 난이도가 정해져 있다. 그러나 중학교에 진학하면서 우리는 갑작스럽게 성인 문학의 세계로 떠밀려 가게 된다. 이해가 가든 안가든 일단 글자들 사이에 머리부터 들이밀여 넣고, '답정너' 의 전제 아래 의미를  주입해야하는 미션을 긴급히 완수해야 한다. 이런 성적 중심의 성취적 압박 속에서 문학적 감수성을 기르는 것은 생각보다 어려운 일이 될 수밖에 없다.

 

 

 

 

'청소년기'가 자아를 탐색하고 정체성을 형성하는 중요한 시기라고 하지만, 이는 도덕 시간에나 달달 외우는 이론적인 설명에 그칠 때가 많다. 청소년들이 삶에서 실제로 이해받고 자기 자신을 발견해가도록 도움을 주는 것들이, 그들 주변에 과연 존재할까? 청소년 문학은 그런 면에서 부모나 교사보다는 훨씬 큰 역할을 할 수 있는지도 모른다. 특히 청소년의 '공통된' '사적인 경험'을 반영하는 소설과 시는 어른의 논리 정연한 조언보다 훨씬 더 큰 카타르시스와 위안을 줄 수 있다.

 

항상 주변부에 머물며 완전한 의미를 발휘하지 못했던 청소년 문학이 최근 십년 간 비로소 그 가치를 인정받기 시작하고 있다고 느낀다. 청소년들의 정신 건강이 위험한 상태에 있다는 것은 이미 오래된 문제다. <나는 빨강>은 어른보다 더 바쁘게 살아가는 요즘의 청소년들이 각자가 직면한 여러가지 번민들로 하루를 보내는 가운데, 잠시나마 마음을 어루만져주고 새로운 에너지를 불어넣어줄 수 있는 시들로 이루어져 있다. (일부 시는 '오늘날의 소년소녀들'에겐 맑은 경향이 있긴 하지만-작가가 독자들보다 더 순수한 느낌) 완전한 해방은 아니더라도 부모나 친구에게도 털어놓기 어려운 생각과 감정이 공유되는 것만으로도 내재된 스트레스와 불안을 덜어줄 수 있다는 작은 희망이 생긴다.

 

 

 

 

 

가족 내 위치, 부모님에 대한 감정, 미래에 대한 고민, 연애, 성에 대한 호기심, 친구와의 관계 등.. 학교와 학원을 오가는 단순한 일상 속에서도 청소년들의 삶은 24시간 끊임없이 변화하는 다양한 생각과 감정의 순간들로 가득차 있다. 개인적으로 시집을 읽는 동안 누구보다 잠잠하면서도 내적으로 광풍처럼 휘몰아치는 '질풍노도의 시기'를 보냈으면서도, 어른이 된 지금 그 순간들이 구체적으로 어떤 상황들이었는지, 어떤 감정이었는지 기억나지 않는 것에 안타까움을 느꼈다.

 

십대를 대상으로 한 청소년 문학이 한국 문학계에서 하나의 장르로 자리잡기 시작한 것은 1980년대(90년대라고 주장하는 설도 있음)부터다. 해방기(광복~한국전쟁 전까지)문학작품 자료를 보면 그 시절 청소년들의 생활과 감정을 밀접하게 담아낸 작품들이 현대보다 더 왕성하게 창작되고 널리 읽혀졌다는 것을 알 수 있다. 뚜렷한 '청소년 문학'이 존재했던 것이다. 지금 우리가 알고 있는 '동시'는 주로 주로 초등학교 시절에 읽히지만 당시엔 주로 중학생인 청소년들이 동시의 주요 독자였다는 것도 조금 신기하다(아직 맑았던 시대).

 

 

 

 

아이들의 답답하고 절망된 마음을 고스란히 대변해주는 시집 <난 빨강>은 우울한 날 기분 해소용으로만 읽을 시집은 아니다. 십 대 아이들 특유의 경쾌한 밝음과 유머, 명랑한 활력의 순간들도 그대로 느껴진다.
개인적으로 바라는 것은 아이들이 시집을 읽으며 위안을 받고 끝나는 것을 넘어서, 자신의 감정과 생각을 자신의 언어로 표현하는 것이다. 문학적 감수성은 책의 바깥 세계에서도 이어지게 마련이다.  자기 또래의 진솔한 경험이 담긴 시를 읽으며 공감을 얻고, 자신만의 이야기가 담긴 시를 창작할 때 자아의 영역이 더 깊고 단단해지게 된다. 청소년기부터 솔직하고 창의적으로 자신을 표현하는 습관을 들이면  스스로에 대해 더 여유있는 자기 수용과 쉽게 요동치지 않는 신뢰감을 가질 수 있기 때문이다. 

 


아이들의 삶은 다양성과 복잡성으로 가득 차 있지만, 어른들은 종종 그들의 고충을 간과한다. "나는 빨강이다"는 어른들의 획일화된 재단이나 선입견 없이 아이들의 경험을 직접적으로 다루며 그 간극을 메운다. 
박성우 시인은 청소년 상담가와 학교 교사로서, 평소 청소년들과 많은 대화를 나누며 소통을 해왔다. 그는 직접 '경험의 발품'을 팔아 청소년들과 가까이 접촉하며 그 소통과 공감의 결과로서 한 땀 한 땀 진실하게 시를 완성했다.

 

 

 

 

 

<난 빨강>은 단순한 시 모음집을 넘어, 청소년들이 자신의 감정을 이해하고 표현하는데 좋은 지침이 된다. '시'라는 본질은 나이와 상관없이 표현과 성찰의 출구를 마련해준다. 시어에 익숙해질 때 우리의 정서는 회복력과 안정감을 되찾을 수 있고 평소 돌아보지 못했던  주변 세계와 자기 자신에 대한 인식을 새롭게 할 수 있다. 


청소년기에 겪을 수 있는 거의 모든 상황과 감정 상태에 대한 시들이 모여 있는 <난 빨강>이 십 대들의 자기 표출 욕구가 해소되는 매개체가 되었으면 하는 바람이다. 늘상 혼자서 안으로만 파고드는 우물이 아닌, 청소년기부터 자기 내면을 솔직하고 창의적으로 표출해 내는 카타르시스의 세계를 키워간다면, 그리고 그것으로부터 더 넓고 섬세한 시각을 갖게 된다면, 어떤 분야의 길을 걷든 자신에 대한 긍정적 확신을 가진 생동하는 삶을 살아갈 수 있게 되지 않을까 생각해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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청소년시집 <난 빨강>

지은이 박성우
펴낸곳 창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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