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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OOK] 풍부의 추월차선

[책]단편소설계의 중경삼림<밤의 거미원숭이>무라카미 하루키/초현실주의 초단편소설/ISTJ 금지도서

by 돌냥 2023. 10. 2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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내가 갖고 있는 소설은 1995년판이다. 정확히 2003년 대학교 1학년이 되면서 이 책을 구매했다. 아직도 노르웨이의 숲, 1Q84를 안본 사람이면서도 무라카미 하루키 글이 재밌다고 말하는, 적당히 멀리 떨어져있는 사람이다. 생각해보니 집에 단편집이 몇 권 더 있다.

팬이라고 할 수는 없지만 하루키 글을 나처럼 단편으로만 접하고도 재밌어하는 이들이 (분명) 있을 것이다.

 

머리말에서 그는 그가 ‘소설의 효용’을 믿고 있는, 한사람의 아주 심플한 작가라고 말한다. 이론이니 뭐니 하는 것들은 아무래도 상관없다는 거다. 책을 다 읽고 나서야 머리말(한국어판을 위한 서문)의 이 말이 납득이 되었다. 아무리 두세페이지의 단편이라고는 하지만, 여기에 수록된 모든 글들은 이론 따위는 아예 없다.

무라카미는 긴 장편 틈틈이 이렇게 짧고 펑키한 이야기를 쓰다보면 마음이 상당히 가벼워진다고 했다. 일이라기보다는 일을 효율을 진작시키는 아주 바람직한 취미인 것이다. 이 책을 쓰는 동안 무슨 얘기를 써야 하나 고민하지 않아도 책상에 앉아 생각나는 대로 술술 단숨에 써내려가 조금도 고생스럽지 않았다는데, 참 부럽다. 

 

그리고 이 책은 애초 잡지에 광고시리즈(양복, 만년필 광고가 글 옆으로 덤처럼 실려있는)로 쓰인 것이다. (소설의 성질이 왜 가벼워야 했는지, 초현실주의적 위트의 주목적이 단번에 느껴지도..)한달에 한편씩 쓴 글을 책으로 모아 낸 것이 바로 이 단편집이다. 

 

 

 

스무살에 이 책을 읽었을 때의 느낌을 알려면 2003년으로 돌아가야 한다.

당시 나는 정신이 한창 불안했고 세상도 비정상으로 보였다. 그리고 본격적으로 묻지마 사회범죄들도 많아졌다. 그럼에도 경기는 나쁘지 않았는지 내 주변의 씀씀이는 지금 MZ들이 명품에 탐닉하는 수준 이상으로 웃돌았다. 동기 대학생 애들은 다 어디서 났는지 하나같이 브랜드 가방과 옷을 샀다. 언니는 돈도 안 벌면서 발급한 (당시에는 가능했다 얼마 안가 없어졌지만)신용카드를 돌아가며 쓰다가 갚지도 못할 큰 빚이 생겨서 집에 난리가 났다. 엄마가 가방이며 옷이며 다 창 밖으로 집어던지겠다고 으름장을 놨다. 아무튼, 그런 분위기였다. 나도 나지만 주변에 제정신인 인간이 하나도 없어 보이던 때(지금에 비하면 아무것도 아니지만), 그런 스무살에 만난 책. 나 뿐 아니라 이 책 또한 제대로 제정신이 아닌 것 같았다.

 

중간에도 더러 읽었지만 이제보니 당시에는 이해하지 못했던 부분들이 당연해보인다.

소설은 서사라고만 여기는 협잡함이 있던 나는 이 단편을 ‘이해하려고만’ 했던 것이다. 이해해선 안되는 글을 자꾸 의미를 파보려고 했으니 어떤 면에선 어렵게 느껴졌던 거다. 하지만 그 와중에도 하나부터 열까지의 황당무계한 설정과 전개에 맘이 한껏 빼앗길 만큼 엄청난 카타르시스와 매력을 느꼈다.

 

분명한 것은 말 그대로 되는 대로 쓴 글, 육감으로 쓴 글이라는 것이다.

무언가 은유하거나 암시하여 풍자하거나 그런 것이 딱히 있는 것도 아니고(있긴 하지만 풍자의 의도성을 애써 대놓고 강조하지도 않는다), 마치 심오한 무언가를 품은 척 하지도 않는다. 단순히 작가의 창작이 얼마만큼 비정상으로 보일 수 있는지 과시하려고 의식의 흐름대로 쓴 것 같지도 않다. 작가의 일탈에는 방종이 아니라 정돈됨이 있다. 그의 풀어진 자유 의식은 일종의 단정한 질서가 있다. 공감받지 못할 난해한 것으로 끝나지 않고 독자의 적극적인 호기심 그것이 말도 안되는 것일지라도 공감하고픈 이해할 것만 같은 ‘육감’을 끌어낸다. 그리고 그것은 무라카미 본인도 모르거나 의도하지 않은 것이다. 그래서 무라카미의 말대로 자랑은 아니지만, 이 정도의 얘기라면 그는 얼마든지 생각해낼 수 있다는 것이다(자랑이다..!고로 부럽다..)

 

 

읽어본 자들만이 느낄 수 있겠지만 <밤의 거미원숭이>에 실린 서른 일곱편의 글은 모두 뛰어난 상상력, 에 의해 쓰여졌다고 하기에는 뭔가 석연찮다.

결말은 늘 일종의 허무개그와 같다. 아니 읽을수록 대본없는 영화다. 기가 막혀하거나 열받아하거나 황당해할 필요가 없는 것이다. 게다가 불쾌함도 없이 그 짧은 끝에가서는 기묘한 재미를 느끼게 된다. 그러므로 온전히 재미를 즐기면 된다.

 

참 오랫만에 꺼내보는 기억이다.

스무살 무렵 다소 방종적(?)이었던 사회 분위기, 대학 입학 후 본격적으로 심해진 나의 조울증적 증세 등 삶의 온갖 혼란이 한번에 닥쳐오던 시기에 접했던 <밤의 거미원숭이>는 이미 약 십년전 일본에서 출간된 작품였음에도 어떤 '시차'도 느껴지지 않았다. 그러니까 아무리 심심풀이처럼 우스갯소리로 끄적인 이야기라해도(작가 나름대로는 있는 지혜 없는 지혜를 끌어다 썼다고 한다) 한 편 한편이 내겐 다분히 사회적인 암시가 있는 듯 했고, 어떤 분야에서도 정형화되지 못한 내 상태와도 동시적인 익숙함이 있었다.

 

 

만약 당신이 내게 ”이런 얘기에 무슨 의미가 있느냐?“라고 묻는다면, 나는 대답할 말이 없습니다. 특별한 의미가 없기 때문이죠. 아니, ‘의미가 없다’고 하면, 오해를 부를지도 모르겠군요. ‘의미가 없다’는 말이 아니라, ‘나는 그 의미에 대해 잘 모른다’는 말이 맞을 겁니다. 의미는 아마도-어딘가에 있을테죠. 내가 그런 얘기를 ‘문득’ 떠올렸고, 거기에는 내가 그런 얘기를 떠올릴 만한 ‘필연성’이 반드시 있었을 테니까요. 분명히 들쥐 정도 크기의 필연성이.(나는 여기서 들쥐와 무라카미의 띠(쥐띠)를 연결시킨다..) 
그러나 나는, 그 들쥐가 수풀 속에서 대체 무슨 생각을 하는지 잘 모른다, 는 말입니다. 내가 아는 것은, 내가 이런 얘기를 술술 써 내려갔다-그것도 신나게 썼다는 것뿐입니다. 그러니까 재미있게 읽어주세요. 우리는 우리들대로 즐기고, 들쥐는 들쥐 나름대로 재미있게 살면 되지 않을까요. -무라카미 하루키 서문

 

 

 

 


일본식 표현 뉘앙스 대한 잡설:

어쩐지 일본사람들은 애니메이션이고 드라마고 심지어 뉴스에 나오는 시민 인터뷰에서조차 ‘자기 본인이 하는 대답임에도 불구하고 마치 누군가의 말을 전달하는 것처럼 간접적인 화법, (화법만 그런 것이 아니라) 내용 자체도 두리뭉술하여 이렇기도 하고 저렇기도 한 것 같은, 예전이었다면 그래서 본론이 확실히 뭐야? 할 법만한 그런 회색지대적인 표현을 많이 하는 것 같다. 영어(잘, 많이, 못하지만)문장에서의 논지도 마찬가지다.
우리나라 글은 어쩐지 한글의 문자적 특징에 많이 갇혀 있다. 주제문장과 보조문장의 연결성이 확실해야 한다. 그래서 이렇게 해야만 혹은 저렇게 해야만 하나에 하나씩 딱 떨어지는 논리를 추구하고 원하게 된다. 국민성(국민 정서의 색깔)이 먼저고 말이 그렇게 되는 건지, 말이 그렇기에 국민성이 그렇게 되는지는 모르겠다. 우리나라의 언어와 그 내용은 어느 편으로든 극단주의자가 될 가능성이 농후하다. 그래서 좀 문장의 결이나 내용을 외국스럽게(?)바꾸어야 글이 단편적이지 않고 좀 더 풍요롭게 느껴질 여지가 생긴다. 지금 이 문장도 한국인이 보기에는 도대체 뭔 요지인지 헷갈릴지 모른다(그냥 글을 못쓰는 건지도).
결론은 여차저차 끝에 내 생각은 바뀌었다는 거다. 명확한 핵심 따위 없는 회색인간이 되기로 한 것이다. 그리고 그것이 평소에는 나에게도 주변에게도 좋다. (용도나 어감 등이 뭔가 제한적이긴 하지만 어쨌든 의미에 있어서는 가장 적합하므로 회색이라는 단어와 타협하기로 했다.) 다소 맹탕처럼 보이거나 비겁해 보이더라도 적어도 스스로에게 있어 진실을 말할 때 ’극단‘과 ’단정‘은 그 자체로 매우 위험한 대상인 것이다.
나는 요새 ~라고 알고 있다라는 말을 많이 쓴다. ~라고 하던데요. 라고도 쓴다. 그냥 그것이 맘이 편하다. 내 주관을 딱히 알려야 하는 순간이더라도 이렇게 뒤로 숨는 듯한 표현으로(일본 소설이나 만화만 그런 줄 알았더니 알고보니 일본인 전 국민이 현실 속에서 그런 표현을 하는), 넘의 생각처럼 넌지시 던지듯이(한국인을서는 겸손이 아니라 약간은 무책임할만큼 유약해보이는)대답하도록 해야겠다. 물론 때에 따라서, 그런 말투와 내용이 도움이 될 때는 말이다.  

 

 

추천하는 사람(MBTI를 접목하여)

과잉 일반화를 하자면, 확립된 규칙과 일관성을 사랑하는 ISTJ에게 처음부터 끝까지 오로지 즉흥성과 불규칙의 연속으로 이루어진 이 단편집은 다소 고역일 수 있다..ㅎ 더구나 구체적이지 않고 실용적이지도 않은 내용 그야말로 ISTJ의 모든 성향에 반대되는 창작물이기 때문이다(허구라 하더라도 무협이나 판타지처럼 나름 질서있는 세계관의 허구물을 좋아할 듯)

반대로 NFP의 사람들(특히 FP)이라면 누구나 어디로 튈지 모르는 자발적 창의와 기묘한 직관으로 가득찬 이야기들을 시간 가는 줄 모르고 곱씹고 또 곱씹으며 재미를 느낄 수 있을 것이다. (그러나 어느 시점에선 짜증이..)

 

 

 

<도넛화>

3년 동안 교제하며 결혼하기로 약속한 애인이 도넛화(化)해 버리고, 그래서 우리들 사이가 거북해졌을 때쯤ㅡ도대체 어느 누가 도넛화해 버린 애인과 잘 지낼 수 있겠는가?ㅡ나는 매일 밤마다 고주망태가 되어 <시에라 마드르의 보물>에 나오는 험프리 보가트처럼 비쩍 마르고 초췌해져 있었다.

"오빠, 제발 부탁이니깐 그녀는 단념해요. 이러다가 쓰러지겠어요."

누이동생이 충고했다.

"오빠 마음은 잘 알지만, 한번 도넛화해 버리면 다신 원상 복귀되지 않아요. 이젠 확실하게 결단을 내려야 한다구요. 안 그래요?"

분명히 그녀 말이 맞다. 여동생이 말하듯, 한번 도넛화한 것은 영원히 도넛화한 채 있는 것이다.

나는 애인에게 전화를 걸어 작별을 고했다.

"너하고 헤어지는 것은 괴롭지만, 결국 이렇게 될 운명이었나 봐. 너를 평생 잊지 못할 거야...... 어쩌고 저쩌고."

“당신은 아직도 모르는군요.”

도넛화한 애인이 말했다.

“우리들 인간 존재의 중심은 무無예요. 아무것도 없는 제로라구요. 왜 당신은 그 공백을 똑바로 직시하려고 하지 않죠? 왜 주변부에만 눈길이 가느냐구요?"

왜?라고 질문하고 싶은 것은 오히려 내 쪽이었다. 왜 도넛화한 사람들은 그처럼 편협한 생각밖에 하지 못하는 길까?

그러나 어쨌든, 그렇게 해서 나는 애인하고 헤어졌다. 그것이 지금으로부터 2년 전의 이야기다. 그리고 작년 봄, 이번에는 여동생이 아무 예고도 없이 도넛화해 버렸다. 조치대학을 나와 일본항공에 근무하기 시작한 지 얼마 지나지 않아, 출장 간 삿포로의 호텔 로비에서 갑자기 도넛화해 버린 것이다. 어머니는 집에 틀어박혀 매일매일 울면서 보내고 있다.

나는 가끔 여동생에게 전화를 걸어, "잘 지내?"라고 물어본다.

"오빠는 아직도 몰라?”

도넛화한 여동생이 말한다.

"우리들 인간 존재의 중심은……..”


<우유>

당신 우리 집에 우유 사러 왔죠? 어때요, 딱 알아맞혔죠? 아니 아니 대답은 안 해도 돼요. 아무 말 안 해도 안다니까요, 그 정도쯤은. 나는 벌써 24년째 여기서 우유를 팔고 있으니까요. 당신이 저쪽에서 오는 것만 보고도 탁 머리에 감이 잡혔다구요. 아, 이 사람은 우유가 필요하구나. 우유가 먹고 싶어서, 일부러 여기까지 터덜터덜 걸어왔구나, 하고 말이죠. 어때요, 굉장하죠? 헤헤헤헤. 이러니저러니 해도 24년간이나 쭉 우유를 팔아왔으니까요, 그 정도야 멀리서 힐끗 얼굴만 봐도 알 수 있다니까요. 하지만 말입니다. 이런 말씀 드리긴 좀 뭣하지만 당신에게는 우유를 못 팔겠어

요. 예, 그래요. 헤헤헤헤. 우유는 못 팝니다. 당신한테는 못 팔아요. 울며 매달리든, 금방망이 여러 자루를 가져오든, 당신한테만은 절대로 우유를 못 팝니다. 왜 그런지 궁금하시죠? 왜 나한테는 우유를 팔지 않을까. 하고. 내가 뭐 잘못한 일이라도 있는 걸까, 하고. 헤헤헤헤. 내 말이 맞죠? 하지만 아니에요, 그렇지 않아요. 나쁜 짓 같은 것은 아무것도 안 했어요. 아무 짓도안 했다니까요. 다만 말이죠. 제가 당신한테는 우유를 팔고 싶지 않다는 단순한 이유에서랍니다. 이건 이치가 아닙니다. 감정이라고요. 헤헤헤헤. 알겠어요?

24년이나 줄곧 우유를 팔고 있으면요, 이 녀석한테만은 우유를 팔고 싶지 않다 싶은 타입이 있거든요. 정말이라고요. 거짓말이 아니라니까요. 2,3년에 한사람 정도밖에는 안 되지만요, 분명히 그런 사람이 있다구요. 헤헤헤헤헤헤. 이상한 일이지만 얼굴을 한번 본 것만으로 이 녀석한테만은 우유를 못 팔겠다, 절대로 팔 수 없다는 마음이 들게 하는 사람이 있다니까요.

헤헤헤헤헤헤.

네, 네, 그렇습니다. 당신한테는 우유를 못 팔겠습니다. 절대 안팔겠다니까요. 헤헤헤헤헤헤.

(....;;;;;;;;;)


 

<다카야마 노리코 상과 나의 성욕>

지금까지의 인생에서 나는 제법 많은 여성들과 나란히 걸어보았지만, 다카야마 노리코(25세) 상만큼 빨리 걷는 여성은 보지 못했다. 그녀는 마치 방금 기름을 쳤지'라고 말하듯 양팔을 기분 좋게 앞뒤로 흔들며, 큼직한 보폭으로 아주 즐거운 듯이 거리를 걷는다. 조금 멀어진 곳에서 보면, 걷고 있는 그녀 모습은 마치 투명한 날개라도 달린 물매암이 같다. 민첩하고, 매끄럽고, 비가 그친 직후의 햇살처럼 행복해 보인다.

처음 그녀와 단둘이 나란히 걸었을 때(우리는 센다가야초등학교 앞에서부터 아오야마 1가까지 동행했다), 나는 그녀의 빠른 걸음걸이에 깜짝 놀랐다. 이 사람은 나와 같이 있는 것이 싫어서, 조금이라도 빨리 걷는 것이 아닐까 하고 생각했을 정도였다. 그렇지 않다면 저렇게 빨리 걸음으로써 내 성욕(性慾)을 얼마간이라도 감퇴시키려는 것이 아닌가 하고 생각했다(하긴 나는 다카야마 노리코 상에게 성욕을 느낀 적이 없기 때문에, 그런 행동이 유효했는지 어떤지는 판단하기 어렵지만).

그러나 그녀의 빠른 걸음걸이에 다른 뜻은 없었다. 그녀가 날듯이 걷는 것은 단지 그렇게 걷는 것을 좋아하기 때문이라는 사실을, 그로부터 몇 달이 지나서야 알게 되었다. 초겨울의 요쓰야 역 앞에서, 나는 혼잡한 사람들 속을 혼자 걷고 있는 그녀의 모습을 보았다. 그때도 그녀는 역시 뭔가 비정상적이라고 할 만큼 광장한 속도로, 편의상 도쿄라는 이름으로 불리고 있는 이 지표 위를, 어딘가에서 또 다른 어딘가로 이동하고 있었다. 오른손으로 숄더백의 끈을 꽉 잡고, 트렌치 코트 자락을 바람에 펄럭이면서, 등을 곧게 편 채 걷고 있었다.

내가 대여섯 발자국 그쪽으로 다가가 말을 걸려고 했을 때는, 이미 그녀는 휠씬 더 저쪽 편에 있었고 나는 <여정旅情>의 라스트 신의 로사노 브라치 같은 멋쩍은 모습으로, 혼자 요쓰야 역 앞에 남겨졌다. 그렇지만 다카야마 노리코 상이 내 성욕에 대해서 오해하지 않았다는 사실을 알게 돼서, 나는 무척 기뻤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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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밤의 거미원숭이> 원제 : 夜のくもざる―村上朝日堂短篇小說

지은이 무라카미 하루키
그린이 안자이 미즈마루
옮긴이 김춘미
펴낸곳 문학사상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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