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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OOK] 풍부의 추월차선

[책]<모든 삶은 흐른다>땅을 거부하는 자유로운 영혼들에게/ 프랑스최고철학과 교수의 인문에세이/ 아마존베스트셀러

by 돌냥 2023. 9. 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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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생의 수수께끼를 풀고 싶다면 바다 앞에 서라

 

외딴 섬처럼 고립된 가짜 지상낙원 같은 베트남의 한 리조트 안에서 5일 보내는 동안 이 책을 읽었다

 

어릴 적 수영을 가르쳐주겠다면서 발이 닿지 않은 깊은 바다 한가운데 나를 끌고 들어가 머리를 계속 처넣으며 한 시간이 넘도록 물을 먹였던 싸이코패스 근성이 충만했던 사촌오빠 덕에 나는 한동안 물을 무서워했다 정확히 말하자면 바다 수영은 그날 뒤로 공포가 됐다 한동안 바다는 나에게 쉼, 안식, 평화보다는 언제나 죽음과 곧 맞닿아있는 거친 야생이자 언제라도 개미처럼 단번에 눌려죽을 수 있는 손 쓸수 없는 거대한 힘이었다

그런 내게 바다를 갈망하게 된 것은 이꼴 저꼴을 본 후 나에게 쌓인 어떤 갈망 때문인지 아니면 내가 이제서야 바다의 참 존재감을 알게 되서인지는 잘 모르겠다 다만 당시 나의 상태와 저자의 글은 거의 동시적으로 자동 연결되듯 묘한 현장감으로 이어졌다

 

재미있게도 저자는 이 책을 실제 바다를 항해하면서 쓴 것도, 해변에서 긴 바캉스를 보낸 후 쓴 것 아니다 한창 우울했을 때, 살면서 위로가 가장 간절한 시절 쓴 책이라고 한다 그래서인가, 특정한 행동 개선을 요구하고 구체적인 실행방법을 지시하는 오늘날 수많은 자기계발서와는 다르게 이 책은 내 안의 내부의 엔진 자체를 수리하도록 자발성을 자극하는 근본적인 영감들을 제시한다 

 

고대부터 많은 철학자들은 인간의 삶을 표현할 때 바다를 통해 많이 은유해왔다 파스칼은 인간의 상태를 끝과 구언이 없는 끔찍한 무인도에 난파된 상태, 의미와 기준이 상실된 상태로 묘사했다

저자는 바다와 관련된 모든 속성과 그 은유를 통해 아주 단순하지만 까맣게 망각하고 있던 삶의 진실을 하나 하나 되짚어준다 바다의 성질과 바다를 대해야 하는 태도가 당장 내 삶과 무슨 상관이 있는가? 많은 나이는 아니지만 내가 이 나이가 되자 이런 것을 ‘지혜’라고 말한다는 것을 알게 되었다 적용범위가 한정된 하나 문제에서의 한가지 대책은 대대 수많은 변수들을 무시한 결과적으로 굉장히 단편적이고 편향된 것이 될 수 밖에 없다 반해 로랑스 드빌레르는 바다를 연상하기만해도 알 수 있는 것들을 통해 우리가 삶에 봉착한 난관들에 생각보다 많은 답들을 포착할 수 있다고 말한다

 

무인도, 해적, 등대, 크라켄, 모비딕, 세이렌 등…바다와 관련된 소재들을 자유롭게 차용하는 저자의 통찰력과 상상력은 놀랍다 날마다 흔들리고 휘청이는 무한경쟁의 삶 속에서 망망한 바다의 작은 섬처럼 살아가는 우리에게 스스로 헤엄을 유도하고 바다에서 살아남는 매뉴얼을 안내한다

 

평소 철학서를 잘 보지도 않지만 뭐든 명료 체계에 대한 강박이 있는 한국인들이 보기엔 생소할 정도로 자유롭고 아름다움 마저 느껴지는 철학책이다 깊이감은 그 밑이 웅장한 해저 구만리지만 읽는 동안은 매우 쉽게 읽히기 때문에 읽고 나면 반드시 본 자리를 다시 뒤적이게 될 책이다

 

 

 

 

휴가. 바캉스. 오로지 나만을 위한 시간에 꼭 필요한 책

저자는 현대인들이 로마의 유산인 ‘오티움’을 잃어버렸다고 말한다 스스로 조금도 쉴 틈을 주지 않고 끊임없이 ‘어떤 활동’을 한다 주말, 바캉스, 심지어 은퇴 후에도 우리는 ‘네코티움’에서 벗어나지 못한다

과거 폭염을 피해 지방으로 떠난 로마귀족들은 이후 인간들에게 삶의 예술이 무엇인지 알려주었다 그 삶의 예술이란 ‘유유자적’, 곧 오티움(otium)이다 독서, 철학, 명상, 대화 등 비생산적인 것에만 몰두하며 영혼과 정신을 갈고 닦는 시간이다

오티움과 반대말인 네고티움 negotium은 직역하면 '휴식이 아닌 것'으로, 일이나 업무 등 상업적인 활동을 의미한다 네고티움은 곧 분주함이다 ("ne-"라는 부정 접두사와 ‘여가나 휴식’을 뜻하는 “otium"이라는 단어가 결합하여 만들어진 합성어다)

‘바캉스’라는 용어도 라틴어 ‘바카레(vacare)’에서 나왔다 ‘아무것도 없는 상태’를 말한다 담당자가 없을 때 ‘공석’이란 말을 쓰는데 이 때 사용되는 형용사가 ‘바캉(vacant)’이다

 

완벽히 비어있는 상태, 자유로운 상태가 곧 바캉스라는 뜻이다 바캉스를 완전히 즐기기 위해선 오히려 철저히 혼자여야 한다 주변을 비우고 모든 요청, 부탁, 타인의 시선에서 벗어나 ‘자신이 존재하는 것을 느끼게 해주는 것들에만 집중’하는 것이다

그저 느린 거나 아무것도 안하는 것이 아니라 온 촉각을 세워 내 안에 나를 느낄 수 있게 하는 것들에 집중하고 그 상태에 몰입하는 것이다 바쁜 스케쥴과 언제나 그 다음 ‘해야만 하는 것들’로 나를 꼭두각시 삼는 패턴이 익숙했던 내게 눈에 보이는 현실적 변화가 일어난 것 없이 내 정신 속에 일어난 내적인 변화-궁극의 평안과 몰입-들이 얼마나 신기했는지 모른다

 

‘하필 바캉스 중에 만난 이 책’이 얼마나 감사하던지. 비록 혼자는 아니었지만 저자가 말하는 부분들을 내 안에서 하나 하나 느껴가면서 나는 그 5일 동안 태어나 처음으로 모든 것과 끊어진 해방감으로 느꼈다 그것은 죄책감이 아니었다 마땅히 그래야 하는 것을, 이제서야, 누군가의 부축으로 인해 겨우 경험하게 된 것이었다 그동안 우리가 이런 저런 방식으로 보내왔던 바캉스는 마치 시간과의 경쟁에 참여한 선수들처럼 보냈던 것(그리하여 한국으로 돌아가는 길 공항에서는 이 말을 그대로 반증하는 현실을 마주했다), 급속충전기에 삶을 며칠 꽂아둔 채(그것도 속으로는 끊임없이 휴가 뒤 직면해야 할 과제들을 떠올리며 쉼도 일도 아닌 채로) ‘다시 열심히 일하기 위한 재충전’으로써 노예에게 허락된 잠깐의 유예를 즐겼을 뿐이라는 것도.

 

 

삶은 당신에게 이미 주고자 하는 걸 모두 주었다. 마치 바다처럼.

자아가 무거운 이유는 지금 나의 모습 때문이 아니다. 내가 되고 싶은 모습 때문이다. 사랑받고 인정받고 주목받고 싶은 욕망이 만든 그것 말이다. 지금의 내가 아니라 남들에게 보여주고 싶은 나의 모습 때문에 자아는 점점 더 무거워진다.
수영을 하면 이러한 자아에서 벗어나 있는 그대로의 나 자신이 되는 걸 경험할 수 있다. 우리는 전체에 속한 아주 작은 부분에 불과하다. 바다를 느끼는 것은 광활한 세계와 소통하는 것만이 아니다. 어떻게 보면 사소한 자아에서 해방되는 것이라 할 수 있다. 자기를 증명하기, 자랑하기, 타인을 무시하기, 포기하기 등 자아가 지시하는 모든 것으로부터 해방되는 것이다.

-헤엄 / 자아라는 부담과의 결별

 

 

우리에게는 각자 자신만의 커다란 닻이 있다. 마음속이 바람이 몰아칠 때 고통을 가라앉혀주고 쉴 수 있게 해주는 커다란 닻이다. 모든 것이 마음대로 되지 않을 때 번민을 잠재워주고 안정을 가져다줄 수 있는 중심적인 닻은 어디에 있을까? 이러한 성스러운 닻을 알아보고 의지하려면 은총을 구할 수 있어야 한다. 자신을 돕는 것은 결국 자기 자신이다. 그러기 위해서는 자신을 향해 시선을 돌리고 “이제 끝났어”라고 분명하게 말하며 답답한 상황을 끝낼 수 있어야 한다.
어떻게 해도 안 되는 관계, 일, 사정에 더 이상 집착하지 않는 것이 그 시작이다.

-닻/ 바람에 휘청이지 않도록

 

 

익숙함에 속아 짠맛에 무뎌진 내가 정말로 원하는 걸 무엇일까? 익숙한 것은 더 이상 탐구하고 새롭게 감상할 수 없게 된다. 무뎌졌기 때문이다. 우리의 욕망은 일단 어느 정도 채워지면 순서대로 수그러든다. 그리고 그 대상을 더 이상 욕망하지 않는 상태가 된다.
짠맛을 되찾아야 한다. 익숙한 것도 새롭게 보이면서 모든 것이 달라진다. 모든 것에서 쾌락을 느끼라는 게 아니다. 하나를 정해 여유를 가지고 오랫동안 천천히 음미하라는 것이다. 무엇인가를 욕망하는 것은 소비 행위가 아니다. 욕망은 타깃을 정해 먹고 마시고 보고 끝내는 것이 아니라 계속 음미하는 것이다.
바다 소금은 너무 말라도 안되고 너무 젖어도 안된다. 동일한 물의 양이 중요하다. 그것처럼 우리 의 인생도 완전히 실망만 시키고 질리게 하는 것도 없고 완전히 좋기만 한 것도 없다. 삶은 양면이지 절대 단면이 아니다. 삶은 당신에게 이미 주고자 하는 걸 모두 주었다.

-바다소금 / 가진 것을 새롭게 음미하는 법

 

 

복수심은 어디에서 올까? 분노다. 우리는 살면서 뭔가를 도둑맞았을 때 그것을 되찾아오고 싶어 한다. 분노하는 사람들은 혼란을 원하지 않는다. 원하는 것은 질서다. 원래의 질서로 되돌려 놓겠다는 마음에서 분노는 시작된다.
복수심에 불타는 사람은 부당한 일은 일어나지 않았어야 한다고 늘 생각한다. 그러나 부당함이 없었던 일이 되지는 않는다.오히려 기억만 선명하게 되살릴 뿐이다. 분노만 해서는 원하는 것을 얻을 수 없다. 잔인하게 들리겠지만 현실은 현실이다. 이미 일어난 일은 되돌릴 수 없다는 현실 앞에서 사람들은 울부짖으며 분노한다. 마치 벽에 대고 욕하는 것처럼, 벽은 꼼짝도 하지 않는다. 흰 고래는 이처럼 가혹한 현실을 상징한다. 우리의 욕망이 무엇이든, 우리의 원한이 무엇이든 현실을 귀를 닫고 듣지 않는다.
우리가 쫓는 흰 고래는 무엇일까? 우리는 의미, 이유, 꿈을 찾아 삶이라는 바다에서 헤맨다. 이러한 것이 없다면 에이해브 선장이 말한대로 “모든 것은 무의미할 것이다. 그리고 우리가 사는 땅은 거대한 제로에 지나지 않을 것이다” 선장은 모비 딕이라는 저주스러운 향유고래에 집착했다. 동시에 그 고래는 선장이 살아가는 의미였다. 육지에서든 바다에서든 뭔가를 이루고자 하는 열정이 없다면 살아갈 수 없다. 우리가 마음속으로 끈질기게 추구하는 것이 무엇인지 그 수수께끼를 밝히는 것은 우리의 몫이다. 우리가 뒤쫓는 흰 고래가 무엇인지 아는 것도 우리가 해야한다.

-모비 딕/ 자신이 무엇을 추구하는 지 아는 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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