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부 크레이머의 개인사
2장. 크레이머에 의해 실행된 미술치료의 역사와 혈통
내가 1938년에 처음 미국으로 왔을 때 접할 수 있었던, 새롭고 비전통적인 것들에 대한 관대함과 개방성이 1996년 현재의 학계에서도 여전히 찾아볼 수 있다는 것은 매우 기쁜 일이다.
나는 1959년 이래로 대학원 과정에서 미술치료사들을 훈련하고 있지만, 어떠한 학위도 가지고 있지는 않다. 내가 1950년에 월트윅 소년학교에서 처음으로 미술치료 프로그램을 지도하고 있을 때, 마거릿 나움버그는 이미 첫 번째 책을 썼고, ‘미술치료’라는 용어를 소개했다. 그러나 그때까지도 아직 미술치료를 위한 정신적인 학위과정은 존재하지 않았다. 미국의 나움버그와 영국의 아드리언 힐이 주도한 미술치료에 관한 좋은 연구들을 수행할 때 함께 할 수 있었던 것이 나에게는 행운이었다. 노르비치대학에서 명예박사학위를 받은, 나의 친구이자 동료인 엘리너 울먼 역시 선구자 중 한 명이다. 이 작은 그룹에서 아직까지 살아 있는 사람이 그녀뿐이라는 것이 슬프다.
훗날 나의 직업이 되어버린 미술치료에 공식적인 훈련과정이 그 당시에는 존재하지 않았던 것이 나 같은 사람에게는 많은 장점을 안겨주었다. 나는 화가로서 열정적인 삶을 살고 있었기 때문에, 정규 교육을 받는 데 시간을 내느라 작품 활동에 전념하지 못하는 것을 견디기란 불가능하였을 것이다.
또한 내가 만일 정규적인 훈련을 받았더라면, 나의 학업은 나에게 경제적으로 부담이 되었을 것이다. 그래서 생계와 임대료를 위해서 일할 뿐만 아니라, 학자금을 갚기 위하여 일하게 되었을 것이다. 젊은 미술치료사들은 이제 이러한 문제들과 싸워야만 하고, 그것은 매우 고통스러운 문제이다.
형식을 갖춘 훈련을 경험하는 대신에, 나는 1920년대 후반과 1930년대에 고향 비엔나에서 당시에 떠오른 생각과 정보들을 구체화할 수 있었다. 비엔나는 배우들과 예술가들과 정치적으로 이상주의자들과 정신분석학자들이 살고 있었던 보헤미안적인 환경이었다.
당시에 정신분석학자들은, 1960년대와 1970년대 미국에서의 정신분석학적 기반과는 달리 사회적 생각과 관습에 반목하는 매우 혁명적인 그룹이었다. 그리고 나는 일찍부터 안나 프로이트와 에릭 에릭슨과 다른 초기 아동분석학자들에 의해 실행된 아동분석학과 정신분석적인 교육을 접하게 되었다. 나는 예술 사학자이면서 후에 정신분석학자가 되었고, 그의 책 <미술에서의 정신분석적 탐색>에서 처음으로 이러한 훈련을 조합한 어니스트 크리스의 보고서들을 읽었다.
미술교육 현장에서, 나는 《인간을 위한 미술 교육(Creative and Mental Growth)》(1957)의 저자인 빅터 로웬펠드(Victor Lowenfeld)가 시각장애인들과 한 초기 작업을 알게 되었다. 나는 그의 지도 아래 앞을 보지 못하는 아동들이 만든 조각들을 본 적도 있다. 시각 장애인들과 한 나의 작업은 그의 아이디어에서 정보를 얻은 것이다.
나는 또한 순수미술 분야에서 좋은 스승을 두었고, 미술대학에서 전공하지는 않았지만 몇몇 대가들로부터 배울 수 있었던 것은 나에게 행운이었다. 그들 중에 가장 영향을 끼친 사람은 프리들 디커(Friedl Dicker)이다. 그녀는 비엔나에서 요하네스 이텐(Johannes Itten)의 제자로 있었고, 후에 그를 따라 바이마르(Weimar)에 있는 바우하우스로 갔다. 그녀는 거기에서 배우고 가르쳤다. 디커의 이름은 미국에서는 잘 알려져 있지 않다. 나는 그럼에도 불구하고 미술치료사라면 디커라는 여성과 그녀의 생각 그리고 그녀의 죽음에 대해서 알아야만 한다고 생각한다.
디커는 매우 재능있는 미술가였고, 또한 아동과 성인을 가르치는 데 영감있는 교사였다. 1934년부터 1938년에 이르기까지, 디커는 프라하에서 독일어를 말하는 아동들에게 미술을 가르쳤다. 그들 중에 몇몇 아동들은 독일로부터 피신한 정치적인 망명자들이었고 그들은 체코슬로바키아 공화국에서 임시 피난처를 찾았던 것이다.
나는 당시에 보조자로서 그녀의 작업을 도왔고 그녀의 방법들을 배울 수 있었다. 그녀의 방법은 이텐의 생각과 로웬펠드의 개념과 그녀 자신의 생각들이 결합된 것이었다. 후에 디커는 유대인이기 때문에 1942년부터 1944년까지 테레진(Terezin) 강제수용소에 수용되었다. 그녀는 수용소에서 아동들에게 미술을 가르치는 데 헌신했다. 비록 디커와 그녀가 가르친 아동들의 대부분이 아우슈비츠에서 살해되었지만, 그들의 미술과 테레진에서 디커가 생존한 아동들에게 미술을 가르친 강의들을 미술의 치유력과 생명을 유지시키는 힘에 대한 증거가 되고 있다.
이러한 관점에서, 디커는 나움버그와 아드리언 힐과 함께 미술치료의 선구자로 간주될 수 있을 것이다. 사실상 디커의 작업이 나움버그와 힐보다 우리에게 더 가까운 것처럼 보인다. 극한의 조건 아래에서 일하였기에, 그녀의 작업은 도시에서 위험에 처한 아동들과 희망과 나아갈 미래가 없이 폭력적인 환경에서 사는 아동들과 감정적으로 육체적으로 쇠잔해져가는 아동들과 일하는 우리와 유사한 것이었다.
월트윅 소년학교에서 7년 동안, 자코비 병원(Jacobi Hospital)의 아동 정신병원에서 15년 동안, 그리고 시각 장애인을 위한 유대인 조합에서 14년 동안, 누구도 내가 돌보는 아동들과 순조롭게 작업하고 직원들과 좋은 업무 관계를 유지하는 것 이외에 어떠한 특별한 요구도 하지 않았다.
내 자산의 대부분은 미술과 미술교육과 정신분석적인 심리치료에 있다. 나로 하여금 미술치료를 실행하도록 가능케 한 것은 애니 리치(Annie Reich)박사와 함께한 프로이트적인 정신분석이었다. 그녀는 비엔나 출신인데, 적은 치료비를 받고도 나 같은 난민을 기꺼이 분석해 주었다. 나는 개인의 정신적인 연약함에 기인하는 함정들을 다루는데 필수적인 자기 인식을 얻을 수 있었고, 개인을 돌보는 과정에서 전이 현상을 인식하는 것에 대해 배웠다. 그래서 나는 자신을 코너에 몰아넣지 않을 수 있었고, 전이의 힘을 오용하지 않을 수 있었다.
실습기간 동안 숙련된 미술치료사에게 감독을 받으면서 미술치료사 실습생들이 보고서를 쓰는 것은 좋은 점이다. 그러나 나는 지나치게 규격화되어 채워 넣어야 하고 확인되어야 하는 형식으로 쓰는 것에 대해서는 염려한다. 특히 나는 치료를 시작할 때부터 치료 목표를 정해야 하는 것이 불안하다. 어떤 일이 일어나지, 내담자가 무엇을 성취해야 할 지 처음부터 어떻게 예언할 수 있겠는가?
미술과 심리치료의 본질은 유연성과 개방성에 있다. 그것은 또한 방어적인 습관이 해체되고 새로운 질서가 만들어지는 동안 무질서와 혼돈의 시기를 견디는 것이 포함된다. 항목별로 채워 넣는 보고서 형식이 어디에 이런 미묘한 점들을 기술할 수 있겠는가?
나는 전문적인 상황 안에서도 사용되고 있는 거짓된 과학적 언어들에 대해서도 염려한다. 신언어(Newspeak)가 남발되고 있다!
‘강화(reinforce)’라는 용어로 인하여 ‘확신하다, 잘 인식시키다, 지지하다, 주장하다, 받아들이다, 선발하다, 설득하다, 자신감을 주입하다’ 등과 같이 얼마나 많은 단어들이 사라졌는지 헤아려 보라.
스물 한 살 된 여성을 a 21-year-old female라고 말하는 것과 a young women 0f 21이라고 말하는 것의 차이, 95세 된 노신사를 a 95-year-old male이라고 말하는 것과 an old gentleman of 95라고 말하는 것의 차이를 고려해보라. (*크레이머는 사람과 동물을 동시에 지칭할 수 있는 male, female(수컷, 암컷)등의 용어를 사람에게 사용하는 것이 부적절하다고 강하게 표현한다)
가장 최악의 용어는 ‘적응적인(adaptive)’, ‘부적응적인(mala-daptive)’이라는 용어이다. 이 용어들은 자연의 역사로부터 나왔는데 부적응적인 종(species)의 경우에는 멸종된다는 것이다. 그러나 복잡하게 진화하는 종은 돌연변이와 혼돈을 필요로 한다. 이를 통해 그들 안에 있는 부적응적인 특성이 다른 부적응적인 것들과 조합되면 예기치 않은 새로운 형태의 종이 나타날 수 있기 때문이다.
내가 적응적인, 또는 부적응적인 행동이라는 것에 대하여 읽거나 들을 때면, 나는 무엇에 적응한 것이냐? 라고 질문한다. 우리는 범죄와 폭력적인 삶에 적응해야만 했던 청소년들과 작업한다. 자신을 바꾸면서 그들은 파멸할 수도 있고, 사회적으로 악한 체계에 잘못 적응할 수도 있다. 사실 그들은 그들이 살고 있는 세상에서 공존하며 사는 데 도움이 필요한 개인들일 뿐이다.
우리는 그들은 적응하도록(to adapt)하는 것이 아니라(그 적응이 그들을 죽이고 있다면)그들의 통합성을 희생시키지 않고 양보와 타협하며 사는 법(ways of adjusting)을 찾도록 도와야만 한다.
템플 그랜딘(Temple Grandin 자폐증환자로 동물 복지에 기여한 사람)박사는 《그림으로 생각하기(Thinking in Picture)》(1996)에서 ‘만약 내가 손가락 하나 까딱하는 것만으로 나의 자폐적인 증상을 멈출 수 있다고 할지라도 나는 그렇게 하지 않을 것이다. 그렇게 되면 나는 더 이상 진정한 나 자신이 아니기 때문이다’라고 말한다.
치료사로 살아가면서 당신은 당신이 바꿀 수 없는 실제적인 것들에 적응해야만 할 것이다.
당신은 구조화된 서류를 작성해야 하거나 작업상 보고서를 쓸 때, 종종 신언어를 써야 할 때가 있을 것이다. 일과 사람들에 대해서 기술할 때, 동료들과 토론할 때에도 간결한 정통 언어를 사용하라.
나는 또한 파트타임 미술치료사직을 얻기 위해서 노력하라고 말하고 싶다. 화가이자 미술치료사인 사람들을 고용할 때에는 두 사람의 파트타임 근무자가 한 사람의 종일 근무자보다 더 효과적으로 일할 수 있다는 것을 행정을 담당하는 사람들에게 가르쳐 주어라. 그렇게 된다면 치료사로서 일을 하면서도 자신의 미술 작업을 계속할 시간과 에너지를 가질 수 있어서, 당신이 돌보고 있는 사람들과 미술 작업을 계속할 열정을 끊임없이 만들어 낼 수 있을 것이다.
사고와 행동이 자유롭지 못한 숨 막히는 우리 사회에 당신을 적응시키지 말라. 여기 당신의 눈앞에 평생 동안 태평스럽게 사회에 적응하지 않은 한 나이든 숙녀가 있지 않은가. 그녀는 그렇게도 부적응적인 삶을 살아온 대가로 지금 박사 학위를 수여 받았다.
▶요안나 설명: 무조건 적응적인 사람으로 키우는 것이 옳은가? 현대에 와서는 부적응했기 때문이라기 보다 오히려 지나치게 적응하려고 애쓰다가 힘들어진 사람들이 훨씬 많다.
크레이머의 신조어에 대한 비판 부분은 모든 신조어에 대한 비판이 아니라, 단지 겉으로 있어 보이려고 가장한, 동시에 치료에는 도움이 안되는(방해되는) 단어들의 사용에 대해 주의를 권하고 있는 것이다.
있어보이려고 가장한 단어 쓰지마라. 적지 않은 미술치료사들이 전문용어를 많이 쓸수록 내담자가 자신을 더 전문적으로 여길 것이라는 착각이 팽배해있다. 내공있는 상담사일수록 알아듣기 쉽도록 정말 쉬운 말을 쓴다. 상담사가 내담자의 언어(내담자가 알아들을 수 있는 언어)를 쓰는 것이 더 좋다. 나 자신 잘난 거 어필하는 것과 치료 효과가 무슨 상관인가? 청소년과 말이 통해야 친밀감이 형성될 수 있다. 있어 보이게 하려는 것이 진짜 있는 게 아니다.
전문가라 하면 하루 종일 그걸 하는 게 전문가라고 생각할 것 같은데 크레이머는 그렇게 하지 말라고 한다. 파트타임을 해서 자신이 돌보고 있는 사람들과 함께 미술작업을 할 수 있는 열정과 에너지를 확보하는 것, 일을 하는 것이 미술치료를 더 잘할 수 있는 방법이라고 권장한다. 사랑과 에너지를 끊임없이 흘려보내야 하는 일이기 때문에 하루 종일 했다가는 완전히 소진될 수가 있다.
정리:
이번 장에서 Kramer는 미술 치료 분야에서의 그녀의 여정을 공유하고 있다. 그녀는 정식 학위도 없이 1959년부터 미술치료사 훈련을 시작했다. 대신 그녀는 상담과 심리치료의 온실인 비엔나의 보헤미안 환경에서 귀중한 통찰력을 얻을 수 있었다. 그곳에서 그녀는 저명한 인물들의 아동분석학과 정신분석적 교육을 탐색하였으며, 특히 시각 장애인을 대상으로 한 미술 교육 분야에서 Victor Lowenfeld의 작업 또한 접하게 되며 후에 그녀의 치료 작업에 아이디어를 얻게 되었다.
그녀는 미술대학을 전공하지 않았지만 여러 좋은 스승들을 두었으며 그 중에서도 미술 치료의 선구자로 간주될 수 있는 프리들 디커(Friedl Dicker)의 영향력이 가장 컸다고 말한다. 그녀는 재능있는 미술가이자 영감있는 교사였으며, 2차 세계대전 속 극한 조건에서의 그녀 작업들은 희망없고 폭력적인 환경 속의 아동들과 일하는 현대의 치료자들과 유사한 것이었다.
Kramer는 경력 전반에 걸쳐 다양한 환경에서 어린이와 함께 일했으며 처음부터 엄격한 치료 목표를 설정하기보다는 유연성과 개방성을 지키며 복합적인 사고 능력을 유지해야 한다고 말한다. 또한 그녀는 '거짓된 과학적 언어의 오남용'에 대한 우려를 표명하며 '모호하지 않고 간결한 정통언어'를 사용할 것을 권장한다.
마지막으로 그녀는 미술치료사로서 도움이 필요한 사람들을 충분히 제대로 돕기 위해서는 예술과 치료 작업의 균형을 위한 시간과 에너지가 필요하므로, 종일 근무가 아닌 파트타임직을 고려할 것을 제안한다. 그녀는 또한 불필요한 사회적 압력과 관습에 얽매이지 않을 것을 권하며, 자신 역시 평생 부적응적인 삶을 유지했지만 박사학위를 수여받았다며 미술치료사 후배들을 향한 솔직하고 따듯한 독려를 잊지 않는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