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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OOK] 풍부의 추월차선

[책]<자살에 대하여>우리는 자살을 제대로 이해하고 있을까?/미국철학교수의 자살담론 에세이/자살한다 고로 호모사피엔스다

by 돌냥 2024. 6. 1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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자살을 죄로 보는 이유

역사적으로 자살은 다양한 이유로 불법, 부도덕, 비종교적인 것으로 간주되어 왔다. 자살을 죄로 보는 이러한 인식은 중세 기독교 신학과 형이상학에 뿌리를 두고 있다. 오랜 기독교적 사고방식 아래에서 서구인들은 자신의 목숨을 스스로 종지부 찍는 것은 자신의 존재에 대한 '주권', 즉 오직 하느님께만 속한다고 믿는 '신의 권력'을 주장하는 것으로 여겼다. 이것이 자살을 죄로 간주하는 이유이다.

19세기 이후 신학적 논의는 정신의학적 논의로 대체되어 자살을 죄가 아니라 다양한 치료가 필요한 정신 건강 문제로서 다루게 되었다. 이러한 관점은 오늘날에도 여전히 ​​​​자살과 자살을 충동하는 우울증 병리에 대한 의학적 접근 방식을 결정하고 있다.

 

극단적일 만큼 단순한, 자살에 대한 우리의 '언어'들

저자인 사이먼 크리츨리 Simon Critchley는 우리에게 자살에 대하여 솔직하게 논의할 수 있는 '언어'가 부족하다고 주장한다. 자살에 대한 우리의 반응은 종종 아주 단순하게 두 가지 극단적 경향을 보인다. 하나는 자살을 시도하는 사람을 어리석고 이기적이며 무책임하다고 비난하는 것이고, 다른 하나는 그들의 행동을 우울증 또는 만성 중독과 같은 통제할 수 없는 요인으로만 돌리는 것이다.



낙관주의자만이 자살을 한다. 그 낙관주의자들은 더 이상(...)낙관주의자가 될 수 없는 낙관주의자이다.

‘살아야 할 이유가 없는’ 다른 사람들에게 왜 죽어야 할 이유가 있겠는가?

-『고통의 삼단논법 All Gall is Divided』 에밀 시오랑 E.M. Cioran

 


에밀 시오랑은 자살 행위 자체가 지나치게 '낙관적'이라고 표현한다. 자살은 실제로 어떤 문제도 해결하지 못한다. 복수를 하고 처벌을 가하고 자신과 타인과 그리고 세상의 혼란을 온전히 해소하지 못합니다. 자살을 통해 '구원'되는 것은 아무것도 없습니다. 크리츨리는 이러한 '연약한 낙관주의'와 대비되는 관점이 바로 니체가 의미했던  강인, 쾌활함, 심지어 높은 기개를 지닌 '강한 염세주의'의 한 형태라고 강조합니다.
크리츨리는 우리가 '자살할 수 있는 힘'을 자기 파괴적인 자기 혐오에 사용하기보다는 건설적인 형태의 표현으로 방향을 바꾸도록 권장합니다. 그는 자살을 모든 문제의 최종 해결책으로 보기보다는 이 힘을 인식하고 변화시키는 것에 대해 (책의 독자들이자 모든 잠재적 자살 가능자들에게) 제안한다.

 


자신의 소멸을 생각해 본 적이 없는 사람은, 밧줄, 총알, 독약, 바다에 의지할 생각을 해보지 않은 사람은, 갤리선의 비참한 노예나 엄청나게 큰 짐승의 썩은 시체에 기어 다니는 벌레이다.

세계는 우리에게서 모든 것을 앗아갈 수 있고 우리에게 모든 것을 금지할 수 있지만 누구도 우리가 자신을 파괴하지 못하게 할 힘은 없다.

-『해체의 개설 A Short History of Decay』 에밀 시오랑 E.M. Cioran

 


Simon Critchley의 자살에 관한 노트의 목적은 간단하다. 그는 언론과 지인들이 자살과 그로 인해 사망한 사람들에 대해 이야기하는 '진부하고 협소한 방식'에 좌절했다. 그의 목표는 극히 제한적이고도 금기시되는 표현을 넘어 자살을 이해하기 위한 좀 더 다양하고 공감적인 어휘를 찾는 것이었다. 크리츨리는 자신의 글을 통해 자살에 대해 가치를 부여하기 앞서서 한 개인의 엄연한 자유로운 행위로 간주하고 그러한 생각을 표현하는 언어를 확장할 수 있는 가능성을 열고자 했다.

 

 

'약한' 낙관주의에서 '강한' 염세주의로

책의 시작 부분에서 여러 번 강조했듯이 Critchley는 자살을 미화하거나 비난하지 않는다. 자살을 시도하는 사람이 '의지가 약한' 유형인 경우는 거의 없다는 것은 잘 알려진 사실이다. 자살하는 사람들 사이에서 더 흔한 것은 '강한' 개인과 관련된 특성, 즉 완벽주의, 강한 책임감, 비판에 대한 민감성, 높은 자존감이다. 문제를 해결하고 목표를 달성하려는 열망이 강한 사람일수록 실패와 좌절감 앞에 더 큰 동요를 경험하게 되는 경우가 많다.

이 책은 자살에 대한 편향된 시선에 도전하는 동시에 독자들이 자살이란 대상을 보다 객관적으로 보도록 권장한다. 철학적으로 세상은 불일치, 혼돈, 이기심, 태어나서 죽을 때까지의 갈등으로 가득 차 있다. 어쩌면 일찍 죽음으로써 더 빨리 탈출하는 것이 행운처럼 보일 수도 있는 곳이다. 하지만 이 세상은 목숨을 버릴 만큼 대단한 곳이 아닌 동시에, 표를 끊기 전에 먼저 떠나버리기에는 너무 소중한 것들로 가득하다. 내가 지난 짧지 않은 인생에서 견뎌온 부조리함은 내가 미래에 경험하게 될 '자살을 해야 할' 어떤 근거보다도 훨씬 더 크다. 과거에 이미 지불한 '과도한 대가'에 내 생명까지 더한다면 그것은 살면서 내가 겪은 어떤 손해보다도 크게 밑지는 일이 될 것이다.

 

크리츨리의 '자살에 대한 언어'는 내 결론과는 약간 다르지만 대강의 맥락은 일치하는 것 같다. 내 생각에 '이 세상은 자살을 정당화할 만큼 특별하지 않'다. 이 생각은 적극적으로 삶에 참여하는 사람들에게는 차갑거나 실망스러운 것으로 오해받을 수 있으나 염세주의자들에게는 매우 긍정적으로 받아들여질 말이다. 이 책을 다 읽고난 지금도 나는 여전히 살아있는 한 (불치병 등 견딜 수 없는 육체적 고통에서의 이유를 제외하고) 어떤 식으로든 해결책을 명목으로 스스로를 처단하기보다는 '지금 이 순간'을 살아가는 데 온 에너지를 집중해야 한다고 믿는다.

 

 

 


자살에 대한 편견없는 담론을 위하여

<자살에 대하여>는 기존의 편견들을 벗어나 자살을 둘러싼 다양한 관점과 논의가 보다 폭넓게 열리게 되는 가능성을 목표로 한다. 크리츨리는 자살에 대하여  도덕적으로 비난하거나 공격하기보다는 그것을 인간 존재를 위한 수많은 자유로운 행위 중 하나로 보고자 한다. 그래서 그는 이 책을 '인생을 극복'하려는 시도로써 본다. 

책은 단순히 자살을 병리적인 문제로 보는 것이 아니라 자살의 이유와 의미와 관련한 인간 존재의 복잡성과 깊이를 살펴보게 한다. 철학적이고도 공감 우선적인 그의 접근 방식은 인간의 자살을 있는 그대로 통찰해 볼 수 있는 소중한 기회를 준다.

'자살'은 오늘날 유명인부터 가까운 지인에 이르기까지, 현대의 거의 모든 사람에게 영향을 끼치는 보편적인 이슈가 되었다. <자살에 대하여>는 인위적인 경계와 금기를 뛰어넘어 자살이라는 주제에 대한 더 넓고 미묘한 관점을 갖도록 권장한다. 비록 이 책으로 인해 당신이 자살에 직접적인 또는 간접적인 영향을 전혀 받지 않더라도 상관은 없다. 적어도 자살을 바라보는 시선과 판단에 이전보다 미묘하면서도 폭넓은 이해를 얻을 수는 있게 될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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