세줄요약.
내향인이 외향인처럼 살면 어떻게 될까?
이 책은 타고난 성향을 포용하면서도 어떻게 사회적 어려움을 극복하고 새로운 기회를 얻을 수 있는지 발견하게 한다.
외향성과의 균형을 찾는 저자의 1년간의 도전은 사회적 연결을 늘리면서 고유한 개성을 수용하는 방법에 대해 영감을 줄 것이다.
내가 자라온 과거 어느 때보다 '내향', '외향'이라는 단어가 익숙하게 들리는 시대다. 내가 어릴 적만해도 사람의 성향을 가르는 단어는 주로 '쟤는 내성적이야', '쟤는 붙임성(사교성)이 좋아' 이 정도였지만 지금은 정도 의료용어처럼 중립적이고 학문적인 입장에서 쓰이는 것 같다.
그럼에도 '내향형 인간에 대한 이미지는 현재에도 여전히 (동서양을 모두 아울러!) 세상을 살아가는 데 있어서, 가정과 직장과 인간관계 거의 모든 '처세'에 있어서 불리하고 손해를 입게 하는 성향으로 인식되고 있는 것처럼 보인다.
내향적인 사람이라고 해서 만날 혼자 시간을 보내는 것도, 사람을 대면하여 얘기하길 싫어하는 것은 아니다(화제에 따라서 세네시간씩 주구장창 떠들 수 있는 사람 중에는 오히려 내향적인 사람이 많아 보인다..).
반대로, 외향적인 사람이라고 해서 내향적인 사람보다 더 낫다거나 나쁜 것은 아니며 그들이 혼자있는 것을 좋아하지 않는 것은 더더욱 아니다.
책은 궁극적으로 내외향을 떠나 나의 바탕적 성향으로 인해 어떤 기회들을 놓치고 있는지, 또 이것을 알아내기 위해 어디까지 할 수 있는지에 대해 말하고 있다. 단순히 내성적 사람의 자기 극복기가 아닌 이유다(그랬다면 아마 읽지도 않았을 것이다).
혼자임이 좋지만 또 혼자라서 불안한 사람-내향형 인간의 거의 전부는 그러지 않을까 싶지만 전혀 불안하지 않은 인간들이 있다면 개인적으로 부럽기는 하다-에 속하는 저자는 자신의 '죄인된 운명'을 바꿔보기 위해 여러가지 새롭고, 돌발적이고, 때론 극단적인 일들 (외향형 인간이라고 해도 쉽게 시도하기 힘든)에 도전했다. 그리고 그 과정에서의 좌충우돌을 '내향형 인간 장점 발견 프로젝트'의 도전기로 매우 흥미롭게 풀어냈다.
심리상담을 해보면 타고난 본연의 기질과 성격은 바꾸기 힘들다는 것을(몇 년에 걸친 장기상담을 받더라도) 종종 듣게 된다.
'결점'이라는 것은 그 자체가 과오를 띠기 보다는 결국 사회에서 한 구성원으로써의 인간이 타인과의 조화를 이루거나 또는 사회적 이로움을 생산하는 데 있어서 도움이 되는가, 방해가 되는가의 기준에 비추어 정의되는 것일 것이다.
만약 그것이 결점을 지닌 본인이 인지하고 있음에도 고쳐지지 않는다면 살아가는 동안 수많은 인지부조화를 양산하게 된다. (스스로 고통스럽지 않다면 문제가 되지 않겠지만) 그것으로 인한 고통과 후회가 지속될 경우 내 결점을 수용하도록 타인을 바꾸던지, 아니면 결점을 지닌 자신을 바꾸던 지를 선택해야만 한다.
하지만 우리 (중 거의 전부)는 알고 있다. 타인과 세상을 바꾸는 것은 거의 불가능하며 사실 나 자신을 바꾸는 것(가장 어려워 보이는 그것)이 나의 태도로 발생된 온갖 모순, 손해, 후회를 제거할 수 있는 가장 빠른 길이라는 것을 말이다.
진화적 본능과의 싸움
대부분의 사람들은 대중 앞에서 말하는 걸 두려워한다. 사회 생물학자들은 이 두려움의 근원을 우리 조상들에게서 찾는다. 과거에는 무리에서 튀는 행동을 하면 공격을 받거나 배척을 당할 가능성이 컸다는 것이다. 즉 무대에 오른다는 것은 뿌리 깊은 진화적 본능과 싸워야 한다는 뜻이다(95쪽)
공연을 준비하며 알게 된 다른 참가자가 용기를 줬다. 전직 ‘오바마 대통령 연설비서관’인 그는 오바마도 무대에 서기 전엔 여러 번 리허설을 한다고 말했다. 비욘세도, 아델도 마찬가지라고 했다.(113쪽)
심리학자 브라이언 R. 리틀은 성격은 고정되어 있지 않으며, 단순히 천성이나 양육 방식 하나로 결정되는 것이 아니고 말한다. 성격은 행동의 결과로서, 언제든 바뀔 수 있다. ‘당신이 무엇을 하느냐에 따라 당신이라는 사람은 달라질 수 있다. 그리고 이런 생각은 지금까지 인간의 성격에 관해 머릿속에 박혀 있던 이전까지의 고정관념을 뒤집는 새로운 발견이 될 것이다.’(431쪽)
나 자신을 잃지 않으면서도 좀 더 외향적으로 변할 수 있다는 것은 나를 포함한 많은 내향형인간(그 중에서도 자신의 성향에 끊임없이 문제제기를 하는)들에게 분명 큰 영감과 동기부여를 줄 수 있는 메시지임에 분명하다. 그럼에도 나였다면 지하철에서 낯선 사람에게 말을 건다거나, 스탠드업 코미디와 즉흥 연주에 도전하거나 장소와 일정을 전혀 모르는 채로 그야말로 낯선 외국에 '툭 떨어지는' 임파서블급 미션들을 수행하지는 않겠지만 말이다.
예전의 내가 이 책을 읽었다면 그냥 생긴대로 살지 굳이 왜 이렇게 까지..? 생각을 했겠지만 지금의 내 소회는 좀 다르다.
불필요해 보이는 온갖 불편한 '사교적 활동'을 '내향형 인간'이 도전하였기에 훨씬 더 크고 의미 있는 보상이 주어질 수 있기 때문이다. 똑같은 행동에 있어서 외향형에겐 경우에 따라 그저 재채기나 기침 정도의 수준의 행동들이 내향형 인간에게는 어마어마한 도전과 극복이 될 수 있으며, 나아가 삶의 영역이 확장되는(그렇다면 외향형 인간에게의 '확장'이란 무엇을 의미할지 궁금해진다) 결정적 계기가 될 수도 있다.
외향성을 ‘시도’하기로 결심한 그녀의 1년 동안의 도전기는 두려움에 직면할 때에야 비로소 자기 자신이 어떤 인간인지 알게 된다는 사실을 일깨워준다.
책을 두껍게 채워낸 그녀의 다양하고 외향형 난이도가 상당히 높은 경험들은 내향형 인간들에게 있어 일종의 대리경험이 되어주며 읽는 동안만큼은 적잖은 카타르시스를 줄 수 있을 것이다. 중요한 것은 행동의 난이도 그것을 떠나서 수줍은 내향성에서 사교적 내향성으로 얼마든지 변화될 수 있다는 것, 더는 인간관계에서의 약속이나 행사계획이 취소되길 바라며 살지 않아도 된다는 것, 생각이 전환되면 그 자체로 과거와는 전혀 다른 결과 내용의 삶을 받아들이는 기회가 된다는 것이다.
솔직히 이야기하자면 나까지 그럴 필요는 없도록(?) 그녀가 먼저 이런 일들을 해냈다는 것이 고맙고 안도감을 느꼈다.
내향이니 외향이니 자기 상태에서의 안주보다는 더 많은 가능성들을 위해 어느 정도의 몰아붙임은 확실히 필요하다. 그러나 완전히 바꿀 필요는 없다. 그렇게 되어지지도 않는다.
이 책을 읽은 후 내가 취한 입장은 영원히 사라지지 않는 내 안의 내향성과 싸우지 말고 적당히 타협하며 ‘느슨한 연대’를 늘려가자는 것이다. 그녀가 저질렀던 익사이팅한 ‘외향성 퀘스트’ 중 내가 실행으로 옮길 수 있는 것은 단 한가지도 없어보이고 현재로선 그럴 의사도 없다. 다만 나에게 다양한 조언과 새로운 관점을 제시할 수 있는 ‘얄팍하고 느슨하게 엮인’ 이들(일, 동호회 등)을 더 많이 찾아가고 연결되어야 하겠다는 생각으로 이 책이 준 영감을 정리하기로 했다.
염두해 둘 점:
저자는 런던에 거주하는 중국계’미국인’이다. 어쩐지. (아, 이런 일반화는 안되지만..)
구석자리로 피신해있거나, 모임에서 일찍 도망가거나 하는 것은 내향형 한국인인 나로서는 그다지 심각하게 문제시되진 않는 내향적 증상들로 느껴지지만 어쨌든 그녀는 그런 자신의 외톨이 성향과 우울증으로부터 탈피하고 싶어했다.
책을 읽는 동안 한켠은 공감이 가면서도 한켠으로는 위화감에 가까운 것을 느낀 것은 어쩌면 내 깊은 마음으로부터 ‘적어도 내 기준에서는 당신은 내향형 인간이 아니야’라는 해석과 단정이 있었기 때문일 것이다(ㅎㅎㅎ;;)
독자들 중 나처럼 여기는 사람들이 은근히 있는 것도 같다. 특히 극내향인일 경우('I'지수가 압도적으로 높은) 공감과 위로를 얻고자 이 책을 폈다가 저자가 단지 ‘사회공포증이 있는 외향적 인간’이라는 것을 간파하고 책을 덮게 되는 일이 있을지도 모르겠다.
덧: 제목은 유쾌한 어조로 의역됐지만 개인적으로는 원제 (<Sorry I'm Late, I Didn't Want to Come> 늦어서 미안해요, 오고 싶지 않았어요)가 더 마음에 든다. 풍자적이면서도 내향인의 양가감정이라는 핵심을 담고 있기 때문이다.
[참고]
외향형의 사람들도 사회공포증(사회불안장애)를 경험할 수 있다. 사람들과의 일상적 수준의 상호작용을 즐기지만 특정 측면(연설, 공연 등 사람들이 많은 상황에서 평가를 받는)에서 극심한 불안을 느낄 수 있다.
즉 내/외향이 사교성이나 사회적 상황에 대한 ‘선호도’를 기준으로 한 특징이라면 사회불안장애는 특정 사회적 상황에 대한 강한 두려움과 회피와 같은 ‘정신건강 상태’이다.
평생에 걸쳐 한 사람에게 친구가 가장 많은 시기가 29세일 때라는 통계 결과를 본 적이 있다. 한편 다른 사람과 교류하는 횟수는 25세에 정점을 찍고 이후부터는 줄기 시작했다는 또 다른 연구 결과도 있었다. 그러니까 대체로 사람들은 30대 무렵부터 인간관계의 폭이 줄어들기 시작해 남은 평생 계속 하향 곡선을 그리게 된다는 것이다. 예전에 이런 기사를 읽을 때만 해도 내가 30대가 되어 그 통계 자료의 포스터 모델, 즉 통계치의 전형이 될 거라고는 전혀 생각도 못 했었다. (포스터에는 이렇게 적혀 있었다. ‘주의: 이 여자는 모르는 사람에게 말을 걸어 자신과 다른 사람을 위험에 빠뜨릴 수 있습니다.’)
아무리 똑똑하고 열심히 일하는 사람도 성공 여부는 그가 누구를 아느냐에 따라 결정된다는 생각 때문이었다. 인생에서 가장 큰 변화는 우리 주위의 아는 사람, 다시 말해 ‘느슨한 연대weak ties’로부터 시작된다고 밝힌 연구 자료가 있다. 가까운 친구나 가족을 포함하는 ‘강한 연대strong ties’는 유사한 인맥에 중복된 정보를 가지고 있을 가능성이 크다. 반면 동호회나 인터넷 등을 통해 느슨한 관계로 엮인 사람들은 우리에게 다양한 정보와 조언을 제공하고 새로운 관점을 제시한다. 그들을 통해 우리는 새로운 직업을 얻기도 하고, 뜻하지 않게 영감을 얻거나 제작 의뢰를 받기도 하고, 공동 연구자를 찾기도 한다. 가까운 사람에게서는 얻기 힘든 것들이다. 그렇기 때문에 우리와 약하게 연결된 사람들, 느슨한 연대가 실제로는 우리 삶에 더 큰 영향력을 행사할 수 있다고 연구는 주장한다.
나는 내향적이라서 구덩이에 빠진 게 아니다. 어쩌다 보니 구덩이에 빠진 내향적인 사람일 뿐이었다. 내향적이라도 행복하게 사는 사람은 세상에 많았고, 그들은 최선을 다해 자기 삶을 살고 있었다. 나도 구덩이에서 나오고 싶었다. 현재 내가 꾸리는 것보다 더 큰 삶이 나를 본질적으로 더 행복하게 해 줄 거라고 믿었다.
뭔가 달라져야 했다. 일단 스스로에게 질문을 던져 봤다. 수줍음 많은 내향적인 사람이 1년 동안 남들과 어울리기 좋아하는 외향적인 사람처럼 산다면 어떤 일이 벌어질까? 평소에는 무슨 수를 써서라도 피하려고 했던 위험한 사교 장소에 일부로, 제 발로 걸어 들어간다면?
결국 다 포기하고 숲으로 들어가 풀이나 뜯어먹고 늑대 무리와 사이좋게 지내다가 영양실조로 인생을 마감하게 되는 건 아닐까? 다시는 다른 사람과 관심도 없는 비트코인에 대해 논할 필요가 없어져, 혼자긴 해도 나름 행복한 상태로?
밑져야 본전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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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제 나가서 사람 좀 만나려고요 - 어느 내향인의 집 나간 외향성을 찾아서 >
원제 : Sorry I'm Late, I Didn't Want to Come
지은이 제시카 팬
옮긴이 조경실
펴낸곳 부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