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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잡기] 雜記

[미술치료]첫 입문. 크레이머미술치료학교온라인 북스터디<치료로서의 미술>1장 이디스 크레이머의 신념/미술은 삶의 경험을 확장하는 수단

by 돌냥 2023. 10. 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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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1부 크레이머의 개인사

1장. 화가로서 그리고 미술치료사로서의 신념

<치료로서의 미술> 크레이머 미술치료 학교 '온라인 북스터디' 강좌들으며 자습 정리

 

나는 소멸해버릴 위기에 처한 경험하는 능력을 널리 알리고, 또한 그러한 경험하는 능력을 풍부하게 하고 촉진하는 것을 현 시대를 사는 화가로서의 나의 과업으로 본다. 이 능력은 산업사회가 만들어내는 시각적으로 의미 없고 시끄러운 소음이 내는 불협화음으로 고통당하는 자연에서 의미를 찾는 역할을 하는데, 오늘날 이러한 능력은 위태로워지고 있다. 우리는 광고 산업과 정치가들이 선전하는 매력적으로 보이는 공약, 설득, 협박의 외침과 속삭임에 노출되어 있다. 우리는 이러한 자극을 무시하는 것을 배워야만 한다.

 

▶요안나 설명: ‘인간 경험의 3요소’는 생각, 감정, 행동이다. 현대인들은 생각보다 알고리즘에 의해 살고, 행동하기 보다 앉아서 살아간다. 심리치료는 나에 대해 자각하는 것(인지행동치료), 나의 경험에 대해 알아차리게 하는 것이다. 크레이머는 ‘미술은 삶의 경험과 동등한 것을 창조함으로써 인간 경험의 영역을 확장시키는 수단이다. 그것은 마음대로 경험을 선택하고 바꾸고 되풀이할 수 있는 영역이다’라고 하였다. 또한 미술현장에서의 경험이란 미술을 통하여 경험을 더 풍부하고 깊게 하는 속성을 의미한다. 틀림없이 잘 그린 그림인 입시미술에서 감동이나 가치를 못 느끼는 이유는 스킬만 있지 작가의 어떠한 생각도 독특한 감정이나 메시지라는 ‘작가 경험’이 들어가있지 않아서다. 진실된 미술에 작가의 경험이 들어가 있듯 진정한 치료로서의 미술 역시 대상에게 생각, 감정, 행동을 묻고 그것을 미술에 담게 해야 한다.

 

현대인들이 왜 병들었는가? 진실된 자기로 살지 않았기 때문이다. 진실된 자기 모습에 만족을 못하거나 부모나 선생님이 진실된 내 모습을 자꾸만 부정하거나 그렇게 만들었기 때문이다. 이런 저런 외부의 요구나 기대치, 이상적인 모습을 지속적으로 강요받으면서 자꾸만 그 모습이 되려고 애쓰고 포장하는 중에 문제는 발생한다. 로저스에 의하면 심리치료가 필요한 인간의 문제들은 결국 ‘내 인생 나답게 살지 못해서’ 생기는 문제들이다. 이 맥락에 의하면 미술치료는 그림을 못그린다해도 못그리면 못그리는 대로 정성껏 진실되게 그리고, 자신의 그림을 소중히 여기는 과정을 통해 치유가 되는 것이다. (1강 26분) 선생님의 인위적인 덧댐으로 그럴듯한 결과가 나오는 것이 치료의 목적이 아니며 그것은 반치료적인 상태다. 당장 현재 모습 자체로 행복해져야 바람직한 것이다.

 

 

도시환경은 필연적으로 우리로 하여금 자폐적이게 한다. 우리는 미친 사람이나 범죄자와 마주치지 않기 위해서 군중 속에서 눈이 마주치는 것을 피한. (덧: 현재감이 느껴지는 문장이지만 참고로 이 책의 원본은 2000년에 나왔다. 우리나라 역시 21세기로 들어서면서 묻지마 범죄수가 기하급수적으로 늘어났으며 지금도 여전히 무동기범죄(이상동기범죄)가 수시로 일어나는 사회에 살고 있다)

우리는 알 수 없는 곳에서 온도, 빛, 공기가 조절되는 밀폐된 실내에서 일하다 보면, 우리는 절제하고 포기하는 것에 길들여진다. 생존을 위해서는 점점 더 자극들을 절제해야 한다. 하지만 과잉자극으로부터 자신을 보호하기 위해 과잉자극에 대해 정서적으로 반응하는 것을 점점 하지 않으면 정서적인 기능은 가지고 있지만 결국 정서는 죽은 것이나 다름없게 된다.

그러한 죽음과 같은 상태를 겪지 않으려면 자극들에 대해 당당히 맞서고 자극들을 지각해야만 한다. 그 자극들이 불쾌하거나 혼란스러울지라도 말이다. 경험이 심상으로 표현된면, 괴상한 것들도 이해할 만하게 된다. 예를 들어, 산업쓰레기에 의해 오염된 토양에서 식물이 자랄 수는 없지만, 거대한 화학물질 탱크는 그것이 침범한 자연의 아름다움에 대항하여 위풍당당하게 서 있을 수 있다.

 

요안나 설명: 현대인들의 경험이 위태로워진 것은 산업화, 자본주의로 인한 시청각적 시각적 소음들이 심해졌으며 도시환경은 사람들을 부득이하게 다소 자폐적으로 만든다. 현대사회의 여러 자극이 심하다보니 도리어 자극이 무뎌져야, 자극을 절제해야만 살아남게 되었다.

자극이 이미지일 경우 안전하다. 또 두려움의 경험이 그 규모가 작아지면 더 이상 무섭지 않다. 동화책이나 그 반의 사이즈면 목도할 수 있고 다룰 수 있게 된다.

 

 

도시에서의 삶은 온갖 모순되는 것들로 채워져 있고, 우리의 형상화하는 미술작업은 그것을 반영한다. 아직 더럽혀지지 않은 숲과 풀밭으로 돌아가면서, 우리는 지체할 시간이 없을 뿐만 아니라 연약하고 위험에 처해져 있는 것들을 널리 알려야 한다. 우리가 본래 가지고 있는 지각력은 더 이상 안정되어 있지 않다.

지각(perceiving)하는 행동은 느린 과정이다. 그것은 기계적인 장치를 사용하여 서두르게 할 수 있는 것도 아니다. 미술가는 바로 그 지점에 있어야 한다. 비록 카메라를 통해 존재의 아주 짧은 순간을 기록할 수는 있겠지만, 그것은 우리에게 도달한 통합적인 메시지를 대치시킬 수는 없다. 통합적인 메시지는 단지 눈만을 통해서가 아니라, 움직이고 생각하는 마음 전체를 통해서 전해진다. 나는 카메라를 한 번도 사용해 본 적이 없다. 나는 현장에서 그림을 그리거나 스케치를 한 뒤, 더욱 복잡한 작업인 회화와 콜라주, 조각과 모자이크 등을 할 때 그것들을 이용한다.

바우하우스 교육 방법은 나에게 시각적인 미술에 대하여 이해하는 틀이 되어왔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나의 스타일은 확고하게 ‘구상주의’에 남아 있다. 개인적으로 화가로서 나는 공손한 지각력을 가지고 구체적인 주제를 표현하려고 한다.

 

 

제1차 세계대전 발발 전인, 20세기가 시작할 무렵에 성장한 예술가들은 서구 세계의 예술적 유산들로 둘러싸여 있었다. 피카소, 마티스, 코코슈가, 클레의 작품은 그리스 미술, 에트루리아(Etruscan) 미술, 로마 미술로부터 인상주의 미술에 이르기까지 서구 미술을 받아들여왔다. 이러한 바탕으로 미술가들은 아프리카 가면들뿐만 아니라, 동양의 미술 또한 수용했다. 그들의 유산은 참신한 능력을 미술가들에게 주었다. 아프리카와 동양의 미술은 젊은 예술가들에게 영향을 끼쳤고, 그 영향은 초현실주의, 추상주의, 순수주의에 이르기까지 영역을 넓혀왔다.

 

20세기의 끝에 서 있는 미술가인 우리들에게 미국뿐만 아니라 유럽에서도 서구세계의 미술은 역사가 되었다. 우리는 서구미술을 존경하고 공부할 수는 있지만, 더 이상 그것은 우리의 것이 아니다. 근대미술의 혁명에 힘을 불어넣은 축적된 지혜의 무게는 더 이상 우리와 함께 하지 않는다. 자주 가벼운 것으로 대치되곤 한다. 안젤름 키퍼의 힘있고 종종 부조화스럽게 여겨지는 작품은, 역사와 신화와 전후 독일의 문학적인 주제들을 그리려고 시도하였다. 이 시대의 가장 강력한 미술 중의 일부는 서구 문화의 종말이라는 비극에서 구체화되었다는 것은 재미있는 사실이다.

제2차세계대전의 종결과 함께 종말에 이른 문화와 미술로부터 분리된 우리의 현실에 직면하여 우리는 어떻게 할 것인가?

우리의 역사적인 상황은 좋지 않다. 미술은 언제나 어떤 사회적 기능을 담당할 때 가장 번성해 왔다. 미술이 도덕적이지 않을 때 미술은 종교를 위하여 일하거나 왕국 혹은 귀족들의 힘과 위세를 강화하는 데 시중들거나 떠오르는 중간계급이 스스로 우쭐대는 것을 기념할 수 있다. 미술은 그리스도의 고난 혹은 마리아의 아기 예수에 대한 사랑을 표현하는 것만큼이나 아시리아 왕국의 잔인성을 기념할 수 있다. 미술은 거짓말을 할 수 없다. 거만하게 잔인성을 단언하는 잔인한 시스템은 허풍적인 미술을 야기할 수 있다. 스탈린 치하의 러시아나 히틀러 치하의 독일과 같은 시스템은 그들이 야기한 고통을 부인하고 미술가들에게 거짓된 현실을 창조하라고 주문하지만, 그렇게 되면 이류의 공허한 미술만이 생산되는 것은 불가피하다.

 

서구의 산업사회는 또 다른 종류의 거짓을 요구한다. 미술은 반드시 소비를 촉진해야 한다는 것이다. 순수한 미술이 기여하는 사회적 기능은 더 이상 존재하지 않는 것처럼 보이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순수한 미술에의 열망은 존재하고 있다.

나의 책 <아동들과 함께 한 치료로서의 미술>의 첫 장을 시작하면서, 나는 매일의 일상에서 미술의 부재와 미술 실기에 향한 채워지지 않는 열정이, 미술치료의 전문성을 떠오르게 하는 데 기여했다는 생각을 표현했었다. 덧붙이자면, 미술치료는 미술이 실제로 사회구조에 봉사하는 희귀한 영역으로 보인다. 미술과 심리치료 양자는 내적 진실을 찾는 것을 뜻하기 때문에, 그 시도는 미술에 해롭지 않다. 치료로서의 미술을 통해 반드시 더 훌륭하고 좋은 미술을 낳을 수 있는 것은 아니지만, 그렇다고 더 과장되거나 거짓된 미술을 만들어내지는 않는다.

자신의 능력과 상상력과 미술가적 성실성이 의미 있게 쓰일 수 있는 곳을 찾고 있는 미술가들에게 미술치료는 도전해 볼 만한 분야이다.

나는 인생에서 나의 미술과 미술치료를 꽤 분리해 왔다. 미술치료사로서의 나의 경험은 나로 하여금 미술은 전적으로 난해하고 자기애적인 추구를 하는 것이 아니라는 것을 재확신하게 했다. 즉 그 경험은 나의 과업을 겸손하면서도 정중하게 접근할 수 있게 해주었다.

 

요안나 설명: 관심과 재능, 사회에 기여하고 싶은 마음이 있는 이들은 미술치료를 하기 적합하다. 비전공자라 하더라도 좋아한다면 좋아하는 마음이 바로 재능이다. 좋아하면 하게 되고, 하게 되면 개발된다. 프로이트는 본능(원초, 이드)/ 자아/ 초자아 가 있다고 했다. 신생아는 이드 덩어리다. 인간이 자라면서 이런 저런 초자아(내 안의 부모나 도덕선생)에 의해 제어받는다. 욕구와 초자아와의 갈등이 생기는 중에 자아가 그 둘(이드와 초자아)을 합의보도록 하는 중재자, 협상자 역할을 한다. 자아가 본연 기능을 잘 하는 사람일수록 건강하다. 자아의 여러 방어 기능들이 있고 그 가운데 정도가 심해지면 문제가 된다. 자아의 방어 기제 중 가장 대표적으로 건강한 것이 ‘승화’다. 본능을 그대로 행하지 않고 에너지원 삼아 전혀 다른 새로운 것, 사회적으로 생산적이거나 타인에게 유용한 것으로 바꿔낼 때 승화가 되었다고 말한다. 주로 예술과 관련되고 거의 모든 예술은 승화의 결과물이다. 미술은 승화의 결과물이다. 승화는 자아의 승리다. 곧 미술은 자아의 승리다. 그래서 넓은 의미에서 미술은 치유적이다. 음악이나 문학도 승화가 된다. 그러나 다섯살 어린 아이가 작곡을 하거나 시를 쓰는 등 창조를 하기란 일반적인 경우 다소 어려운 일이다. 인생 전체를 좌우하며 일생을 따라다니는 무의식, 성격이 형성되는 가장 결정적 시기가 바로 초기 아동기다. 바로 이 시기의 네살 다섯살에게도 승화가 일어날 수 있는, 거의 유일한 창조작업이 바로 미술이다.

 

 

 

나는 자신을 심리치료와 교육현장에서 특별화된 능력을 갖춘 유능한 화가로서 일반적인 자격요건을 갖춘 전문가라고 생각한다.

나의 아동심리학 이해의 이론적인 배경은 프로이트의 정신분석학에 주된 기초를 두고 있다. 그렇지만 나는 미술을 단지 도구로 사용하는 ‘심리 치료적 입장’보다는 ‘미술 자체가 치료적’이라는 생각에 더 주안점을 두고 있다.나의 치료적 매체는 인류만큼이나 오래된 것이다. 인간 사회가 존재해 온 이래로, 미술은 개인의 본능적인 충동과 사회의 요구 사이의 영원한 갈등을 해소하는 데 있어서 인간에게 도움을 주었다. 따라서 넓은 의미로 볼 때 모든 미술은 치료적이다. 미술현장에서 현대 심리학을 적용하는 미술가는 치료적인 생각을 받아들임으로써 미술의 치료적인 가치가 높아지도록 매체를 다루는 방법을 적응시켜야 하고, 미술적 창조성의 내적인 법칙과 모순될 수 있는 개념과 방법을 도입하여도 미술의 치료적인 가치가 파괴되고 약화되지 않도록 적응시켜야 한다.

 

미술치료사에게 화가와 교사로서의 기능과 치료사적 접근을 일치시키는 것은 언제나 쉽지 않다. 장애가 있는 아동들과 성인들을 미술의 영역으로 이끄는 교사로서의 기능에서 미술치료사는 치료서의 보살핌 안에서 개개인의 한계들을 받아들일 준비를 해야만 한다. 치료사는 어느 단계의 과정에도 흥미를 가져야만 한다. 치료사는 스타일의 다양성을 받아들이고 이해할 만큼 충분히 유연해야만 하고, 내담자의 개인적 필요에 따라 각 사람을 도울 방법을 찾을 수 있도록 융통성이 있어야만 한다.

비록 환자의 작품이 혼란과 불완전한 승화의 결과로 다듬어지지 않은 성적이고 공격적인 충동성들의 아름답지 않은 표현일지라도 치료사로서 받아들여야만 한다. 그러나 모든 치료에서 기본적인 이러한 용납의 자세는 화가로서의 안목을 둔하게 하지 않는다. 교사는 가짜와 진짜를, 장애와 한계를, 퇴행과 진보를, 피상적인 표현과 진정한 의사소통을 구별하기 위해서 화가로서의 통합성을 유지해야만 한다.

비록 나의 치료적인 접근이 무의식에 남아 있는 심리적 과정의 자각을 포함하고 있지만, 노출된 무의식적인 재료 혹은 무의식적인 의미에 대한 해석도 나의 치료방법에 가끔 포함된다.

 

미술치료는 본질적으로 자아(ego)를 지지하는 수단으로 표현된다. 미술의 힘은, 정신적으로 와해시키지 않으면서도 심리적인 기관을 탄력적으로 회복하도록 촉진하거나 혹은 무능력해진 방어수단을 다시 재조정하는 데 있다. 그러므로 미술치료는 심리치료를 대체하지는 않지만, 심리치료를 보완하거나 지지하는 치료적인 환경 요소를 구성한다.

 

요안나 설명: 그러므로 미술치료는 심리치료를 보완하거나 돕는 치료적 환경의 한 구성요소로 심리치료를 대체하지는 않는다(신 버전 번역) 둘은 대체 가능 관계가 아니라 다른 것이다.

보완과 돕는 것이 열등의 의미가 아니다. 이를 수용할 때 미술치료로서의 지평과 저변이 넓어진다. 누구에게나 어려운 순간이 찾아오고 수시로 감기가 찾아오듯 심리에도 치료가 필요한 때가 온다. 그러나 그들 모두 정신병원에 가서 치료받는 것은 아니다. 현실적으로 정신과에 가지 않더라도 심리케어를 필요로 하는 사람들이 열 배는 더 많다. 미술’심리치료’라고 하는 순간 심리치료라는 레드오션으로 들어가야 한다. 미술치료사는 겸손할수록 더 기회를 얻고 더 경쟁에서 벗어나고 더 유능해질 수 있다.

 

 

미술치료사가 내담자들과의 미술작업에서 틀에 박히지 않은 형태와 내용을 격려할 때, 내담자들은 예술적인 표현들을 촉진하는 데 몰두한다. 정신치료에서 대화로 하는 치료와 임상 치료에서 놀이와 대화를 통한 치료는 전형적으로 형태가 없고 유동적인 것이다. 형태보다 내용이 본질적이다. 그러나 미술치료에서는 형태와 내용이 동등하게 중요하고, 질서와 구조(형태)는 예술적인 창조물을 통하여 나타나는데, 미술 경험은 문제를 해결하는데 강력한 도움을 주고, 경험자체를 완전히 자기 것으로 만들게 한다. 수잔 랭거의 말을 빌리면 ‘미술의 본질적 기능은 우리가 경험을 숙고하고 이해하기 위해서 경험을 구체화하는 것이다.

 

요안나 설명: 미술치료는 실제로 몸으로 하는 것, 지금 여기에서 하는 것이다. 그것이 언어로 하는 치료와의 차이점이자 강점이다. 현장에서 바로 대안적 행동을 하는 시도와 변화가 가능하며, 결과를 눈으로 보게 되고 통찰하게 되며 계속 그 흔적을 만들어갈 수 있다. 그리하여 경험을 객관화하여 바라볼 수 있게 해준다.

 

 


 

 

 

벌써 두 달 여 전 일이다. 

미술치료사 진로특강 공개 세미나를 듣고 어영부영 세월을 보내다가 지난 달 말 드디어 수강신청을 했다. 
추석연휴가 끼어서 교재를 아직 택배로 받지 못했지만 이전에 학교 도서관에서 빌려놨던 책(2011년 구번역본)으로 공부를 했다. 


OT포함 세개 강의를 세 번씩이나 들었다. 책을 읽고난 후 한번, 질문을 만들어 본 후 한번, 그리고 마지막은 정리를 하면서 들었다.
현재까지의 느낌은, (솔직히 나한테 안어울리는 일이라고 생각했는데) 왠지 나같은 사람이 미술치료를 하는 게 맞다는 생각. 그리고 현재로서는 누구를 (감히)치료한다기 보다는 내가 나 자신을 위해서(누구도 아닌 나 자신 좀 이해하기 위해서..) 이것을 배워놓아야 하겠다는 생각. 딱 거기 까지다. 


미술치료사의 조건 중 관심과 재능, 기여욕구 까지는 맞는데 강의 때 들은 것처럼 내가 현재 '어른'이 맞는지는 모르겠다. 
강의를 계속 들어가면서 현재 내가 어른 상태가 맞는지 확인할 수 있을까?(스스로 의존적이라고 생각해서인지 계속 의심 중)
처음부터 입문을 세 번이나 들으면서 오버한 것이 아닌가 싶지만 간만에 '오로지 나만을 위해' 동기가 올라오는 일에, 모든 것이 얼추 맞는 지금 이 타이밍에, 한동안 집중해야겠다는 생각만 하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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