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920년대 어느 학급, 창남이는 반에서 제일 인기 좋은 인싸다
수업시간이면 난데없이 재치 있는 농담을 하며 선생님과 친구들을 웃게 만든다
다 해진 모자와 엉덩이가 누더기진 교복바지를 보면 집안 형편이 좋지 않은 것 같지만 창남이의 집이 정말 가난한 지 정확히 아는 사람은 '단 한 명도' 없다 마다 이십 리(약 8km) 떨어진 동네에서 걸어서 통학을 하기 때문이다
창남이는 걱정있는 친구 앞에선 우스개 얘기를 하고, 곤란한 일을 당하며 좋은 의견도 내어주고, 연설과 토론에 능해서 반 내기에서 언제나 이기곤 했지만, 정작 자기 집이나 개인적인 일에 대해선 일절 말한 적이 없었다
창남인 철봉틀에서 잘 넘어가지 못해서 체육 선생님에게 곧잘 혼났고, 그래서 하교 후 철봉에 매달려 혼자 연습을 하곤 했다
창남이는 이백번이나 넘게 연습하면서도 철봉을 넘어가지 못했다 그리고 ‘엉덩이가 무거워’하며 자기 엉덩이를 마구 때리곤 했다 그걸 본 아이들은 자기가 자기 엉덩이를 때린다니 괴짜라며 한바탕 웃곤 했다 -지금 생각해보면 창남인 철봉에 매달린 채 몸을 돌릴 때 누덕누덕 짜깁기 된 교복 엉덩이 부분이 터질 것 같아서 힘을 제대로 줄 수 없었던 게 아닌가 싶다
몹시 추운 겨울, 창남이가 학교를 결석했다
창남이가 학교를 빠진 적은 처음인데다 반 최고 인싸의 갑작스러운 부재에 반 아이들은 저마다 추측으로 수군거렸다
그 순간 교실 문이 열리며 창남이가 얼굴이 빨갛게 부르튼 채 등장했다
아이들의 눈이 창남이가 신은 구두에 집중됐다 헝겊과 새끼줄, 또 손수건으로 세 네겹을 싸매어 흡사 깁스 같은 형태였다 창남이는 태평스런 말투로 학교 오는 길에 신이 다 떨어져서 중간중간 여섯 번이나 고쳐 신고 오느라 늦었다고 했다
살이 터질만큼 추운 엄동설한 아이들은 체육시간이면 어김없이 밖으로 나가 체조를 해야했다
군인 출신 선생님-나 때도 참 많았다..그들의 교사로의 직업전향은 우리에겐 비극이었다-은 이런 날씨에도 예상을 벗어나지 않고 가차없이 “모두 웃옷 벗엇!” 호령을 했다
아이들은 죽을 상을 하면서도 추위보다 무서운 게 체육선생이라 일제히 교복 자켓을 벗었고, 셔츠만 입은 채로 벌벌 떨었다 오직 창남이만 빼고서였다
웃웃(교복 자켓)를 왜 안 벗냐는 선생님의 다그침에 창남이는 얼굴이 붉어졌다
“선생님, 만년 샤쓰도 좋습니까? 맨몸 말입니다”
창남이의 생뚱맞은 대답에 선생님은 순간적으로 화가 나서 “벗어!” 하고 소리쳤다
창남이는 주섬주섬 교복을 벗었다
안에는 셔츠도 홑겹옷 단 한 벌도 없이 '맨살 몸뚱이'었다
셔츠를 왜 안 입었냐는 선생님의 다그침에 창남이는 “없어서 못 입었습니다” 대답했다
호랑이 체조선생님의 눈에 눈물이 핑 돌았다
창남이는 오늘하고 내일만 셔츠를 못 입고 모레는 인천에서 올라오는 형님이 셔츠를 사줄 거라 했다
그러자 먹먹함을 진정한 선생님은 모두 한창남 같이 용감한 사람이 되라고 큰소리로 말했다
보통 학생이면 추운 것보다는 부끄러워서라도 학교에 나오지 못할텐데 이렇게 가장 추운 혹한기에 셔츠 없이 맨몸으로, 아니 ‘만년샤쓰’로 용감하게 학교에 출석했으니 말이다 물론 교복 중 하나가 빠진 것이 예의는 아니지만 그 용기와 의지는 일등이다, 모두 다 한창남의 의기(意氣)를 배워라, 하고 일장연설이 이어졌다
창남이의 원래 별명은 이름 때문에 ‘안창남(1901-1930 한국 최초의 비행사이자 독립운동가)’이었지만, 이날부터는 ‘만년샤쓰’라고 불리게 되었다
바로 이튿날, 창남이는 또 늦도록 학교에 보이지 않았다 그리고 등장한 창남이의 모습은 어제보다 더 해괴망측했다
교복바지 대신 잔뜩 해져 구멍이 뚫린 얇디 얇은 한복 겹바지에 양말도 없이 맨발에 짚신을 신고 서 있었다 온 학교 학생들이 그 몰골에 웃음이 터져 뒤로 나자빠졌다 고아원 출신같다고 장난조로 놀려도 창남이는 태평했다
체육 선생님이 날마다 왜 한 가지씩 없어지냐고 질문하자 창남이는 동네에 그저께 큰 불이 나서 자기 집도 타버리고, 모두 없어졌다고 대답했다 지난 번처럼 아이들은 모두 웃음이 멈추었고 일제히 조용해졌다
창남이는 이어서 자기 집은 다행히 집이 절반만 탔고 어머니랑 단 두 명이지만 동네사람들은 잘 곳도 먹을 음식도 없다, 어머니가 우리 둘 당장 입을 옷 한 벌씩만 남기고 길거리에 떨고 있는 사람들에게 나눠주라고 하셨다, 교복바지는 옆집 병든 노인이 하도 추워해서 마저 줘버리고 가을 바지를 꺼내 입고 왔다, 고 말했다
어머니가 입던 옷을 모두 다른 사람들 주고나서 벌벌 떠시길래 제가 단 한 벌있는 셔츠를 어제 입혀드렸고(체조시간에 맨몸뚱이 노출된 날), 발이 아주 시려하시길래 양말을 두 켤레라고 거짓말하고 남은 한 켤레를 벗어드리고 나왔다고 말했다 창남이는 자신이 어머니에게 몇 번이나 거짓말을 한 거짓말쟁이라며 고개를 숙였다 창남이는 눈물을 떨궜다 걱정이 된 선생님은 네가 거짓말을 하더라도 결국은 알게 되실 거라고 말을 했다
“저희 어머니는 제가 여덟 살 때 눈이 멀으셔서 보기 못하고 사신답니다” 창남이의 말에 선생님은 결국 굵은 눈물이 터졌다 아이들도 전같은 왁자지껄 웃음소리 하나 없이 여기저기 훌쩍훌쩍 울음소리만 들렸다
…..정녕 오랜만의 신파 스토리였다
슬프면서도 왜 슬플까를 생각해보면 창남이가 단순히 가난해서는 아니다
창남이는 힘든데 힘든 티를 안 내고 밝다 재미있다 똑똑하다 억척스럽고 또 태평하다
굽어져야 하는데 굽어지지 않고 쓰러져야 하는데 쓰러지지 않는다
인기가 가장 많지만 사실 창남이가 가장 잘 하는 것은 ‘견디는 것’이다
그런데 동네가 화재를 당하고 그나마 없던 세간은 재해주민들에게 다 퍼줬고 창남이의 마지막 웃옷인 셔츠와 양말은 눈이 안보이시는 어머니께 모두 드렸다..
요즘에는 있을래야 있을 수 없는 최루성 장치들이다 일단 설정이부터가 과하다고 비난받을 것이 뻔하다
그런데, 일제시대인 1920년대 당시에는, 그런 것들이 사실이었고 일상이었다
그래서 그것이 슬픈 것이다
그리고 흔히 말하는 ‘하얀 거짓말’ 그 거짓말에 대한 죄책감을, 당장 스스로가 처한 가난과 추위와 불편의 고통보다 더 크게 여기는 창남이의 상태. 그런데 선생님과 반 아이들 모두 그것을 ‘공감’하고 있다..
시대를 떼놓고는 완전히 공감할 수 없는 스토리다
학교다닐 적에 방정환 선생에 대해 인물탐구 수준으로만 외고 있었지, 정작 작품 한 편을 제대로 읽어본 기억이 없어서 수요동화타임(자체 개최 중)에 겸사겸사 읽어 본 건데, 뭔가 약간 당한(?) 느낌이다
동화치고는 매우 하드보일드하다 안데르센의 동화 역시 예상 외로 잔혹한 것이 많다 따스하고 부드러운 것들만 썼다가는 아이들이 커가면서 세상에서 배신감과 분노로 더 큰 낭패를 보게 될 것을 알았던 걸까 (생각해보니 어릴 때 읽었던 양장본 한국 그림책들은 다 어딘가 서럽고 슬펐어.. 특히나 반찬을 단무지만 싸오는 아이가 선생님 배려로 도시락 바꾸는 내용 ㅠ)
방정환 작가는 식민지 시대의 현실적 상황을 소년들이 있는 그대로 마주하며 돌파하길 원했는지 모른다
시리고 아픈 현실을 아이들게 맞춘답시고 동심적이고 낭만적으로 미화하지 않고, 창남이처럼 언제 어디서나 기세가 약해지지 않고 굳세고 웃음이 많은 어른으로 자라나길 기대했는 지도 모른다
동화이기에 투박하고 정제되지 않은 면도 있지만 식민 시대의 절통함까지는 아니어도 오늘날 평안 무사해보이는 성인 어른들도 알고보면 누구나 경제적, 사회적, 심리적으로 암박감에 눌려사는 시대에 창남이의 씩씩함- 무엇이든 위축되지 않고 겁내지 않아 하는 용기와 기개-는 모든 것이 억눌려있던 당시 일제 시대 못지 않게 생존에 필요한 미덕처럼 여겨진다
창남이에 비하면 나의 오늘 고난은 얼마나 좀스럽고 하찮은 것인지.
충분히 억울하고 충분히 분노할 수 있는 상황에서 불평과 비관보다는 '재치'와 '해결'을 택하는 창남이의 면면은
1920년대 뿐 아니라 오늘은 사는 아이들의 어른들의 현재에도 충분히 환영받을 수 밖에 없는 '인싸' 캐릭터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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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만년샤쓰>
지은이 방정환
그림 김세현
펴낸곳 길벗어린이