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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OOK] 풍부의 추월차선

[책]<사랑한다고 했다가 죽이겠다고 했다가>양치기가 된 도시사람 이야기 "단순한 세계가 오히려 다채롭고 다사다난하다" 쌩리얼 목축일기

by 돌냥 2023. 8. 1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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스웨덴의 수도 스톡홀름에서 문학 강사로 일하던 한 남자.

그는 어느 날 아버지의 은퇴로 목장을 물려받고 양을 치는 목축업자가 되어 살아간다

 

일기 형식의 글은 단순하다

그러나 무미건조한 업무일지처럼 느껴지는 그의 글에 어느 순간 점점 매료된다

어떤 수사와 감정 때문은 아니다

그가 하는 양을 치는 일의 그 단순함때문이다

목축업은 단순하다 그 안에 온갖 다사다난을 포함하고 있는 그런 단순함의 반복이다

 

 

기후 목초 동물 자연을 빌어 자연에 영향을 받으며 생업을 한다는 것,

그러한 삶이 전부가 된다는 것은 도시에서 디지털의 지배를 받으며 무엇에든 돈에 직접적인 영향을 받으며

대출과 쇼핑과 집의 문제에 지배받으며 사는 삶과는 전혀 다른 결과 내용을 살게 된다는 것을 의미한다

 

초짜 양치기가 완전한 직업적 목축인이 되기 까지 3년여의 기록을 통해

독자는 자신의 삶과 전혀무관한 양치기의 기록들에서 느껴지는 심심함에서 출발하여

별 생각 없이 먹고 사는 오늘이란 시간에 감추어진 인간 삶의 진짜 모습에 대해

매우 진지한 상념에 빠지게 된다

 

양에게 풀을 먹이고 양의 탈출을 막고 양을 교배시키고 새끼양을 돌보고 양을 도축하고..

그것이 아니어도 살 수 있지만 양과 함께 하는 삶을 통해 알게 되고 얻게 된 것들은

전 같은 삶으로 돌아갈 수 없게 만들어 버린다

채식주의자의 삶, 비(非)대규모 농업을 지향하는 그의 삶은

일부 귀농인들을 중심으로한 '트랜디한 추세'와는 전혀 무관하다

 

그는 자신에게 주어진 단순한 양치기 일을 하는 동안 ‘인간이 지구를 운영하는 방식’의 모순에의 저항,

동물의 생명을 경영하는 것이 편협한 인간의 판단에서 얼마나 멀리 떨어져있는지의 체험,

인간들 삶의 유지 명목으로 합리화되는 여러가지 모순과 한계의 인식…

등 양을 목축하는 하루하루들을 통해 자신만의 삶을 만들어 나간다

 

 

어떠한 정치적 주장이나 운동적인 메시지 없이, 타인에게의 아무런 관철 없이

그저 그는 자신의 삶을 시처럼 독백한다

저자는 양을 치는 삶을 통해 자기 자신이 변화하게 되며 이는 독자들에게도 마음에도 그대로 전해진다

양을 치는 삶을 살수록 더는 누구와 어울릴 줄 모르고 SNS에서 반응을 얻는 것도 시원찮은 존재가 되어가지만, 그래도 양은 그에게 더 없는 충족을 주는 삶 자체가 되었다

 

 

낭만적이거나 목가적인 것과는 거리가 먼 양치는 노동들, 자급자족적 양치기에서 판매용 목축으로 형태가 변하는 데서 오는 여러 변화와 어려움 등등. 우리 삶이 지속되는 동안 생각과 계획이 계속 변해가듯 그의 양치는 삶에도 받아들여야 하는 변화들이 생긴다

 

완전한 직업 목축인이 되어가며 양과 함께 하는 단순한 삶은 희미해져가고, 태어난 이후 모든 시간을 함께 한 양들도 이제는 저자를 무슨 위험한 동물로 의심하는 것 같은 느낌이 든다.

하지만 그럼에도 그는 여전히 양들과 이어져있다.

저자의 생업 형태는 변했지만 울타리와 풀과 메에 울음소리와 되새김질로 이루어진 양의 허세 없는 삶만은 변치 않았다.

판매용 고기를 생산하는 일은 시간과 노동을 잡아먹지만 그의 생각까지 잡아 먹을 수는 없었다.

 

 

사랑한다고 했다가, 죽이겠다고 했다가.

양과의 정서적 친밀함과 함께 그에 반하는 회의감과 모순감도 동시에 안고 살아야 하는 목축일의 낱낱은

보다 더한 모순으로 점철된 우리 인생의 단면을 있는 그대로 보여주는 것 같다

생각의 어떤 허영도 없는 그의 삶은 코 앞만을 충실히 사는 양과 이제 완전히 닮아있는 느낌이다

 

 

내가 이 책을 읽으며 가장 크게 느낀 것은 양을 목축하는 삶의 여유로움과 낭만 같은 감수성이 아니다

잊고 있었던 '정상 감각'에 대한 인지다

인간에게 수렵과 채집 그리고 목축은 어떤 직업보다도 오래 지속되어온 일이다

인류 역사에서 가장 익숙한 보편적 노동들임에도 불구하고, 오늘날에는 이러한 '자급자족'이라는 행위가 매우 보편적이지 않은 일이 되버리고 말았다

컴퓨터 등 디지털 기기로만 일을 하는 도시인들에게 이러한 야생의 방식으로 삶을 꾸리는 사람은 식인을 하는 원주민까지는 아니어도 매우 희소하고 특이한 일로 보여지기도 한다

우리가 <나는 자연인이다> 에 나오는 사람과 삶들을 일반적이지 않은, 정상인 다운 삶으로 보지 않듯 말이다

이 시대에 도시인으로 태어나서 목축 또는 농업을 하며 사는 사람들은 슬로우 라이프나 친환경적인 삶을 지향하는 등

이념적이거나 정치적이기까지한 라벨링이 자동적으로 붙게 마련이다

 

 

 

아무리 인간이 현대 시대의 주산업이 무엇이고 앞으로 뜨는 산업은 무엇이다, 라고 주장을 하고 강조를 하여도

'그 누구도' 무엇이 인간 세상에서 '메인'이 되는 삶의 업종인지, 혹은 '정상적'인지, '평범한' 것인지에 대해

어떤 식으로도 우와 열로 가치를 분리하거나 논할 수 있는 근거가 없다

정확히 말하자면 그 근거와 기준에는 오직 인간의 평생 내내 허깨비처럼 군림하고 사라지는 돈과 자본만 있을 뿐

그것에 무한히 소모되는 식물 동물 지구라는 자연은 존재하지 않는다

 

오염물질을 주요 선진국만큼이나 배출하지 않는 나라의 사람들은 경제 후진국이라는 기준 하나만으로 모든 질병과 가난과 전쟁의 덫에 발목 잡혀 평생, 아니 몇 세대를 계속해서 살아간다

반면 나같은 이들은 운좋게도 민주주의와 초자본주의와 대시장경제의 온갖 수혜를 누리면서 동시에 그로 인해 전 지구에 미치는 온갖 폐해들에 아무렇지 않게 동참하며 하루 하루를 살아간다

물론 이 속에서도 차별은 엄연히 존재하지만 습관과 환경에 사고가 종속되어버린 사람들은 빈곤국가에 태어난 사람들에게 들이미는 잣대 그대로를 각자 다른 환경에서 태생한 우리 스스로에게 들이밀며 차별의 원인을 개인의 무지와 게으름, 노력 부족으로 원인을 돌린다

개인이 바꿀 수 있는 것이 크지 않음에도 우리는 스스로를 때로는 사회나 국가보다 더 크고 전지전능한 (노력의) 힘을 가진 개인으로 대우하며, 때론 신 만큼이나 모든 운명을 스스로 결정하고 바꿀 수 있는 거대한 존재로 여긴다

자본주의 제도 안에서의 노력 만능주의, 어찌보면 이것은 사이비종교보다 더 지독한 망상이다

 

 

 

 

생태계의 입장에서는 가장 정상적(으로 보이는)인 삶이 가장 문제적(인 원인을 가진 삶)이라는 저자의 말은

속 시원한 쾌감을 불러일으킨다

따지자면 내 삶은 딱히 정상에 가깝지는 않으므로 책임을 면피할 수 있을까 싶지만, 그런 사안이 아니다

나 자신에 대해서도 지구의 절반 사람들을 가만히 앉아 부당한 차별과 손해를 당하게 만들고 있는 자본주의의 공범자이자, 터무니 없이 부당한 풍요를 누리고 있는 수혜자라는 인식이 새롭게 생겨났다

도시문명에서 자본주의를 누리고 살아가는 그 누구도 타인의 삶에 대해 우와 열을 평가할 수 없으며 자연에 대한 책임 역시 개인의 노력 분량과 부와 사회적 지위를 기준으로 달리 회피할 수 없다

모두에겐 삶의 결과 이전에 그만한 이유(환경과 운)이 먼저 주어졌기 때문이다 각자의 태생과 환경이 모두 다름 때문이다 그리고 그것에 대한 고찰이 가능해져야 자신의 좁은 인생 뿐만 아니라 세상의 모든 풍요와 모든 부족에 대해서도 이율배반적인 태도를 버릴 수 있다

그래야만 지구와 자연 입장에서의 정상/비정상이라는 새 기준이 생기게 되고, 필요 없는 경쟁과 종속에 대한 강박, 그리고 자연에의 유해하고 분별없는 행위의 동참을 조금이라도 줄 수 있는 것이다

 

 

 

 

 

 

모두들 관심을 받고 싶고 영향력을 과시하고 싶어 난리인 이 시대에 자극적인 과장이나 대중적인 선동 없이 개인의 소소한 삶의 기록만으로 타인의 생각을 바꾸는 여지를 주는 저자의 생활과 책이 매우 특별한 힘으로 다가오는 것은 어쩌면 당연한 일이다 

문학을 전공하고 가르쳤던 저자는 예전에 우리 생각과 감정과 맞닿아 있는 ‘말과 글’이 ‘몰랐던 하나의 세계를 새롭게 , 또 친근한 세계로 태어나게 해준다’고 여겼었다

그러나 양치기의 삶을 살게 된 그는 단순한 말과 글 뿐 아니라 세상만사가 일종의 시(詩)라고 생각하게 되었다

그저 살아갈 뿐인 이 세상만사, 생존이라는 시는 누구의 인정도 허락도 구하지 않는다

생존은 작가도 없고 독자도 없으나 그 자체로 시다

언어와 사유에도 구애받지 않는 시다

그것은 삶에서 저절로 생겨나며 누구도 한번 임의대로 짓거나 원하는 만큼 읽지 않아도 시로 남아 있다

저자는 이제 문학이 아닌 자연을 주생업으로 살아가지만 그의 삶은 훨씬 더 문학스러워졌다

우리는 가끔 생존이라는 명목으로 어떤 것을 하는 동안 기대하지 않았던 다른 분야의 삶에 더 정통하게 되는지도 모른다

 

 

어떤 방식으로 살아가든 간에 한 사람의 세상만사에 고통과 근심이 없을 수는 없다

그러나 이 인정하는 자기만의 일을 하며 칭찬과 허세에 목매지 않는 삶,

자기 생명을 돌보고 다른 생명도 돌볼 수 있는 그런 서로의 생존이 연결된 삶에는 언제나 자존감과 충만함이 굳건히 자리잡고 있다

'본업'이 양치기인 작가는 이 사실을 ‘부업'인 그의 글을 통해 보여주고 있다

 

 

 

 

 

 

 

사람들과 목장 생활을 시작할 때는 자급자족이니 하는 거창한 이론에 심취해 있었다. 하지만 얼마 지나지 않아 그런 이론이 지겨워졌다. 
내가 왜 양을 키우며 사는지를 굳이 나 자신에게 설명할 필요는 없다.  닥친 일을 하는 것뿐이다. 양이 도망가면 안 되니까 울타리를 치고, 양이 배고프면 안 되니까 풀을 준다. 하지만 사람들이 계속 묻는다.
“왜 양 같은 걸 키우나요? 직접 죽이나요? 죽이기 어렵지 않나요? 휴일은 없나요? 얽매여 있는 느낌인가요?” 
나는 별로 어려운 일도 아니니 직접 해 보면 된다고 대답하고 싶은데 질문하는 사람들은 내 입에서 무슨 정치적인 말이 나오기를 기대한다. 나는 철조망을 둘둘 마는 일 아니면 새끼 양을 축사로 데려가 건초에 눕히고 보온 등을 켜는 일에 정치적인 의미를 갖다 붙이는 능력을 완전히 잃어버렸다. 처음부터 그런 능력이 없었는지도 모른다. 하지만 무례한 사람이 되고 싶진 않으니까 질문을 받으면 대답하려고 애쓴다. 
자기 삶을 해명해야 하는 번잡함을 피하려면 정상적인 일자리를 얻고 정상적인 가정을 꾸리고 정상적인 친구들과 어울리며 정상적으로 살아야 하는데 이상하게도 가장 문제적인 삶이 바로 그런 정상적인 삶이다. 
생태계의 관점에서 보면 말살 체제일 수밖에 없고 세계 인구의 절반에게는 그야말로 아파르트헤이트 체제일 수 밖에 없는 이 전 지구적 정치, 경제 체제에서 정상적으로 살아가는 사람은 이 체제의 공범자이면서 동시에 터무니 없는 부당 수혜자이기 때문이다.
더구나 그런 사람 중에 상당수, 아니 절대다수는 얼마나 염치가 좋은지 위험 지역과 빈곤 지역에서 탈출해온 사람들을 이 나라에 몇 명이나 들어오게 할 것인가 상한선을 정하기까지 한다. 우리가 누리는 풍요가 우리만 누려야 할 타고난 권리라도 된다는 듯이. 
-6월 27일

 

 

도축한 다음 날의 단상.
모든 일을 우리 손으로 처리한 것은 올해가 처음이다. 한 해 전에 불러왔던 전문가는 육류 생산 회사에서 15년간 일한 경험이 있는 착한 친구인데, 요새 이 친구의 전문 분야는 정신 건강 관리인 것 같다. 이 친구가 있을 때는 자리를 뜰 수도 있었고 우리 일이 아닌 척할 수도 있었다.이번에는 우리가 다 걸머져야 했다. 피는 계속 쏟아지고 양은 계속 죽는데 감각은 쉽게 무뎌지지 않는다. 죽은 양 열두 마리는 죽은 양 열두 마리다. 볼트 건 열두 발은 머리통 열두 개를 박살 낸다. 에누리가 없다. 
도축하기 전에 독한 술을 마시는 것이 오랜 전통이다. 즐거워서 마시는 게 아니라는 걸 이제 알겠다.
-10월 24일

 

 

나는 다른 사람들의 칭찬과 인정에 매달리지 않기 위해 애쓰며 살고 있다. 왜 그러는지는 잘 모르겠다.
정신 건강을 회복하려는 사람에게는 논리적으로 타당한 방향인 것 같다.
예측 불가능한 세상에서 다른 사람들의 평가에 매달리다 보면 나의 자아감과 자존감은 점점 취약해질 수 밖에 없을 테니까.
물론 내가 논리적으로 타당한 사람이 되기 위해 이렇게 사는 건 아니다. 내가 이렇게 사는 건 어쩌면 그저 다른 사람들과 잘 소통하지 못하는 성격이기 때문일 수 있다.
이런 내 단단한 마음의 벽에 작은 틈이 생긴 것은 양의 개체 수도 훨씬 적고 경험도 없었던 2년 전이었다.
전기 공사 때문이었나, 기술자 두 명이 일하러 온 날이었다. 두 사람은 아침 일찍 도착해 이미 축사 뒤편에서 작업 중이었고, 나는 애들이 등교한 뒤에야 두 사람이 작업하는 곳으로 내려갔다.
내가 두 사람과 이야기를 시작한 바로 그 때, 양들이 갑자기 50미터 전방의 방목장 울타리 너머에서 "매애-"하고 울었다.
두 사람 중 한 명이 감탄했다.
“당신을 알아보네요. 아까 우리가 왔을 때는 아는 척도 안 하더니.”
‘나에게 관심이 있었구나’ 하는 생각에 왠지 울컥했다. 
-9월 11일

 

 

양들이 툭하면 탈출하던 때는 물론 성가시기가 이만저만이 아니었지만 양들과 나를 하나로 이어 주는 것이 바로 그 성가심이었다. 나의 삶을 충만하게 채워주는 것이 그렇게 양들과 함께 하는 시간이었다.
판매용 고기를 생산하는 일은 삶을 충만하게 만들지 못한다. 소득을 발생시킬 수는 있겠지만 삶을 충만하게 할 수는 없다.
-10월 1일

 

 

다들 느끼고 있다.
우리가 사는 세상은 지속 불가능하다. 이 세상에서 지속 가능한 것은 아무것도없다. 이 세상이 지속 가능했던 적도 없다. 그런데 다들 별일 아닌 척한다. 좋은 생각이 있는 척, 바꿀 수 있는 척 한다. 왜들 그러는지 잘 모르겠다. 

내가 임업에 약간 관심을 갖게 된 이유는 유산으로 물려받은 숲이 조금 있기 때문이다. 모든 일에는 이유가 있다.모두베기는 인류의 멸종을 초래할 수 있는 위험 요인 중 하나다. 그물이 낡으면 한 가닥 한 가닥 닳다가 어느 날 갑자기 찢어지겠지만 정말 찢어지기 전까지는 닳는 줄 잘 모른다. 모두베기 위주의 임업은 조만간 생태계를 완전히 파괴할 것이다.
삼림부(Skogsstyrelsen)가 비벌목 임업을 위한 재원을 마련했다고 하니 다행이다. 삼림부 사람들과 이야기해 보면 지금 비벌목 논의가 뜨거운가 보다, 비벌목이 한창인가 보다, 비벌목이 많은 사람의 관심사가 됐나 보다하는, 느낌이 든다.
내가 비벌목 예정지 면적이 얼마나 되는지 물어봤다. 대답을 듣고 계산해보니 아무리 넓게 잡아도 벌목 가능 면적의 1,000분의 1에 불과하다.
-5월 3일

 

 

지금 내 생활은 처음 목장에 왔을 때 예상했던 미래와는 전혀 딴판이다. 양과의 관계가 이렇게 굳건해지다니, 전혀 생각지 못했던 일이다. 방목장, 변덕스러운 날씨, 변화하는 계절, 풀, 나무, 덤불숲, 축사, 울타리, 판자, 못 같은 것들과의 관계까지 이렇게 굳건해지다니.목장 생활을 처음 시작했을 때 우리에게는 이상이 있었다. 공동체라는 이상, 자급자족이라는 이상, 지속 가능한 라이프 스타일이라는 이상. 그런데 현실은 이상과 달랐다. 특히 공동체의 이상과는 너무 달랐다. (언제나 부정적인 견해가 나중에 진실로 밝혀진다는 사실을 기억하자.)
나 혼자 양을 돌본 시기가 여러 번 있었다. 처음에는 오기로 해 놓고 안 온 사람들에게 화가 났다. 정확히 말하면 그 사람들에게 화가 났다기보다 평범한 생활이 그렇게 엄청난 매력을 발휘한다는 사실에 화가 났다. 일할 때 일하고 쉴 때 쉬면서 남들처럼 사는 생활이 양을 돌보는 생활보다 훨씬 쉬웠던 것이다.
양을 돌보는 일이 우리 삶에 꼭 필요하면 참 좋을 텐데 실은 그렇지 않다는 것도 내가 알게 된 사실 중 하나다. 작은 목축인(즉 적자 목축인)으로 사는 일을 응원해야 할 뚜렷한 이유는 하나도 없는데 양을 키우는 덴 꽤 많은 노동력이 들어간다.
예전에 고모가 나에게 이런 말을 했다. “동물은 사람에게 동물을 돌보고 싶은 마음이 들 때까지 기다려주지 않는단다.”
그렇게 시간이 흐른 뒤에야 비로소 나는 남들을 응원하고 싶은 마음을 버리는 법을 배웠고, 남들이 하는 일이나 남들이 하고 싶어 하는 일에 신경 쓰지 않는 법을 배웠다.

내가 하는 일은 양을 돌보는 것이고, 나는 내 일에 만족하고 있다.양들과 함께 어려움을 극복해 왔다는 사실은 나와 양 사이에 유대를 만들어 냈다. 물론 내가 양 한 마리 한 마리에게 유대를 느끼는 건 아니다(양 한 마리 한 마리는 조만간 도축된다.) 내가 유대를 느끼는 대상은 양 전체 그리고 양이라는 존재의 본능적 욕구다.나는 이제 남들에게 화를 내지 않는다.
-1월 5일

 

 

롤랑 바르트를 읽고 있는데 이런 말이 나온다.
“나의 메시지를 정확하게 전하려면(다시 말해 내 메시지의 의미를 정확하게 표현하려면), 다른 말로 바꾸는 것만으로는 부족하다. 독창적인 말, 아무도 쓴 적 없는 말로 바꾸어야 한다.”
어떤 일을 할 때 그 일 자체를 진짜로 하려면 그것을 습관으로 만들어선 안 된다. 그 일을 통해 경험을 얻었거나 인식을 얻었다면 그 일 자체를 진짜로 한 것이 아니다.
바르트는 문학에 대해 말하고 있다. 나는 모든 일에 적용할 수 있는 말이라고 생각한다.
어떤 일을 너무 잘하게 되면 그 일이 재미없어진다. 똑같은 농담을 두 번 연속으로 하기는 어렵다.
양들이 계속 신비로움을 간직해 주기를.
언젠가 양들이 전기의 허점을 찾아내는 날이 오기를. (양들이 탈출하기 못하도록 설치한 전기 울타리를 두고 하는 말이다)
-2월 15일

 

시골에 살면 교제할 기회가 적어 외로울 것이라 생각하는 사람들이 있다. 내가 만나는 상대는 양들이다.
교제냐 아니냐를 결정하는 것은 얼마나 자주 만나느냐가 아니다. 어떤 상대를 만나느냐가 더 중요하다.
다시 말해 나와 상대가 서로 동일시하기를 원하는가, 우리가 서로를 비추는 거울이 될 수 있는가가 중요하다. 사교의 기회는 시골이나 도시나 별반 다르지 않다. 시골에 처박힌 내가 만나는 상대는 양이다.
-11월 18일

 

이제 와 생각해 보면 숫양이 이해할 수 있는 관계는 결국 상하관계뿐이었던 것 같다.
언덕의 제왕이거나 먹잇감이거나.
한동안 녀석은 자기가 내 손아래 친구라는 것을 받아들이는 듯했지만 몇 달 못 가 또 나를 들이받았다. 나는 이번에도 녀석을 붙잡아 바닥에 드러눕혔고, 사흘 만에 또 들이받혔다. 나는 또다시 녀석을 붙잡아 바닥에 드러눕혔고, 이번에는 30초 만에 다시 들이받혔다.
관계는 그렇게 끝났다. 우리는 더 이상 친구가 아니었다. 나는 녀석을 멀리했다.
양 떼를 보살피기가 너무 어려워졌다.
끔찍한 소리같지만 녀석을 도축했더니 모든 것이 편해졌다.
-12월 20일

 

 

녀석들을 상대할 때는 관계형성법이니 동기부여책이니 하는 것을 고민할 필요도, 수행평가를 실시할 필요도 없다.
녀석들이 하는 일에 응원과 지지를 보내줄 필요도 없다.

하긴, 녀석들이 무슨 일을 한다고 할 수도 없겠다. 되새김질을 일이라고 할 수 있다면 모르겠지만.
-2월 17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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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랑한다고 했다가 죽이겠다고 했다가> 원제 : Fårdagboken (2017년)


지은이 악셀 린덴
옮긴이 김정아
펴낸곳 심플라이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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